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헌의 비행기 이야기](26)영공통과협정을 위한 死線(사선)을 넘나드는 외교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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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헌의 비행기 이야기](26)영공통과협정을 위한 死線(사선)을 넘나드는 외교의 현장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08.09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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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공통과협정을 위한 死線(사선)을 넘나드는 외교의 현장
문영헌 제주항공정책연구소 사무국장
문영헌 제주항공정책연구소 사무국장

하늘의 자유(25회분)에서 언급한 제1자유(영공통과의 자유)는 외교관계와 밀접하다.

우리 외교관들의 현주소를 외교부 발행 수필집 ‘외교의 현장에서’ 제2장에 나와 있는 한 외교관의 영공통과협정을 위하여 死線(사선)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노태우대통령의 주요정책중 하나가 북방정책이었다.

우리나라가 러시아와 중국과 국교를 세운 것은 각각 1990년, 1992년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영국이나 프랑스에 갈 때 거의 직선코스로 날아가지만 불과 약 30년 전 만해도 우리나라 항공기는 러시아나 중국의 하늘에 접근을 할 수 없었다. 예전에는 태평양을 건너 미 알래스카주 앵커리지로 간다. 거기에서 승무원 교대와 급유가 이루어진 후 유럽 목적지로 가는 형태였다.

2004년 발행된 책을 소개하는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
2004년 발행된 책을 소개하는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

1992년 8월 24일 역사적인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중국은 한·중수교를 앞두고 북한에 사전 양해를 구했으며, 한국은 '하나의 중국(一介中國)' 원칙을 존중해 대만과 단교했다.(당시 한국 외무부장관: 이상옥, 중국 외교부장: 첸치첸)

양국 고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개최된 리셉션에서는 수교를 축하하는 샴페인이 터뜨려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중국해협의 다른 한쪽에서는 한-대만 단교에 대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날로 대만에서 '한국' 글자가 들어간 간판은 전국적으로 내려졌으며, 택시는 한국인의 승차를 거부했다.

항공협정은 즉시 폐기되었다. 제1자유 영공통과가 거부되었다. 동남아를 가는 한국 항공기는 대만 영공을 통과하지 못하고 중국 동해안으로 들어갔다 빠져 나가야만 했다.

대만과 단교한 날, 그날로부터 1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서 1993년 11월에는 주 타이베이 한국대표부가 설립되었고 다시 1년 4개월이 지난 1995년 3월, 단교 후 2년 반만에 대만과의 비밀항공회담이 열렸다. 대만은 단교의 보복 조치로 국적항공기 취항을 중단하고 과일 및 자동차 교역을 중단시켰다. 단교와 동시에 단항이 되어 쌍방은 많은 불편과 경제적인 불이익을 감수 해야만 했다.

당시 제주시 이도동에 위치한 북경반점 2세 사장은 필자를 만날 때 마다 불편을 하소연하기도 했다.

회담은 단교를 당한 대만의 미묘한 감정과 협정 용어 등에 대한 입장차이로 결렬되었다.

회담이 진행되는 중에도 대만 현지 언론들은 연일 확인되지 않은 내용과 우익적인 내용들을 보도하였다. 회담은 결렬 되었지만 보고서 작성을 위해서 나를 포함한 대표단은 사무실에서 새벽 3시까지 남아 있었다. 이틀간의 회담 보고서 작성이 끝나 후 새벽 3시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대표단을 호텔까지 모셔다 드리고 다시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하였다. 나는 평소처럼 주차할 장소를 찾기 위해 좌우를 살피며 고개를 들어보니 7층 베란다에 서있는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도착한 것을 확인한 아내는 문을 열어 주기 위하여 7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나는 그때 차를 주차 시키고 있었다.

엔진을 끈 후 내릴려고 문을 열면서 동시에 왼발을 내 디뎠을 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엔성(先生-아저씨)” 나는 왼 발에 힘만 주면 일어설 수 있는 그 순간 고개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리는 순간

‘푹’,

‘확’,

‘퍽퍽’,

‘휙’

이 네 단어가 대략 5초 동안에 일어난 상황이다. slow-video로 다시 돌려 보면,

‘푹’은 칼이 내 목을 푹 찌르는 것이고,

‘확’은 내가 운전석에 앉은 채로 원통 돌리듯 몸을 돌리면서(엉덩이를 앞으로 밀고, 동시에 어깨를 의자에 기댄채로 낮추면서) 손으로 칼을 잡은 것을 말한다. 반사적으로 일어난 순간 내가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 시퍼런 양날의 칼임을 알았다. 칼날이 내 눈에 포착되는 순간 나는 이 사람이 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는 판단에 살기 위한 몸부림을 쳤다. 두 구둣발로 사생결단 그 놈의 가슴팍을 ‘퍽퍽’ 찼다. 아직도 내 손은 그 칼날을 감싸고 있으면서 “아내가 위에서 보고 있어”라고 하자 그 놈은 칼을 빼어 어디론가 ‘휙’ 사라졌다.

175cm정도의 키에 날렵하게 생긴 그 놈은 칼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이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판단하였거나, 아니면 아파트 위에서 아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하니까 잡힐까 겁나서 도망쳤을 것이다.

“지우맹아(救命阿-사람살려)”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나는 “지우맹아”라고 외쳤지만 소리가 들리지를 않았다. 대신에 뿌룩뿌룩 하면서 거품소리가 들렸다. 내 목에서 나는 소리였다. 나는 황급히 내 오른 손을 목에 갖다 대고 바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꾹 눌렀다. 1층까지 내려와서 현관문을 여는 아내에게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 났다. 목에 칼 맞았다. 빨리 병원에 가야한다. 사람 좀 불러라”

아내는 같은 棟(동) 옆줄에 사는 상무관에게 좇아가서 문이 열릴 때까지 초인종을 눌렀다.

파자마 바람의 상무관은 아내에게 이끌리어 1층까지 내려와서 그대로 운전대를 잡고 나와 아내를 싣고 병원을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인애의원(仁愛의원)으로 갔다.

차가 병원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문을 열고 뛰쳐나가 응급실로 달려갔다. 빨리 의사를 불러 오라고 외쳤다. 그리고 수술 준비를 하라고 다그쳤다. 간호원이 와서 ‘병실이 있어야 입원 수속을 하고 수술을 할 수 있는데 병실이 없어서 다른 병원으로 가 보세요’라고 하며 공군병원이 좋다고 추천까지 해 주었다. 우리 대표부의 무관(공군)이 공군병원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하고 수술이 가능한지 타진하였다. 그러나 그쪽에서도 병실이 없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 순간 절대로 다른 병원으로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두 달 전에 駐 타이베이대표부에서 같이 근무하던 직원의 부인이 똑같은 상황에서 시간만 지체하면서 다른 병원으로 가서 입원치료 받다가 사망한 일이 있기 때문에 순간 여기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판단하고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다. 상무관과 아내가 대표부의 다른 직원들과 대사님께 전화를 드려 모두 병원으로 나오게 하였다. 새벽 4시경 모두들 나오자 그제서야 병원 측에서는 특실이 하나 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했다. 우리는 병원비가 얼마가 들든지

상관없이 빨리 수술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재촉하였다. 그제서야 간호사는 나를 한 쪽 침대에 뉘어 놓고 붕대를 감아 지혈을 시키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내 손으로 지혈하고 있었다)

(중략)

2주 만에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한 두 시간이면 끝날 것이라는 의사의 예상과 달리 6시간 이상 소요 되었다(목 뿐만 아니라 양 손도 꿰매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의사의 설명에 의하면 ‘상처는 깊이 2cm, 길이 7cm로 중상이었지만 기적적으로 목동맥을 건드리지 않아 생명을 건질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대도 다치지 않아 다행히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이죠.

2004년 9월 한국-대만은 민간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12년 만에 한국 항공사는 대만 영공을 다시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교관계가 다시 맺어지면서 하늘의 제1자유도 다시 이어졌다.

※ 본 외교관은 당시 주 타이베이 대표부 영사課長 이수존(서기관-37세))이며, 그해 여름에 중국대사관으로 근무지를 이동하였고 2018년까지 칭다오 총영사관 총영사로 재직하다 퇴임했다.                                                         <제주항공정책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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