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복 :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4)와흘굴에 꿈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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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복 :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4)와흘굴에 꿈을 걸고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11.22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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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흘에 꿈을걸고
양치복 회장
양치복 회장

조천읍 와흘리 내고향! 그렇게 잘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동네 사람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눈뜨면 밭에 가고 밤이 되면 가족끼리 모여 오순도순 살아가는 평화로운 마을. 70여년 전 그 몸서리 처지는 4․3사건의 핏내음은 이제 이 마을에서 씻은듯이 사라져갑니다.

저도 키우는 소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벌써 20여 필을 키우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어엿한 가장이 되었습니다.

하루에 한번 영낙없이 소에 물을 먹이는 일상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동네 너븐못에 소물을 먹이러 가다가 문득 전에 들어가보았던 근처의 와흘굴 속을 한번 더 구경하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해방 전에는 왜놈들이 우리 마을에 와서 주둔도 하고 그놈들은 이곳 와흘굴 속에 몇십 명씩 들어가 미군이 오면 쏘아죽이겠다고 굴 속을 다듬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 굴 속에 들어갔더니 굴 안에는 박쥐떼가 푸드덕거리기도 하고 넓은 마당도 있고 또 천정에서 소 발자국 소리와 마차가 지나가는 소리도 들려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너분못이 바로 이 동굴 천정에 바짝 붙어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참 신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신촌이나 조천학교 학생들이 우리 동네까지 와서 와흘굴 속을 견학하고 돌아가는 것을 여러번 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순간 저는 「아차! 이 동굴은 예삿 동굴이 아니라 신기한 동굴이기 때문에 훗날 크게 뭔가 활용하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서 이 동굴을 사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얼른 제주 시내에 사는 밭 주인을 찾아가 동굴밭 980평을 사들였고 5년 후에는 그 밭 북쪽에 붙은 밭 일천평 그리고 3년 후에는 다시 그 아랫밭 300평 등 모두 3필지 2,300평을 사들였습니다.

그 밭을 산 후 동굴을 수십 차례 드나들다보니 이 동굴은 예삿 동굴과는 아주 다른 굴이었습니다. 우선 굴이 드나들기가 좋고 굴 내부가 드넓고 바닥이 평평하게 잘 다듬어져 있고 인공으로 천정 부분을 깎아내서 높직하게 다듬어지기도 하고 동굴 속에는 열아름이 넘는 용주가 버틴 것 등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이 아니겠어요.

주민 살린 명당 와흘굴

철망으로 둘러싸 보호되고 있는 와흘동굴 입구
철망으로 둘러싸 보호되고 있는 와흘동굴 입구
임완송 어르신
임완송 어르신

그리고 이 와흘굴은 4․3사건때 동네사람 100여 명이 숨어서 목숨을 구했던 일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잘 아는 한 동네에 사는 올해 90살이 되는 임완송 어른을 찾아뵙고 이 동굴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어서 이 동굴을 더욱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 날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임완송 어른(와흘리 하동 1231번지)은 4․3사건 당시 열네 살 소년이었는데 이 분 말씀에 따르면 해방 전에는 일본군 1개

소대가 이 동굴을 개조해서 미군과 싸울 준비를 하던 곳이고 굴 입구도 널찍하게 넓혀서 드나들기 편하게 만들었고 또 굴 반대쪽에 탈출구도 새로 만들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3사건 때도 와흘리는 해안과 한라산의 중간에 위치해 있어서 산사람들이 우리 마을을 지나 조천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다시 우리 마을을 통과해서 산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뒤쫓아온 경찰대는 우리 마을을 사정없이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것입니다.

다급했던 때라 와흘리 하동 100가구 주민은 마을에 있는 와흘굴로 일시 대피했고 나머지 상동 동네 사람들도 바농오름 벌판으로 도망쳐 살기는 했는데 순경이 되돌아간 다음날 동굴에서 나와보니 마을 전체가 모두 불타버려서 가재도구 한 점 건지지도 못하고 모두 신촌․조천․함덕 일대 해안가로 알몸으로 피난해서 몇년간을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며 지냈다는 것입니다.

마을이 불타던 날 섯동네 박봉일씨 아버지는 아파서 병석에 누워있었는데 집이 불타면서 그 속에서 누운채 죽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 후 해안가로 피난간 사람들에게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을 듣고 이 곳으로 피난갔던 와흘 사람 100여 명이 자수했지만 이들은 모두 폭도와 협조 또는 폭도 활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지금의 아라동 제주여고 한우마트 근처 박성내 하천으로 끌고가서 집단 학살하는 비극도 벌어졌다고 합니다.

와흘굴 동국 내부. 동굴전문가들이 탐사를 하고 있다.
와흘굴 동국 내부. 동굴전문가들이 탐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폭도대장 신촌 출신 이덕구가 4․3사건 이듬해 6월 사살된 후 와흘리장을 맡고 있던 22살 청년 김의봉이 폭도 혐의로 조천지서에 끌려가 죽도록 매를 맞고 간신히 풀려났는데 그는 상처가 회복되자 경찰에 복수를 결심하고 이덕구의 뒤를 이어 3대 폭도대장직을 맡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천에 사는 김○택씨가 경찰의 사주를 받고 김의봉을 와흘리 광채기밭 구석에 있는 작은 동굴로 유인해서 도시락을 먹으면서 설득하려는데 김의봉은 경찰에게 속은 것을 알고 튀어 도망갔으나 대기하던 경찰의 총에 허리 부근을 맞고 1.5km쯤까지 달아났지만 와흘 상동 서쪽 대물에서 다시 총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4.3희생자비.
4.3사건 희생자 위령비

어떻든 70년 세월이 흘러 그 공포와 가난과 살육전으로 폐허가 된 4․3사건의 현장도 차츰 회복되어 평화가 오고 지금은 먹을 것 입을 것 걱정없이 궁궐 살림처럼 살게 된 시대를 맞이한 것은 꿈같고 기쁘고 행복한 시대가 되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 분은 기뻐하였습니다.

이런 고난과 희생을 겪은 와흘리민은 지난 2006년에 마을 복판에 4․3희생자를 위령하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대리석에 정성껏 새겨진 희생자의 숫자가 200명 가까이 되는 것을 보고 저는 또 한번 놀라고 다시는 이런 이념전쟁이 없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해보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동굴의 가치가 더욱 높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 동굴 이용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지난 2016년에 내 나름대로 ‘동굴관리계획서’를 꾸미고 제주도에 신청했는데 도청에서는 동굴연구소장 손인석씨와 한국자치경제원장 김학모씨 등 6명을 파견하여 우리 밭 동굴 속을 후벼파면서 무슨 조사를 하다가 돌아갔는데 얼마 후 우리 동굴이 보호해야 할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서 일반인들이 멋대로 드나들지 못하게 철망을 휘감아놓고 출입금지 간판을 떡하니 걸어놓고 가버렸습니다.(63쪽 사진 참조)

그리고 5년이 지나도록 어느 놈 하나 동굴 소식을 알려주는 일이 없습니다. 이 동굴은 분명 내가 산 땅 안에 있으니 내 동굴인데 도청에서는 나에게 한 마디 가타부타 말이 없어요. 개인의 재산권을 이렇게 제한하는 법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이 동굴에 대한 관리권이나 문화재적 보전의 가치 유무, 소유권자가 토지 주인 행세를 못하는 이유 등을 소상히 알고 싶으나 아직까지는 선처가 있을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며 이 동굴을 조사한 손인석, 김원배 등 동굴조사팀이 어떤 건의를 했기에 나의 재산권 행사나 조사 결과에 대해 명확한 답변이 없는 것인지 이 지면을 통해 도 당국이 소명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마는 몇해 전 모 회사가 이 동굴의 내부를 둘러보더니 와흘 마을에 도움이 되는 것을 전제로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 개발’을 내세워 ① 어느 정도의 투자를 해야 수익을 만들어낼 것인가 ② 이 사업은 어떤 분들의 욕구를 고려해야 하는지 ③ 와흘 주민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도록 하는 개발 방향은 무엇인가 ④ 그리고 제주시나 제주 도민에게 도움이 되는 개발이 되려면 어떤 사업이 적당한가 ⑤ 그 사업의 규모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로 수익성을 보장하면서 사업성이 있는가 ⑥ 어떤 서비스 모델을 개발해야 관광객 유치를 지속할 수 있을까 등 여러 가지 동굴 개발 모델을 구상하면서 이미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지로 완성한 동굴 개발 사업 내용을 검토하면서 우리 와흘 동굴 개발을 구체적으로 모색한 적이 있습니다.

몇 가지 해외 사례를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그 사업 현황을 체크한 것인데 ① 현대미술섬으로 유명한 일본 니오시마섬을 중심으로 열리는 일본 카가와 현세토우치 국제예술제를 하고 있는 지중미술관 운영 사례를 검토하고 ②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메까와타마구스꾸에 있는 동굴 카페의 사례 ③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그론파 프라자’ 동굴 레스토랑 ④ 이집트 카베이즈시에 있는 동굴 교회 ⑤ 뉴멕시코에 있는 꼬꼬벨리 동굴 호텔 모델 등의 사업 내용과 성공 사례를 비교 분석하면서 이것이 양치복 회장이 소유한 2,300평 대지에 있는 와흘 동굴 내부(공간 250여 평)에서 어떤 사업 내용을 선택해야 사업성이 있는지 여부를 신중히 조사 비교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지요. 그러나 결국 이것은 제주도 당국의 관광 개발 전망과 와흘굴 활용 여부 및 동굴 자체의 문화재적 보호 가치 여부에 따른 영향을 비교 분석해야 하는 지난한 장애물이 가로막히는 바람에 사업 프로젝트는 도중 하차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동굴 주인인 나로서는 안타까울 뿐이고 사업자의 추진 의사가 애매한 상태였기 때문에 저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못한채 동굴 개발 사업은 취소되고 말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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