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2)고 박진경 연대장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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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2)고 박진경 연대장의 생애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12.05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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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2) 고 박진경 연대장의 생애

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교육정립위원장 기고로 제11연대장 박진경대령에 대하여 재조명하고자 한다. 앞으로 5~6회에 걸쳐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연대장에 대해서 공과 사를 나열코자 한다. 박진경 연대장의 펼친 작전은 2가지로, 평가가 엇갈린다. 하나는 선무공작으로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한 단위 대장들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한 점,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무자비한 작전공격이라 평하는 점이다. 독자들이 과감하고 솔직하게 평하길 기대한다.

글싣는 순서는 ▲프롤로그에 이어 ▲박진경 연대장의 생애 △박진경 연대장 부임 남로당 프락치의 공작 △ 제11연대 진압작전 전개과정 △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 △ 제11연대장 박진경 암살의 교훈순으로 연재한다.          (편집자 주)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고 박진경 대령의 생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고 박진경 대령의 생가

박진경의 큰형 박진용의 손자 박태균씨가 남해종가집을 지킴
 박진경 대령은 1918년 12월 22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홍현리에서 아버지 박병철씨, 어머니 금녕 김씨의 5남 2녀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4월 남해군 남명

남해 종가를 지키고 있는 고 박진경 대령의 큰형 박진용씨의 손자 박태균씨.
남해 종가를 지키고 있는 고 박진경 대령의 큰형 박진용씨의 손자 박태균씨.

공립보통학교(4년제)에 입학하여 1932년 3월 23일 4년 졸업하였다. 진주국제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하였던 남명공립보통학교 동창인 강명찬은 “진경은 나보다 1살위 밖에 안되었는데도 그는 청년같고 나는 어린애 같이 키가 작았다. 그는 늘 우등생이었으면서도 나이 많은 학생이 많아 급장은 못했다. 진경은 집에서는 망태를 메고 풀을 베는 등 부지런하고 근면했었다. 성격은 온순하고 아무하고나 말을 하지 않은 성격이나 누구와도 어울렸고 원칙있게 행동하며  나는 그때 그를 어른스럽게 보았다.” 고 회상하였다.

남명초등학교 교정
남명초등학교 교정

박진경은 남해군청 소재지에 있는 남해공립보통학교(6년제)에 5학년으로 편입하여 5∼6학년과정을 배우고 1934년 3월 20일 이 학교를 졸업(21회)하였다.
박진경은 졸업식에서 1등을 하여 상품으로 큰 돼지 1마리를 탔으며 부모님은 떡을 해 갖고 가 선생님을 비롯하여 졸업생과 학부형에게 대접하였다. 상으로 받은 돼지는 박진경의 집 머슴 2명이 끌고 와 홍현리 동네 잔치를 벌였다고 전한다.
남해공립보통학교 동창인 김홍래(전 초등학교교장)는 “진경은 늘 급장을 했으며 같은 나이에서도 키가

남해읍 남해초등학교
남해읍 남해초등학교

너무 큰데다 어른스럽게 침착하고 과묵한데다 쓸데없는 농담을 하지 않았다. 진경은 국어를 잘해서 우리반에서 늘 1등을 했는데 어느 날 진경의 공책을 봤더니 글씨가 마치 인쇄한 것과 같이 또박 또박 깨끗하게 쓴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고 회상하였다.

고 박진경 대령의 진주고등보통학교 시절
고 박진경 대령의 진주고등보통학교 시절

1934년 4월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5년제)에 입학하였다. 박진경은 이 학교에 다닐 때 경남 진주읍에 사는 백부 박병한씨 집에 살았다. 박진경의 성적은 1학년 때 102명중 1등으로 급장, 2학년 때는 101명중 2등으로 급장, 3학년 때는 88명중 1등, 4학년때는 84명중 4등, 5학년 졸업 때 78명중 13등이었다. 4,5학년 때 성적이 안 좋은 것은 5학년 때 진주고보 대대장을 하였기 때문에 학업에 전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진주고보 동기동창인 정원수(전 진주공업고등학교장)씨가 증언을 하였다. 3학년 때의 신장 169.5cm 체중 58.7kg로 이로부터 15년 후인 1950년도에 일본의 학교보건통계 조사에 따르면 신장 168cm 체중 58.5kg로 당시로서 신체가 건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 박진경 대령의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적부
고 박진경 대령의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적부

특히 동창중에는 백석주(육군 대장) 등이 있다.

박진경의 진주고보 학적부을 보면 1,2학년 때는 품행방정학술우등상, 개근상, 4학년 때는 학예부위원, 5학년 때는 학부형회상을 받았고 급장이었다.
박진경은 진주고보 재학중에 영어 공부에 몰두하여 많은 이야기를 남겼는데 하루는 남명보통학교 동창인 강명찬(전 진주국제대학교이사장)이 “일본인들은 영어를 하는 것을 질색이라는데 너는 왜 영어를 그렇게까지 전념하느냐? 고 물었더니 ”앞으로 영어가 꼭 필요한 세월이 온다” 고 하며 그때는 그냥 흘려버렸는데 후일 해방이 되고 나서 그 뜻을 짐작할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다.
1940년 3월 진주공립중학교(5년제)를 11회로 졸업하고 둘째형인 박진성(모포공장 운영)씨가 있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이나 일류대학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박진경 일본 대판 외국어대학 졸업성적증명서
대학에 가려면 고등학교를 나와야 하는데 박진경은 제3고등학교를 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전쟁 중이라서 조선인은 고등학교에 잘 들어갈 수가 없었다. 1~2년 재수하면서 1942년 4월 7일 오늘의 오사카외국어대학교인 오사카 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성적이 3년 줄곧 1등을 하여 1944년 9월에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박진경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졸업증명서와 성적 증명서
박진경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졸업증명서와 성적 증명서

박진경은 학업성적증명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전공과목인 영어는 전학년을 통하여 갑이란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는 장차 영어의 필요성을 예측하고 영어를 전공한 까닭에 후일 조국의 광복을 맞으면서 미군정과의 협조관계는 물론 미군 야전교범을 번역하여 부대에 보급함으로써 건군 초기의 군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마쓰모도 공병예비사관학교 박진경 생도
마쓰모도 공병예비사관학교 박진경 생도

 

일본에서는 군대 간부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1944년 1월 20일 학도특별지원병제(학병제)을 선포하여 전문·대학생을 전쟁터로 나아가게 하였다. 박진경도 1944년 외사전문학교를 마치자 학병으로 끌려가 일본 치바현에 있는 마쓰도 공병 예비사관학교에 들어가 다음해 2월 졸업과 동시에 일본 육군소위로 임관을 하게 된다. 이때 동기생으로는 후일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지낸 최영희 장군이 있다.
전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하였던 최영희는 “62년전인 1944년 박진경과 나는 일제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일본 마쓰도공병예비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일본군의 군사훈련은 모질고 고되고 힘든 스파르타식 이상의 강한 훈련으로 9개월간의 교육 중 수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는 강행군이었다.

마쓰모도 공병예비사관학교 동창인 제12대 육군참모총장 최영희
마쓰모도 공병예비사관학교 동창인 제12대 육군참모총장 최영희

그런데 나는 이미 유도가 공인 3단이었을 만큼 신체가 튼튼하였고, 걱정하였던 박진경도 검도의 유단자이었고 특히 진주고보를 졸업할 때까지 전교생을 이끄는 대대장을 지냈기 때문에 둘은 무사히 훈련을 마치고 1945년 2월에 수료하여 견습사관이 되었다.
공병예비사관학교의 전공은 도하공병과 야전공병이 있는데 나는 도하 공병으로 말 그대로 병력을 도하시키고 교량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공병은 다른 병과와는 달리 말을 타고 지형 정찰도 해야 했기에 승마훈련은 필수였다. 학생들이 입교하면 승마경험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몇 시간 기본 교육을 한 후 경마장의 기수처럼 채찍을 가해 달리도록 하였다. 도하 훈련도 이런 식이었다. 배도 잘 모르는 내륙지방의 학생을 막론하고 철주(도하 및 도보교용 배)을 젓는 방법을 몇 시간 가르쳐 주고는 ‘원칙을 모른다’ ‘배를 저을 줄 모른다’ 고 채찍을 후려갈기면서 교육을 시켰었다.
그후 장교로 임관하여 나는 서울 용산에 있는 선무 사단 공병연대에 배치되고 박진경은 제주도 부대에 배치되었다가 6개월 후에 광복을 맞아 다들 귀향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박진경은 제주도에 배치되어 근무 중 6개월 만에 광복을 맞이하여 고향 남해로 귀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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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악전투 2021-12-05 15:49:17
1948년 5월 6일 제주주둔 제9연대 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전격 교체되었다. 통위부의 남로당 프락치가 박진경 중령이 제9연대장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즉각 남로당 중앙당에 알렸다. 5월 7일날 남로당중앙당 오르그(지도원)은 제주에 선박편으로 내려와서 남로당인민유격대 대표와 국방경비대프락치 대표간의 회담을 추진하였다. 1948년 5월 10일 제주읍 식도락식당에서 남로당 군책 김달삼, 조직책 김양근, 국방경비대 오일균대대장, 부관 나희필소위, 제9연대 정보관 이윤락 중위 등이 회합을 갖고 박진경 연대장과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기로 모의하였다.

진실 2021-12-05 15:05:27
이승학 위원장님 칼럼을 모아 영웅 박진경 대령 다큐를 제작할 날이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