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본 제주관광] : (1)100년전 수학여행(조봉춘 관광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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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본 제주관광] : (1)100년전 수학여행(조봉춘 관광학박사 )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05.06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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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 년 전 제주농업학교, 국외(일본 각지)·국내(조선 각지) 수학여행 있었다
대정읍 광선의숙생 30명, 10박11일 제주도 완주 수학여행 하루 20km쯤 이동

관광산업은 다양한 측면에서 파급시키는 유용한 효과로 말미암아 전 세계의 모든 국가가 발전한 산업과 청정환경을 기반으로 관광객 유치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제주에서도 1960년대 후반기 관광입도를 기치로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개발을 전략적으로 추진했다.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제주관광, 지금에 이르기까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들을 되짚어본다. 필진은 조봉춘 박사의 글부터 싣는다. <편집자주> 

 

3.1운동이 벌써 102년이 지났다.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온 겨레 동포가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이후 일제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통치방식을 바꿨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일간신문도 이때 발간되었다. 관광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필자가 최근 옛날 제주에서 어떤 여행이나 관광 활동이 있었을까? 생각하던 중 아래와 같은 3.1운동 이후 시기 발간되었던 신문기사에서 내용을 찾게 되었다. 아래 표에서 기사원문은 왼쪽에 정리했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오늘과 달라 오른쪽에 현재 기준으로 정리했다.

◇조선일보, 제주농교수학여행(1923.10.16.) 제1, 제2대로 나눠 일본 전역과 국내 전역을 여행

         제주농교수학여행

조선일보, 제주농교수학여행, 1923.10.16.
조선일보, 제주농교수학여행, 1923.10.16.

제주도성내에 있는 제주공립농업학교에서는 이대로 분하야 제일대는 일본각지로 제이대는조선각지로 수학여행을 하려고 내정이던바 금반일본진재와 기타사정으로 목적을 변하야 제일대는 목포경성부산으로 제이대는 제주각지에 수학여행하게되얏는데 경부행은 본월십일 산지포발 우선으로 최계순씨인솔에 부산을 향하야 출발하얏으며 제이대는 재등씨의 인솔하에  제주를 일주하려고출발하얏다더라.<조선일보, 1923.10.16>


위 첫 번째 기사는 1923년 10월 16일 조선일보 기사이다. 여기서 제주농교는 지금의 제주고등학교로서 당시 제주농교라고 불리었다. 1907년 7월 1일 제주 최초 근대적 중등교육 사립제주의신학교가 개교하였고, 당시 대한제국 학부는 사립의신학교를 공립제주농림학교 설립인가 형식으로 공립 전환 승인을 하였고. 일제치하에서 일본식으로 교명도 제주공립농업학교(1911년)로 바뀌었다(고영철의 역사교실, jejuhistory.co.kr).

이 기사에서의 일본진재(지진)는 1923년 9월 1일 강도 7.9 지진이 일본 관동지역에 발생해 혼란한 시기에 일본군대·경찰·자경단이 조선인 6000여명과 일본 사회주의자를 무참히 학살한 관동대지진 사건을 말한다. 당초 수학여행 계획에는 일본전역이 코스로 있었으나 이 사건 등으로 인해 변경된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수학여행단 구성을 제1대와 제2대로 나누었고, 코스도 제1대는 일본에서 국내로, 제2대는 국내에서 제주로 변경되었다. 국내 코스인 경우 산지포에서 출발했다는 것 이외에 구체적인 정보는 없어 당시상황 등을 감안해서 유추해 보면, 산지포는 탐라국 시절부터 이용되던 포구였고 18세기 김정 목사 때 주민의 부역으로 보완하였으나 협소하고 수심이 얕아 관문항으로 역할을 못해 조선후기 유배인들은 조천포나 화북포로 내렸다 한다. 1920년대 이후 일제에 의해 1926년 착공, 1927년 개항, 1929년 완공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 과정에 제주성 성곽 상당부분을 허물고 항구매립 골재로 사용해 버렸다. 기사가 1923년 10월로 보아 본격 신항이 만들어지기 이전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의 우선(郵船)은 일제시대 조선연안 항로를 독점하던 조선총독부에 의해 국책회사로 설립된 조선우선주식회사에서 운영한 우편선이며, 1923년 5월 3일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제주ㅡ부산 선임(여객운임)은 대전(제1차세계전, 1914-1918) 이전에 삼원오십전, 대전 이후 사원오십전이었는데. 대전 이후 물가하락을 반영하여 제주ㅡ부산간 1인 선임을 삼원오십전으로 결정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참고로 1920년대 물가는 단성사 입장료 특등 1원50전, 1등 1원, 2등 60전, 3등 40전이며, 전차요금 1구간 5전, 인력거 요금 10리(4km) 80전, 하루 5원이었다. 현재 영화티켓이 1만원 정도인 것을 감안할 때 단성사 2-3등 요금을 반영하면 당시 제주ㅡ부산간 선임(운임)은 현재 6만원~9만원 수준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동아일보“제주일주여행-모슬포광선의숙생이-(1925.5.24.), 각면 공사립학교 견학과 명승지 관람

        제주일주여행 모슬포광선의숙생이

동아일보, 제주일부여행-모슬포광선의숙생이-,1925.5.24.
동아일보, 제주일주여행-모슬포광선의숙생이-,1925.5.24.

제주도모슬포광선의숙보습과생도삼십명은 오월사일오십시에 교사 강규언씨인솔하에 대정읍내 기점으로 출발하야 서편으로주행하며 각면공사립학교에 견학하고 제주성의 용연야범과 사봉낙조의 아려한 풍경과 성산포의 성산일출과 서귀포의 장쾌한 정방폭포를 완상한후 십사일하오오시에 기점인 대정면사무소정문전에 도착하야  제주일주만세를 고창하고 귀교하였다고. <동아일보 1925.5.24.)

두번째 동아일보 기사에서 광선의숙은 ‘1920년 7월 우면(현 대정읍) 하모리에 윤식명 목사와 최정숙 장로에 의해 남녀공학으로 문을 열었다. 강규언 교사는 중문출신으로 3.1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 복역했다. 조선광복의 의미를 갖는 광선이란 학교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민족의식이 높은 크리스찬들이 숙장, 교사를 맡았다(고영철의 역사교실, jejuhistory.co.kr).’

두번째 기사를 보면 당시 약100년전 대정 하모리 지역 학생들은 10박 11일간 제주도를 완주하는 형태로 수학여행을 한것으로 보인다. 현재기준 제주도 해안지역 일대를 순회하는 일주도로 총길이가 약180km이고, 제주본섬 해안선 길이가 420km인점을 감안하더라도 하루에 약20km 이상은 이동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어린이가 당시 지금과 비교 할 수 없었던 도로 사정에서 시간 당 3~4km 이동하기  위해서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도보만으로 이동했는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했는지는 이 기사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 수학여행·일주여행·견학이란 표현 혼용

첫번째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수학여행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두번째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수학여행이란 용어대신 일주여행 또는 견학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수학여행은 일본식 한자어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쓰기 시작했고 이 분야를 연구한 임성모 연세대 교수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에서 문부성과 육군성에서 공동으로 전일본 중고 이상 학교 대상으로 확대시켰고, 전쟁유적이나 당시 비화 등이 주요 학습내용이었으며, 1조·2조와 같은 군대식 편제로 이동했던 것처럼 초창기 일제의 수학여행은 황국식민화 같은 정치, 군사적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라고 제시한다. 이에 앞선 1923년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학생들을 제1대와 제2대로 나누어 편성한 것을 볼 수 있다.

100년전 제주 학생들의 여행코스는 용연야범, 사봉낙조, 성산일출, 정방폭포 등과 같았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들은 관광객들에게 알려진 유명 관광지이다. 한편으로는 이곳의 아름다움이 한 세기가 지나도 계속되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최근 이곳저곳에 생긴 새로운 인기가 많은 관광지도 한 세기가 지나도 계속 사랑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제주목사 이익태(1694~1696), 『지영록』의 ‘탐라십경도서’가 영주십경의 효시?

두번째 동아일보 기사에 제시된 4가지 도내 코스는 영주10경 표현을 따르고 있다. 영주10경은 19세기 중순경 제주학자 이한우 아니면 비슷한 시기 제주목사(1841) 이원조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 역시 150여년 전 제주목사(1694-1696) 이익태의 지영록에 수록된 탐라십경도서에 제주에 경치가 좋은 백록담, 천지연, 성산, 서귀포 등이 포함된 것에 유래된 것으로 유추된다. 이후 부임한 이형상 목사(1702-1703)가 제작한 탐라순력도 41개 화첩에도 성산관일, 산장구마, 정방탐승, 산방배작, 호연금서 등은 영주십경의 성산일출, 정방하폭, 산방굴사, 고수목마, 녹담만설 등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한다. 요즘도 인기있는 관광지가 100년전 수학여행 코스였고, 이는 또 한 세기 전 조상에 의한 역사 유산이었으며, 이 역시 그보다 150년 전 선조들의 의해 만들어진 제주 자연과 문화 유산이었다는 점을 연결 시켜 생각하게 되니 의미가 남다르다. 요즘 말로하면 잘 만들어진 문화콘텐츠, 관광콘텐츠는 시공이 지나고 변해도 지속되고 후대로 연계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학여행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용어 문제는 둘째 치고서라도 안전 부분은 가장 빨리 해결해야한다. 1999년 경기화성 씨랜드 화재, 2014년 4.16 세월호 참사와 같은 수학여행 관련 국가적 재난이 발생할때마다 안전한 수학여행을 위한 조치들이 행해지지만 사고는 계속되고 있다. 제주에서도 2008년 어승생 앞 1100도로, 2012년 금능사거리에서 수학여행단 사고가 있었다. 사망자와 중경상 부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그 이후 전세버스 차령 및 주행거리 하향, 정비검사 강화, 안전요원 배치·인솔·안전지도, 화재보험·여행자보험가입, 운전기사 음주측정 등이 제주에서도 강화되어 진행되었다.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19로 온 국민이 시름하고 있다. 2년간 집합활동인 수학여행이 금지되면서 제주 학생들도 수학여행을 못가고 있고 전국 수학여행단들도 제주방문을 못하고 있다. 사람의 이동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가치였나를 모두에게 시사하고 있는 오늘이다. 사람들끼리 만나고 이동하고 또 일상으로 돌아오고, 여행과 일상이 순환되는 과정. 100년전 제주와 관련된 수학여행 신문기사를 보면서 오늘 제주를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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