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인 양치복씨 자서전“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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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인 양치복씨 자서전“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
  • 김동훈 기자
  • 승인 2021.08.31 15: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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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 입도의 꿈을 걸고 외길 60년을 달려온 입지전적 삶
어릴적 ‘맴쇠’들여 소키운게 오늘날 대목장주가 된 단초
감귤밭 2000평 팔아, 목장 38필지 7만여평의 목장 일궈
양치복 자서전 "나는 오늘오 축산왕을 꿈꾼다" 표지
양치복 자서전 "나는 오늘오 축산왕을 꿈꾼다" 표지
축산인 양치복씨
축산인 양치복씨

축산인 양치복씨가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는 자서전이 나왔다.

양치복씨는 4·3사건과 6·25 등 엄혹한 시련과 가난을 극복하면서 오직 축산 입도의 꿈을 걸고 외길 60년을 달여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너무 어려워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어엿한 축산인으로 성장 지금도 축산왕을 꿈꾸며 살고 있다.

조천읍 와흘리가 고향인 양치복씨(76)가 아버지도 일찍 여의고 유년시절 끼니걱정을 하며 가난과 함께 살아온 아픈 시절, 14살에는 자기보다 큰 밭쟁기로 밭을 일구며 가축과 연을 맺어 성년이 되어서는 제주축산업 발전을 이끌어온 축산인으로 변모했다.

당시 소 한 마리면 좋은 밭 한 필지를 사다가도 남을 때였다. 그가 축산업과 연을 맺게된 사연이 있다. 신촌 채 선생네가 소를 잃어버렸는데 소를 찾아주면 ‘맴쇠’를 준다는 소문을 듣고 와흘리를 중심으로 20여km를 돌아다니며 20여일 만에 까끄리오름 기슭에서 소를 찾아주고 ‘맴쇠’를 들인게 오늘날 축산왕 양치복을 만든 단초가 됐다고 한다.

당시는 맴쇠를 놓은 집에서 밭갈이를 요청하면 들어줘야 하는데, 14살 나이에 자신의 키보다 더 큰 밭쟁기를 이기며 채선생 댁 밭갈이를 할 정도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아왔다.

그가 맴쇠를 기르면서 24시간 신경쓰다 보니 새벽에 깨는 버릇이 생겨 60년이 지난 지금도 새벅 3시면 일어나는 고약한 습관이 돼 버렸다. 봄에 방목하고 나서는 마음이 안놓여 새벽에 눈을 뜨면 목장에 달려가 소와 말없는 대화로 의사소통을 했다 한다.

그러면서 청년이 되어갈수록 양축농가의 꿈이 영글면서소도 20여마리로 늘고, 암소가 새끼를 낳으면서 다시 곧 40여마리로 늘어날 것에 대비해 새로운 축사마련은 물론, 소를 건강하게 키우는 기술을 터득하며 축산인으로서의 자신감이 확실하게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1960년대 후반 제주도에 감귤 과수원이 한창 생겨나고 주요 농가소득원으로 등장할 무렵 신촌으로 내려가는 ‘고빗길 홀못’ 지경의 3필지 1900평을 사들여 감귤원을 조성하고 한 해에 8000관을 수확했었는데 소 한 마리 판매값에 비하면 턱없이 작아서 소 한 마리 키우는게 3~4배의 이득이 생길 것 같았다. 때문에 과수원을 평당 6000원씩에 처분해서 그 돈으로 와흘리 기시내 오름 남쪽 곶자왈 1200평을 사들였고, 남은 돈으로 주변 땅을 연달아 매수하여 한 해동안에 8필지를 매입했고, 몇 년후에는 이 일대 땅 20여필지가 한 필지로 합병했다. 그래서 2010년 모두 38필지 곶자왈 7만여평의 목장을 일구게 됐다.

20년쯤 걸린 대 역사였다.

돌멩이를 파내고 경계 철망과 초지조성 등 온 가족이 힘모아 손바닥에 피명이 들도록 일했다. 소 20여마리와 말 10여마리를 입식해 목장 이름도 ‘선양목장’이라 명명했다.

둥근 탑돌이 형태의 러닝머신 시설을 비롯해 840여평의 마굿간을 새로 짓고 말 수영장도 갖춰 도내 최대의 말목장으로 만들었다.

더러브레 등 미국산, 호주산, 일본산, 제주잡종 한라마 등 124필의 말을 키우고 있다. 말을 파고 사는 일이 계속되다 보니 어떤 때는 150여 필, 적을때는 100여필 정도를 넘나들며 키우고 있다.

양치복씨는 축산업을 이루고 경영하면서 제주의 미래는 축산업 성공 여부에 달려있다는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축산업의 가축은 절대 한우라고 말한다. 그의 한우육성에 대한 열정은 자서전 “제4편 제주의 미래 축산업 성공 여부에 달렸다”부분에 상세히 나왔다.

1957년 후반부터 외국소가 도입됐고 주로 샤롤레, 헨리포드, 브라마 등 3품종이 들여왔다고 소개하고 외래종은 브루셀라나 구제역 등의 질병에는 강하나 겨울동안 사료와 축사 등의 비용이 크게 부담이 된다고 했다. 이당시 제동목장 등 일부 선도 양축농가에서는 육지부에서 한우를 들여와 톡톡히 재미보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한우사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해 한우수가 급증했고, 1987면 2만7000여마리 소 가운데 한우가 1만2500마리나 됐다. 2002년에는 1만여 마리 소가운데 4500마리가 한우여서, 비로소 한우 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개량번식과 고급육 생산, 소비진작을 위한 마케팅 전략 등이 절대 필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7년 통계로 보면 축산농가가 2/3로 줄어들고 계속가면 한우의 미래가 없게 됐다.

그러나 축산당국, 농협, 전문교수, 축산관계 단체등이 수입소만 장려할뿐 한우 대책은 없었다.

이즈음 양치복씨는 당시 북제주군과 제주도 등 당국자들과 만나 한우지원책을 말했고, 이후 당국이 한우농가에 관심을 가져주면서 제주축산시험방에서도 한우 연구 프로젝트를 발진하고 한우농가를 도우는 선순환의 고리로 전환됐다.

2001년 3월, 한갑수 농림부장관이 초도순치차 제주를 방문한때다. 제주시 갑구 장정언 국회의원을 비롯해 제주도 축산관계관이 함깨한 자리에서, 양치복씨는 전국한우협회 제주도지회장 자격으로 발의하게 됐다. 그때 3가지를 발언했다. “▲제주가 청정지역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각 읍면별로 한우 송아지 생산기지를 만들고 ▲외국산 소와 한우 교잡우나 외국산 소는 제주 풍토에 적응이 되지만 겨울 나기에 어려운 문제가 있고, 쇠고기 수입 개방시 한우가 가격경쟁에서 밀리므로 한우농가 보호를 위해 국가가 막아줄 것 ▲제주의 청정지역에서 한우가 생산하는 송아지는 최고의 육질을 보장하므로 이런 이미지를 홍보하면 제주는 세계적인 한우 송아지 생산기지로 명성을 얻을 것이므로 장관이 적극 도와달라”는 요지다.

이에대해 한갑수 장관은 ‘청정지역 제주서 집중 생산되는 송아지 생산기지의 이미지가 부각되면 반드시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서 사업 성공을 위해 1000억원 지원을 그 자리에서 약속했었다.

양치복은 장관의 엄청난 지원을 잔뜩 기대하고 몇 년을 기다렸으나 이후 어떤 소식도 못들엇다 했다. “그 약속했던 지원금 어찌됐나요?”다. 양치복씨는 “도지사도 모르고, 국장도 모르는데 제가 어찌 알수 있나요, 생각건대 빽 좋은 어느 도지사나 수단 좋은 어느 도의 축산국장이 천억 짜리 돈뭉치 움켜쥐고 ‘쌈박질’하면서 갈기갈기 찢어 가져갔겠지요.”라며 회고했다.

양치복씨는 이후 2003년 8월 하순 한우협회제주도지회장 당시 장정언 의원께 송아지 생산기지 지원금을 여쭈었더니 “아쉬워이, 정말 아쉬워이”하는 말만 하니 더 이상 제가 무슨 말을 하겠냐고 했다.

2003년 한우협회제주도지회가 주관하는 ‘제주한우산업 활성화 토론회와 시식회’가 있었는데 한우산업 발전을 위해 맛의 차별화, 식품 안전성 강화, 우덕송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특히 한우개량과 육질 고급화, 흑한우 브랜드 상품 특화 등 오늘날 한우산업 성공과제에 대한 핵심어들이 이때 나왔다.

송아지 키우던 염려의 마음으로 습관화된 새벽 기침 탓에 지금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하루를 준비하고 맞는다. 어려운 유년시절 초등학교 기성회비를 못내 학교를 다녔다 그만뒀다 하며 남들보다 몇 년 뒤늦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이게 양치복의 정규 교육과정의 전부다. 그러나 못 배운 사람이 자신에 한해야 한다며 열심히 사회봉사활동에 참여, 석탑산업훈장과 국민훈장동백장 등 두 개의 훈장을 받았고, 표창과 상훈만 140여개에 달할 만큼 활발한 사회활동을 폈다. 이후 지천명의 나이에 제주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에서 축산전공으로 사각모를 쓰는 만학의 기쁨을 누렸다.

양치복씨는 선친의 사망시 장례를 도와준 강두식 마을이장과 마을분들의 고마움일 기록에 남겼다. 자신이 독자여서 군입대를 안해도 될 상황이었는데 이런 법제를 몰라 입영한 자신을 의가사 제대하도록 뒤를 밟아준 강두식 이장에 대한 은혜로움을 잊지 않고 있다.

부인 강순자여사와 큰아들 병선, 둘째아들 우선이 이야기 등 가족사도 남기고 있다.

경신인쇄사, 2021.7.30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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