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3)제2편 평생의 반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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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3)제2편 평생의 반려를 만나다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10.26 0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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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도 보고 뽕도 따고
양치복 회장
양치복 회장

제가 스무살이 넘어서 수중에 제법 돈도 생기고 살만큼 되자 우리 마을 밖의 양축 현장이 가보고 싶기도 하고 그들의 경영방법에서 무엇을 얻을 욕심도 있고 해서 자주 이웃 동네 다른 읍면 지역을 수도 없이 드나들게 되었고 겸사해서 외지에서 가축을 사러온 사람들도 자주 만나 거래를 하다보니 소위 ‘소장수’ 사업도 조금 본격적으로 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물건만 좋으면 이익금은 두 갑절 세 갑절로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이것이 거듭되면서 제가 제주에서 몇 번째 안가는 소장수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또 내가 키운 소들의 상품 가치가 타의추종을 불허하기도 했지만 신용제일주의로 그리고 ‘박리다매’로 ‘이익은 적게 판매는 많이’ 하는 상술을 나의 특허 간판으로 내세워 전국 소장수들과 정보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육지에서 온 소장수들은 주로 제주시 동문로타리에 있는 다방을 중심으로 모여들어 정보를 나누기도 하고 제주에서 거래를 잘하는 소위 신용이 있는 거래상을 만나 상품에 대한 값을 저울질하거나 시골지역 현장으로 나가 최종 거래를 확정하는데 문제는 어느 소장수가 믿을만한 것인지가 매매 성사의 중요 관건이 되었지요.

나는 소장수 측에 끼기는 했지만 대개 소장수로 이력이 붙은 사람은 나보다 최소 10살, 20살 연상의 노련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신출내기인 나는 이들을 제껴 거래를 트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육지 소장수들과 단골 거래망을 트는 길은 내가 중간 이익을 최소화하고 매매 상품의 질을 정확히 상대에게 알려서 ‘믿음’을 상대에게서 받아내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이 상대방에게 전달되어 그들이 나를 신임하기까지는 2~3년이 훨씬 더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제주도내 여러 지역의 소장수 100여 명 가운데서도 차츰 저의 매매 실적이 도드라지게 높아지자 ‘청년 소장수 양치복’의 이름이 이들 육지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매매 실적도 다른 중계인들보다 훨씬 높아지게 되고 그에 따른 사업 실적도 타의추종을 불허하게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나의 축산사업에 대한 안목과 지식도 넓어져서 제주축산 현황과 미래를 어떻게 해야 성공적으로 이끌어나갈 것인지 걱정하게 되는 만큼 제주축산 관계 담당자들과 만나는 기회가 생기면 양축 사업에서 당국이 지원해 줄 사안을 서슴없이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조천읍 와흘리 중산간 지역에 살다보니까 말․소 구매를 원하는 분을 우리 집까지 모셔오려면 교통상 상당한 불편이 뒤따라서 어떻게든 우리 마을과 제주시 또는 와흘과 다른 지역으로 연결되는 자동차 도로교통망을 훤히 트게 하고 싶지만 그런 도로망 개설은 국가나 제주도가 만들어주지 않는한 도저히 이룰 수가 없어서 고민하던 끝에 저는 결국 아무 곳이나 드나들 때 불편함이 없이 타고 다닐 수 있는 ‘말’을 이용하기로 하고 튼튼하고 잘달리는 말을 구해서 타고 다니다 보니 저의 교통 불편은 다소간 해결되었습니다.

남제주군이나 대정 또는 제주시 화북이나 애월에 계신 소장수는 이미 이런 교통 불편을 ‘말’을 구입해서 해결하고 있었는데 저도 몇 번 말을 사서 시골길을 달리며 도내 곳곳을 누비다보니 자동차만큼은 못하지만 산간 오지 중산간 지방을 쉽게 드나들 수 있었고 의외로 좋은 소나 말을 싸게 사서 팔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타고 중산간을 바람처럼 누비고 다니는 사람 가운데는 제주시내 화북동에 사는 황창유씨라는 분이 계셨는데 이 분이 타는 말은 그야말로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처럼 피곤을 모르고 제주 도내 중산간 곳곳을 누비고 다녀 보통 말을 타고다니는 사람들은 그가 타는 말을 몹시 부러워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얼마없어 중산간 길에도 트럭이 자주 다니게 되자 저도 헌 트럭을 사서 이것으로 소나 말을 싣고 다니며 팔고 사고 했는데 이 트럭은 10년 동안 나에게 큰 돈을 벌게 해주었지만 그 때까지도 나는 운전면허도 없이 몰고 다니다가 어떤 때는 경찰관에게 들켰는데 재수없이 술까지 먹고 운전하다가 걸려서 혼쭐이 났지만 그럭저럭 넘어갔으니 10년 무면허에 무사고라니 이건 분명 하늘이 날 도와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전투적이라고 할지 아니면 적극적이라고 할만큼 투지가 강한 성격인 것 같습니다. 솔직히 지고는 못사는 성질머리가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내가 타는 말이 남이 타는 말보다 조금이라도 쳐지면 무조건 더 좋은 말을 구입해서 타다가 다른 사람이 내 말을 탐내면 무조건 팔아치우고 이윤을 남겼습니다.

제가 스물세 살 되던 해 봄 저는 성산수산리 중산간 마을에 좋은 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말을 구경갔습니다. 듣던대로 그 말은 예삿말이 아니였어요. 사람도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이 있듯이 말도 마찬가지지요. 성질은 어떤지 체형은 어떤지 눈매나 다리 근육은 어떤지 이것저것을 따져 봤는데 아무리 보아도 요놈의 유마는 보통을 벗은 놈이었지요.

값을 물었더니 제주토종말(조랑말) 세 마리를 합친 값보다 비싸게 부르는데 그래도 팔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기가 나서 10여 차례 흥정을 벌인 끝에 승낙을 받고 말고삐를 잡았더니 주인 왈 ‘말이 타는 사람을 가리니 조심히 다룹서’ 하는거에요. 까닭을 물으니 어지간한 사람은 타기가 무섭게 내던져버리니 조심하라는 것이었지요. 저도 말깨나 조금은 다루는 편이고 완력이나 승마기술도 보통은 벗은 사람이니 걱정말라면서 값을 제대로 치르고 어떻든 저의 목장으로 타고 왔습니다.

물론 이 놈의 말이 나의 실력을 테스트나 하려는 듯 용을 쓰고 몸부림치지만 나도 나만큼 하니까 어디 버티어보라는 듯 말을 달래고 누르고 하면서 두세 시간 길을 들여서 목장에 끌어다놓고 본격적인 승마 훈련을 시킨 결과 말은 이제 완전히 저를 받아들여서 다른 사람에게는 까탈스럽지만 나에겐 꼼짝없이 자가용 구실을 잘해주었습니다.

그러나 말도 영물인지라 주인 아니면 어설픈 놈은 아예 등에 타기가 무섭게 냅다 꼰질리버린다는 속설이 있지요. 내가 돈 10만원(조랑말 값의 3배)을 주고 겨우 그 말을 손에 넣고 주인이 되었는데 말을 좀 볼줄 아는 사람이 하도 그 말을 팔라고 하기에 15만원을 받고 팔았으나 그 말을 산 사람은 그 말을 타지 못해 나에게 다시 5만원을 손해 보고 10만원에 되팔았고 또 한 사람 역시 같은 사연으로 샀다가 도로 나에게 돌아오기를 네 번이나 하는 바람에 나는 같은 말을 4번 팔고 되사면서 20만원을 챙겼다는 좀 쑥쓰러운 고백을 여기에 적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장에서 말씀드릴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성산면 수산리에 가서 어렵게 말을 사려고 할 때에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당시 그 유마를 소개해 준 분은 그 마을에서 점포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집안 마당을 지나는 예쁜 각시가 얼핏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도 나만큼은 눈썰미가 있는 놈이라 저 아낙과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눈에 확 들어와 그녀의 오빠 되는 가게 주인에게 말보다도 그 색시를 잘 연결시켜 달라고 조르니까 주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고개를 모로 돌리고 아예 대답도 안해주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수산에서 약방을 하는 4촌벌 되는 형님에게 중매를 부탁해서 혼담을 터놓았지만 될듯 말듯 저는 속이 탔습니다. 당시에는 그 마을에 식당도 없어서 저는 건빵을 사서 끼니를 때우기도 하고 약방을 하는 친척 집 방구석에서 잠을 자면서 이 아가씨를 기어이 내 각시로 삼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러 차례 이 가게를 드나든 결과 결국은 혼사가 이루어져서 와흘 우리집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미친 놈이지만 이 처녀는 또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언뜻 한번 본 나를 꼭 아내로 삼고싶다고 대드는 이 목안(제주목안→제주성안→제주시)에서 온 남자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수산 촌에 사는 22살의 과년한 처녀가 제주시내 남자(비록 와흘리도 지금 보면 촌이었지만)와 결혼하면 시골 구석에 박혀 살지는 않을거라는 그런 계산이 있어서 혹 우리 결혼이 성사된 배경은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 10번 넘게 수산리까지 그 먼길(35km)을 조랑말 타고 드나드는 청년 양치복의 진실하고 성실함이 마음에 감동을 받아 그 처녀는 결국 혼담을 승낙한 것은 아닐까요.

지금까지 52년 넘게 2남1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왔지만 어떻게 나와 결혼을 승낙했는지를 낮두꺼운 나도 부끄러워서 차마 물어보지를 못하고 이 날까지 왔지만 우리 둘은 행복한 생애를 살아왔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건강하게 살아온 것은 신의 축복이 우리 가정에 내려왔음이 아닌가요. 조상님, 하느님, 부처님 정말 참말 고맙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생애도 남에게 욕 안듣고 이웃에게 칭찬받는 좋은 가정 이루어 갈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결국 좋은 말을 사려고 수산리에 드나들다가 나는 아내도 얻었고 타는 준마도 사서 돈도 벌었으니 하느님은 언제나 내편인 것을 나는 굳게 믿으며 앞으로도 올바르게 전진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참 아내 자랑만 하다보니 소장수하면서 재미를 보았던 몇 건의 큼직한 거래가 있었던 사실 하나쯤은 소개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소장수일지라도 흑심을 먹는 얌채족과는 180도 성격이 다른 별종이었지요. 외부에서 온 소장수들은 동문로타리나 칠성로, 산지로 다방 일대를 중심으로 진을 치고 살지만 저는 전술한 바 그들 고참내기와는 10살, 2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애송이 소장수였거든요.

그래서 ‘거래’하는 기술은 값을 깎고 올리고 후려치는 기술이 아무래도 그들 선배 소장수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서 큰 이득을 볼 것을 저는 아예 포기하고 ‘밥술’이나 뜨는 정도라면 소장수일도 할만하다고 여겨서 육지에서 온 소장수들과 조금씩 거래를 트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제가 서투른 소장수인 것이 이들 육지 상인들이 좋게 보아서 아주 갑자기 제가 인기가 높아지기 시작했지요. 우선 저는 ‘에누리’나 말바꾸기나 값을 깎고 올리고 하는 일 없이 아주 간단하게 ‘거래 용건이나 조건’을 걸어놓고 장사 상담을 한 것이 육지 상인들에게 믿음을 준 것 같아요. 그래서 두세 명씩 혹은 7·8명씩 저에게 아주 전대(돈가방)을 맡겨놓고 열보름씩 그들 나름의 우마 시장 조사를 하러다니고 어떤 때는 나에게 ‘우마 매도 권리’를 맡겨놓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나는 우선 맡아둔 돈을 틀림없이 잘 관리해서 땡전 한 푼 떼어먹지 않고 돌려주거나 적당한 금액으로 소를 사주다보니 제가 몇천 만원, 몇억 원을 가진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런 돈은 사실 육지 소장수들이 은행같은 곳에 돈을 맡겨놓지 않고 저에게 맡긴 돈이 엄청난 목돈이었거든요. 그만큼 제가 그들에게는 믿을만한 ‘신용있는 젊은 소장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한번은 제동목장에서 큰 소경매 판이 벌어졌지요. 그 규모가 총 138마리가 되는 외국산 소(싸르레)였는데 그걸 한꺼번에 경매로 내놓은 것이죠. 이건 경매판이 너무 커서 돈 몇백 몇천 만원 가지고는 응찰할 수가 없지요. 물론 제동목장(당시 목장장은 김영호씨)은 경매를 하면서도 한 2~30두 정도로 응찰할 것으로 예측했던 것 같아요.

나는 한꺼번에 138마리 전부(송아지 포함)를 응찰했는데 아무도 내가 응찰할 것으로는 예측하지 못했던 것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당시 경매장에 왔던 육지 소장수나 제주 소장수 등 200여 명이 내 통큰 응찰에 혀를 내두르면서 놀라 자빠졌지요.

김영호 목장장도 138마리 외국소를 정말 통째로 다살 것인지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나는 낙찰됐으니 문서나 작성하자고 대꾸했더니 그래도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는 눈치였어요. 어떻든 그 경매장에 나온 소는 모두 수속이 끝나는 순간 내가 주인이 된 것이고 그 후 그 소는 내게 돈을 맡겨두었던 육지 소장수들이 맡긴 돈 액수에 따라 7마리, 12마리 혹은 여섯 마리 등 커다란 떡 나누어먹듯 두어달 만에 모두 육지로 팔려서 반출이 되었지요. 이 때부터 내부 사정도 모르는 제주 소장수나 육지 소장수들은 양치복이 배짱 하나는 아무도 따를 수 없다고 혀를 내두르며 칭찬 반 질투 반 하면서 제주 최고 소장수란 낙인이 확실히 찍혀지게 된 것이지요.

거래가 컸던 것 만큼 떡고물도 만만치가 않겠지요. 그런데 이런 좋은 결과는 외부 소장수들이 나를 절대 신임해주었기 때문에 큰 돈을 내게 무조건 맡겼던 것이고 나는 또 나대로 그들이 나를 믿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10원 한 장 의심없이 명확히 거래를 해주었기 때문에 ‘제주 쇠장시 양치복이란 놈’이라는 애칭이 따라붙게 된 것이지요.

누가 말했지요. ‘정직은 최고의 무기라고’ 특히 사업가에게서는 ‘정직’과 ‘신용’이 최고의 자산이라고 믿고 저는 지금도 그런 거래를 하면서 아무 일이라도 이런 신조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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