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닥속닥 송인영의 문학이야기(36)언문으로 쓰여진 밤(심재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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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닥속닥 송인영의 문학이야기(36)언문으로 쓰여진 밤(심재휘)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01.0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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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으로 쓰여진 밤

옛사랑이 보내준 제주 귤차를 우린다

이내 밀려오는 향기와 달리

그가 있는 옛날은 남쪽처럼 멀고 또 희미하여서

무언가 얼비치려다 곧 맑아지는 찻물의 표정

차 안에 여러 맛이 섞여있는지 몇 가지가

어렴풋한 저녁이다

가지를 쥔 저녁 새가 조금씩 옆걸음하여

밤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저녁은 또 조금 어두워지고 어두워져서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입 안에 물컹하며 남아도는 것은

그저 맹물 맛인데

입도 아니고 코도 아닌 곳을 스치는 야릇한 향기

이런 심심한 연애가 세상에 만연하여서 아프고

아팠다는 말만으로는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저녁들

따뜻한 맹물 위를 겉돌기만 하는 향기처럼

서로 영원히 섞일 수 없는 것들은 왜 만나

어스름 쪽을 돌아보는 오늘 내 눈빛은

언문으로 쓰여진 밤이다

                      (심재휘, ‘언문으로 쓰여진 밤’, 전문)

송인영 시인.
송인영 시인.

이렇듯 맹렬한 추위를 녹일 수 있는 것들 중에 또 이만한 게 있을까요. 따뜻이 스며드는 많은 것들 중 그 중에서도 특별히 차는 맛도 맛이지만 그 향기를 먹는다는 게 맞는 말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향기로운 차 중에서도 가장 으뜸인 ‘귤차’임에도 불구하고 입 안에 남는 것은 그저 맹물뿐이라니요. 사랑은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렴풋하기만 한. 하여, ‘연애’ 그 중에서도 ‘심심한 연애’라고 하는. 말이 그렇지 세상 연애 중에 ‘심심한 연애’라는 것은 없을 테지요. 결국은 아프고 아팠다는 말만으로는 쉽게 해석 할 수 없는 저녁이라고 하는 걸 보면.

귤차를 우려 보면 마시는 것이라기보다는 맡는 것이라 할 만큼 금새 그 향기에 취하곤 하지요. 겉돌기만 한다고는 하지만 분명한 그 사람처럼. 그러나 시인이여, 영원히 섞일 수 없어 슬펐다 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있었기에 이렇듯 우리들의 저녁 한 켠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게 아닐는지요. 온전히 다 내어주고도 말없이 물러나와 저무는 이 저녁, 저 홀로 돌아가는 저 과육처럼.

                                                                                         (시인 송인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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