군말이나 수사 따위 버린 지 오래인 듯
뼛속까지 곧게 섰는 서슬 푸른 직립들
하늘의 깊이를 잴 뿐 곁을 두지 않는다
꽃다발 같은 것은 너럭바위나 받는 것
눈꽃 그 가벼움의 무거움을 안 뒤부터
설봉의 흰 이마들과 오직 깊게 마주설 뿐
조락 이후 충천하는 개골의 결기 같은
팔을 다 잘라낸 후 건져 올린 골법 같은
붉은 저! 금강 직필들! 허공이 움찔 솟는다
(정수자, ‘금강송’ 전문)
해마다 그렇지만 근래 한라산은 말 그대로 설국입니다. 나무도 바위도 계곡도 봉우리도 모두가 다 새하얀. 그런데 이 풍경 속에서도 그 색을 버리지 않고 선 한 나무가 있으니 이름 하여 ‘금강송’입니다. ‘꽃다발/ 같은 것은 너럭바위나 받는 것//눈꽃 그 가벼움의/무거움을 안 뒤부터//설봉의 흰 이마들과/ 오직 깊게 마주설 뿐’. 그렇습니다. 세상의 환호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다는 것, 곧 그것은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예’라는 것이, 비록 한낮 꽃이라고는 하지만 눈꽃, 그것이 의미하는 그 가벼움의 무게감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오늘도 저 저잣거리인 세상을 뒤로 한 채 설봉의 저 흰 이마들과 마주하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요.
난데없는 감염병으로 인해 여러모로 썰렁하고 쓸쓸한 세밑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들이 더 그리워지는 요즘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인데도 감사한 것은 설상가상 이렇듯 어렵고 추운 시기에 서로 각각 떨어져 그동안의 삶들을 다시 되돌아보고 또 그 삶들을 성찰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우리 모두는 저 시편에서 이야기하느 것처럼 한 그루씩의 ‘금강송’으로 다시 거듭나게 되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래서 신은 봄을 허락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겨울을 허락하는 것이겠지요! (시인 송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