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운 선생님의 아름다운 동티모르 (12)‘상록수’ 성당
상태바
이영운 선생님의 아름다운 동티모르 (12)‘상록수’ 성당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03.22 09: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상록수’ 성당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상록수' 성당

오늘은 Becora 성당 주일 미사에 참례해 보기로 했다. 지난번 들은 바로는 8시에 포르투갈어 미사가 있다고 했다. 시간이 여유로워서 천천히 출발했다. 문제는 조금 더운 날씨에 도보로 가려니 시간도 걸리고 많은 땀이 벌써 등줄기를 많이 적시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성당 앞 주변에 수많은 오토바이와 뒤얽힌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아마 직전 미사가 아직 진행 중인 것 같았다. 가까이 가보니 나무 그늘 마다 그리고 땡볕인데도 성당 마당 가득히 사람들이 모여 서서 미사 참례 중이었다. 길가와 인도도 가득하다. 길 건너 쪽 인도까지 많은 사람들이 성당방향으로 서서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곳곳에 아이들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장난치기에 바쁘다. 몇 군데 설치된 확성기로 성당 안에서 진행 중인 미사 내용이 전달되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심훈의 개몽 소설 ‘상록수’가 연상된다. 다닥다닥 교실 밖 유리창에 눌러 붙어 글을 배우려고 매달린 아이들과 매미소리가 잘 어울리는 것처럼, 밖에서 스피커 소리에 맞춰 미사 보는 신자들의 모습이 비슷해 보였다.

멀리서 들리는 성가 소리는 웅장하고 성스럽다. 동티모르의 대중가요나 성가들은 우리의 정서에 잘 맞는다는 생각이 늘 들었다. 미크롤렛을 타면 아주 크게 가요를 틀어 놓는데 서정 깊은 곡조가 항상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곤 한다. 그 작은 버스에 스피커는 어디 있을까 궁금했는데 의자 밑에 대형스피커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 7080 노래의 음조와 거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7시 50분에 도착했는데 8시 35분에 미사가 끝났다. 미사 앞부분을 빼먹었으니 다시 도미니끄 성당으로 돌아가서 미사를 보기로 했다. 9시 미사가 있으니 서두르면 될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성당으로 갔다.

8시 30분 포르투갈 미사가 금방 시작되고 있었다. 포르투갈 미사는 처음이다. 몇몇 단어들이 조금 익숙하게 들려왔다. 관계대명사 que가 프랑스어와 같고, 또 숫자와 일부 명사는 테툼어와 비슷했다. 아마 테툼어에 포르투갈어가 채용되어 사용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익숙한 라틴어들도 들린다. 신부님은 두 분이고 복사는 10명 정도다. 미사는 조용하고 경건하다. 강론(Homilia) 부분은 너무 길다. 한국에서는 보통 5분에서 7분 정도인데 이곳에서는 30분 가까이 하는 것 같다.

일요일에 두 곳 미사에 참석하다 보니 너무 지쳤다. 버스를 타고 가까운 마트로 갔다. 계란 한판 30개 들이와 돼지고기를 조금 사고 귀가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닭고기와 양파를 넣어 닭 육개장 비슷하게 만들었다. 빨래를 하고, 컴퓨터로 음악을 들으면서 조용히 오후를 쉬었다.

전기과 학생들과 함께.
전기과 학생들과 함께.

◇ 무너져 내린 천정

아파트 여주인 Jany가 아침 8시 30분경에 갑자기 내려와 문을 두드린다. 며칠 전 싱크대 안쪽 밑에서 계속 물이 흘러내려서 수리를 부탁했었다. 그리고 침실 천정 네 모서리에 장식으로 붙인 졸대 한쪽이 떨어져서 나무와 접착제인 흰 석회들이 부셔져서 침대와 온 방이 엉망이 되었다. 인부 4명이 함께 들어온다. 모두가 이집에서 주인 사장과 함께 전기 설비 등을 하는 기사들이다. 한 사람은 치오콜로 싱크대 배수관을 땜질하고, 세 분은 사다리를 들고 와서 천정에 떨어진 장식을 새로 붙인다.

손으로 석회를 개어서 엉성하게 바르다 보니, 결국 멀쩡했던 다른 장식들도 계속 떨어져 내린다. 점점 공사할 부분이 늘어났다. 어쨌든 3, 40분 정도해서 수리는 끝났다. 엊저녁에 얘기했는데 오늘 아침에 수리해 준 것은 대단한 성의처럼 느껴졌다.

옆방 최자문관이 와서 보면서 자기 방 얘기를 한다. 몇 달 전에 그 곳도 수리해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는데 엊그제야 손봐주었단다. 치오콜로 금간 곳들을 채우면서 여기저기 부스러기들이 많이 떨어져서 잔해들을 치우느라 하루 종일 걸렸다고 한다.

오늘은 오전 9시 30분에 검찰청에 근무하는 박형규 시니어 단원을 만나 함께 컴퓨터와 프린터 등 사무 관련 전자 제품을 구입하기로 약속했었다. 집수리를 마치고 대강 정리하니 9시가 되었다. 급히 미크롤렛을 타고 가서 주교좌 대성당 앞에서 내렸다. 이 대성당은 동티모르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대주교가 거주하고 있고, 성당이나 국가의 중요한 행사들이 치려지는 성지와 같은 곳이다. 박선생님이 설명해준 대로 차에서 내려 바다 쪽으로 쭉 내려가다가 길을 건너 조금 가니 동티모르검찰청(PGR) 건물이 오른 쪽에 보였다.

중앙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니 멀리 떨어져 있는 수위실에서 잡담하던 경비가 부른다. 모자를 벗으라고 한다. 모자를 벗었더니 그냥 들어가라고 한다. 내가 코이카 모자를 쓰고 있어서, 코이카 관련 봉사단원을 만나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건물 안 안내 데스크 여자분께 코이카 박선생님을 찾아 왔다고 하니 근무하는 사무실까지 친절히 데려다 주었다.

조그만 전산실 사무실엔 박선생님과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권하는 아쿠아 생수를 한 모금 마시고 조금 있으니 한 젊은이가 또 들어왔다. 전산 담당 공무원이라고 한다.

밖으로 나와 10여분 걸어서 컴퓨터와 전산용품 전문 상가인, 서울 같으면 용산 상가 같은 곳으로 갔다. 지난번 인터넷 용 윈도우10 모뎀을 구입했던 곳이다. 며칠 전에 견적 받았던 ‘오블리가도(포루투갈어로 감사합니다의 의미)’ 상점으로 갔다. 그런데 주변 거의 모든 상점에 상호명 간판이 없다. 설명에 의하면 요즘 간판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새로운 세법이 통과되어 모두 간판을 내려버렸다고 한다. 그러니 처음 가는 가게는 수소문해서 상점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여사장과 약속했던 10시가 되었는데 나타나지 않는다. 이곳은 남자 사장은 인도네시아 사람이고 여사장은 한국인이다. 여사장은 코이카 봉사단원으로 왔다가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하고 남편은 인도네시아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고 한다.

이영운 선생님이 쓰던 사무실.
이영운 선생님이 쓰던 사무실. 'BRAUN'점포에서 사다가 세팅했다.

한참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여직원에게 견적 받은 물건 값을 조금 내려줄 수 없는지 부탁해 보았다. 직원은 이 견적서가 이미 할인된 것이므로 조금도 깎아줄 수 없다고 한다. 박선생님이 자기가 아는 다른 단골 가게가 있으니 한 번 그곳에 가서 가격을 비교해 보자고 한다. ‘Braun' 상호의 컴퓨터 가게로 갔다. 착해 보이는 어린 여직원과 남자 사장이 있었다. 동일 사양인데 가격이 훨씬 저렴하다. 컴퓨터, 프린터, 전산 부품 등 1280 달러에 구입했다. 원래 이곳은 물건 배달은 안 되지만 내가 부탁하니 기꺼이 배달해 주겠다고 한다. 사장 승용차에 물건을 싣고 학교로 왔다. 박선생님이 컴퓨터 전문가이기 때문에 사장은 떠나고 박선생님이 컴퓨터를 세팅했다. 그런데 프린터가 설치했는데 인쇄가 안 된다. 가지고 가서 교환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조금 기다리니까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이 프린터는 대용량으로 잉크를 아주 오래 쓸 수 있고 잉크를 직접 충전할 수 있기 때문에 조금 기다려야 잉크가 올라오는 것이었다.

하나의 문제가 남아있다. 윈도우10이 영문판이어서 한글버전으로 바꿔야 하는데 그것이 문제다. 보통 문제가 아니다. 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때 내가 아는 자문관으로부터 영문판을 인터넷을 통해 한글판으로 바꾸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박자문관에게 말했으나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이 곳에는 한글 윈도우가 없기 때문에 만일 전환이 안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영문판을 쓰면 되지만 많이 불편할 것이다. 자판도 영문판이다. 그래서 단원들은 영문판에 한글 자모를 글로 써서 붙여서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이 곳에 올 때 한글 자판을 갖고 와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치를 마치고 버스로 집근처 중국 식당으로 가서 볶은밥, 새우 튀김 등으로 편히 푸짐하게 점심을 먹고 근처에 있는 박선생님 댁에 가서 커피도 마셨다. 이제야 사무실에서 근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사무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박선생님도 이제 살아온 얘기를 펼쳐 놓는다. 박선생님은 원래 사법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했다. 컴퓨터에 능해서 군 제대 후 교직으로 가지 않고 동아생명에 스카웃 돼서 전산 분야에 뛰어들었다. 한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컴퓨터 분야 일을 많이 했었다. NIPA 자문단으로 3년간 일했고, 코이카 자문단으로도 근무했었다. 지금은 코이카 시니어 단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박선생님은 성격이 너그럽고 온화하며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심이 깊은 분이다. 지금은 자기도 학교 같은 곳에서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이곳 검찰청에서 전산 업무도 하고 연수도 주관하다 보니 사범대학 출신의 교사 본능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 같다. 어학에 대한 콤플렉스가 항상 따라 다녀서 요즘은 주말에 인도네시아 대사관 제공하는 무상 인도네시아어 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집에 와서 윈도우 10 영어 버전을 한국어 버전으로 전환하는 프로그램을 검색해 보았다. 가능할 것 같다. 오늘은 소위 정신 못 차리게 바쁜 그러나 보람찬 하루였다.

◇ 갑작스런 귀국

갑자기 한국으로 휴가 출국했다가 3주 만에 다시 동티모르로 귀국했다. 그 사이에 장인어른이 귀천하셨다. 오래 비웠던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니 뭔가 썩는 냄새와 날 파리들이 달려든다. 살펴보니 가스렌지 위 냄비 주변에 날 파리들이 몰려있고, 그 주변엔 조그만 애벌레들이 기어 다니고 있다.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부패된 찌개 위로 날 파리 애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있다. 문을 열고 우선 설거지를 했다. 이어서 대청소를 했다. 소독약으로 온 집안을 소독하고, 파리모기 구제용 에어로 졸로 날 파리를 모두 제거했다.

지난 7월 출국할 때부터 장인어른은 몸이 쇠약해져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고, 결국 입원한 상태에서 출국했었다. 그 사이에 어르신이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소식은 계속 전해 들었다.

3주전 9월 13일 학교에 출근했다가 인터넷 모뎀이 바닥나 충전하려고 오전 일과를 마치고 학교를 나섰다. 잠시 집에 들려 인터넷을 켜보니 그 사이에 카톡과 전화가 여러 차례 와 있었는데 받지 못 했었다.

전기과 수업 모습.
전기과 수업 모습.

매일을 열어보니 딸이 어르신 소식을 알려왔었다. 급히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더니 왜 통화가 안 되냐고 성화다. 내일이 일포고 모레가 발인이라고 한다. 코이카 사무실로 전화하니 신승우 대리가 빨리 공항으로 출발하라고 한다. 간단한 짐과 여권, 여비를 갖고 택시에 올랐다. 정말 무엇을 챙겨서 가야할는지 전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대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또 필요한 것은 어디에 두고 있는지 기억해 두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신대리와 정과장이 미리와 표를 예약해 기다리고 있었다. 표를 구입했다. 신대리는 발리에 도착하면 카톡을 켜 놓고 2층 대합실로 가라고 한다. 그 곳에서는 카톡이 켜지기 때문에, 열어보면 발리에서 한국으로 가는 표 예매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 사무실로 돌아가 표 예매를 해두겠다고 한다.

2시 30분 비행기를 가까스로 타고 발리에 도착했다. 카톡을 열어보니 대한항공 비행편이 구매되어 있었다. 김포에 도착했다. 문제는 김포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편이 오늘은 모두 만석이었다. 대기도 힘들다고 한다. 상황을 얘기하고 대기표를 끊고 해서 겨우 겨우 제주에 도착했다. 오후 3시 30분이다. 제주시 집에 짐을 풀고 서귀포 장례식장으로 갔다. 동티모르 너무도 먼 곳이지만 여러 사람이 모두가 힘을 합치니 무사히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모임과 친구들이 와서 망인의 명복을 빌어주었고 또 나를 위로해 주었다. 참으로 고마우신 분들이다. 이튿날 어르신은 사시던 집에서 노제를 드리고, 신효 공동묘지 유택에 영면하셨다.

어르신의 나이는 95세이시다. 어르신을 유택에 모시고 나서 낙천사 절로 가서 불공을 드렸다. 집으로 돌아오니 안마당에서 서성이며 집을 보살피시던 어르신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버님은 젊어서 일본 사할린에 강제 징용을 당하셨고 해방 후에는 돌아와서 줄 곳 일생동안 농업, 주로 감귤 농사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다. 거의 두세 해 마다 밭을 사서 감귤을 심고 아들 다석과 딸 하나를 지극 정성으로 키웠다. 그리고 그 중 넷을 서울에 있는 연세대, 서강대, 중앙대 등에 유학 보냈으니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집 사람은 신효 마을 여학생으로는 두 번째로 서울로 유학한 대학생이었다. 여섯 자녀들이 출가하여 살림을 차릴 때는 모두 생활기반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우리도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우리가 결혼을 하게 되었을 때 장모님은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장인어른이 적극 지원해 주셔서 쉽게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어르신은 젊었을 때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고 하지만 제대로 들어본 적은 없다. 가끔씩 가요무대 방송을 보면서 따라 부르는 소리를 먼발치에서 엿듣곤했었다. 음주는 안 하시고 담배는 즐겼다. 그나마 몇 년 전에 장모님의 성화로 끊으시고, 최근까지 경로당을 오가며 한가히 지내고 계셨는데 나이도 있고 해서 자주 폐렴 증세가 있었다. 나는 돌아가시던 날 밤에 꿈을 꿨는데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친 아버지가 나에게 심하게 꾸중하는 꿈이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티모르에서 허겁지겁 출국하다 보니 이런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가스 불을 켜놓고 떠나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었다. 신대리와 황과장이 신속 정확한 일처리로 대사를 잘 치르도록 도와주어서 너무도 고마웠다.   (2017년 9월 10일, 9월 11일, 10월 3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