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복 :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 (5)문화재적 가치 높은 와흘굴 모셔만 놓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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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복 : 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 (5)문화재적 가치 높은 와흘굴 모셔만 놓을 건가
  • 김동훈 기자
  • 승인 2022.01.05 0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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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적 가치 높은 와흘굴 모셔만 놓을 건가
양치복 회장
양치복 회장

그런데 문제의 와흘굴은 지난 2007년 3월 8일자 한라일보의 특집으로 엮은 ‘고난의 역사현장, 일제 전적지를 가다’의 현지 르뽀로 크게 보도된 바 있기에 그 당시 신문 내용을 여기에 전면 게재해서 독자의 이해를 돕기로 합니다.


‘고난의 역사현장’일제 전적지를 가다<58>
제2부 : 베일 벗는 日本軍 실체-45

- 일제군사시설과 4․3 ④ 와흘굴
태평양전쟁 말기에 제주에 주둔했던 일본군은 천연동굴마저 내부를 개조해서 유사시 진지로 활용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제주시 조천읍의 와흘굴이다. 와흘굴은 동굴내부가 넓을 뿐 아니라 길이도 1.6km에 이르는 대형동굴이다. 동굴 내부에는 거대한 용암기둥을 비롯 생성물들이 잘 남아있어 가치가 크다. 하지만 와흘굴은 일본군이 주둔을 위해 내부를 훼손하는 바람에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일본의 패전 후 해방공간에 불어닥친 ‘4·3’ 당시 와흘굴은 이 일대 주민들에게는 생명의 안식처였다.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는 생명의 위협 앞에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와흘굴을 피신처로 활용, 생명을 부지해야 했다.
와흘굴은 원래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입구가 작았다. 그런데 일본군이 동굴내부에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입구를 넓혀놓은 것이다. 일본군은 또 굴 내부에 비상출구를 만들기 위해 또다른 입구를 만든다. 그 흔적은 굴 입구를 따라 들어가면 왼쪽으로 형성된 가지굴 끝부분에서 볼 수 있다.
이 마을 주민 임완송씨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군은 굴 입구를 만들기 위해 세 번에 걸쳐 뚫는 시도를 한다. 두 번째 까지는 실패하고 결국 세 번째 시도만에 입구를 뚫는데 성공했다. 일본군이 뚫은 굴 입구는 그 후 메워졌으나 바닥에는 깨진 돌덩이들을 볼 수 있다.
일본군은 또 다이너마이트 등을 동원해서 동굴천장과 벽면을 넓혔다. 서쪽으로 형성된 굴은 광장처럼 넓고 천장 또한 매우 높지만 바닥에는 떨어져나간 바윗덩어리들이 쌓여있다. 일제의 전쟁 야욕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천연동굴마저 훼손시켜 놓은 것이다.
와흘굴은 언제부터 일본군에 의해 훼손됐을까. 와흘리에 일본군이 주둔한 것은 1945년 봄 무렵이다. 처음에는 선발대 격으로 1개 분대 정도 병력이 주둔하고, 이어 1개 중대 병력이 마을 공회당 공터에 함바 형태로 초가를 짓고 숙영을 한다. 중대장은 마에다(前田)중위로 알려졌다.
그때부터 일본군은 2백~3백여 미터 떨어진 와흘굴에 드나들며 굴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유사시에 병력의 피신처이자 저항진지로 활용하기 위해서 굴 입구를 넓히고 주변에는 초가집과 모조전차를 만들어 위장했다.

주민정서에 순화에 기여하는너분못
주민정서에 순화에 기여하는너분못

와흘굴 일대에 주둔한 일본군은 어떤 부대일까. 태평양전쟁 당시 제주시 일대에는 일본군 제96사단이 주둔한다. 병력이 9천여 명에 이르는 96사단은 제주시 산천단 일대에 사령부를 둔다. 그 예하부대인 보병 293연대는 제주시 명도암 일대에, 대대 병력은 그 인근인 봉개 일대에 주둔했다. 진드르비행장과 가까운 와흘에 주둔한 일본군은 293연대 예하의 대대에서 파견나온 부대로 파악된다.
와흘굴은 제주 주둔 일본군이 구축한 진지 가운데 천연동굴을 이용한 흔치않은 사례에 해당한다. 제주도 용암동굴의 수는 1백50여 개를 상회한다. 하지만 와흘굴처럼 일제에 의해 진지로 활용된 경우는 드물다. 오름이나 해안가에 구축된 대부분의 갱도진지와는 다른 유형인 것이다.
자연동굴을 최후의 저항진지로 활용한 경우는 오키나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가 된다. 와흘굴은 ‘제주4·3’ 당시에는 지역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어지는 등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와흘굴 그 자체가 고난과 비극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표성준․이승철 기자


                                             와흘리 설촌 유래

그러면 이렇게 소문난 동굴이 있는 이 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제주시 삼양동 거주 김영자씨의 주장에 따르면 당신의 입도 선조 김민희씨가 고려 말 충정왕때 등과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올랐는데 마침 이성계가 공양왕을 몰아내고 1392년 조선왕조를 개설하자 김공 등 많은 고려 충신들이 이성계의 개국에 반대하자 참수형 또는 유배에 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공은 마침 탐라로 유배되어 일족이 애월 곽지와 구좌 김녕 등지에 흩어져 삼백여 년을 사는 동안 입도조 9대손이 와흘 지경에 이르러 목축의 적지로 수량이 풍부하여 이 곳에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와흘리 복지회관
와흘리 복지회관

마을 이름은 당초 한거리로 불리기도 했는데 입도조 14대손인 김일용이 속칭 ‘불칸터’라 불리우는 곳에 옮겨 살았으나 큰 불이 나서 폐촌이 되자 이 곳 넓은못(너븐못) 근처로 옮겨 정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합니다.
이 곳 너븐못 지경은 풍수지리로 보건데 한라산 정기가 기시내오름으로 이어져 뒷목과 서쪽의 청룡은 좋으나 동쪽의 백호는 우방으로 막혀 돌탑을 쌓아 액을 막은 것으로 결정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1948년 4․3사건으로 폐동이 되었다가 1954년 마을이 재건된 것이지요.
우리 마을 가운데 자리한 복지회관(리사무소) 앞마당에는 설촌 유래를 기록한 안내문 표지와 더불어 마을 재건에 기여하신 분들의 기념비가 당당히 세워져 후대들의 귀감이 되어주고 있는 것은 오늘에 사는 우리가 제잘난 능력으로 오늘 우리가 있음이 아니라 훌륭한 선대의 헌신과 교화의 공이 오늘 와흘을 더욱 자랑스런 마을로 키워내고 있음을 자각하고 이러한 선대들의 애향 정신을 본받아 후대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을 주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제 복지회관 앞마당 한 켠으로 오롯이 세워진 기념비는 마을 발전에 공헌한 살아있는 역사적 기념비이기에 삼가 아래에 적어 우리 후대에 전하고자 합니다.

                                                   愛鄕 義捐人 記錄碑
우리들이 나고 자란 맑고 아름다운 이 고장 서로 아끼고 이웃을 도우며 화합과 인정이 넘치는 살기좋은 내 마을 그렇게 가꾸기 위해 늘 힘써주며 내일처럼 도와주는 정겨운 마을 사람들.
삭막한 객지에서 애향의 마음으로 삶의 고달픔도 달래어가며 출연을 서슴치 않으신 분들 이 고장에 터를 닦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산업 발전과 마을을 위해 고락을 나누는 기업인들 그 모든 분들이 따뜻한 마음과 더불어 함께 하려는 정서의 고마움을 이 비에 새겨 길이 우리네 후손들에게 자랑스런 마음으로 전하고자 합니다.
                                                                    1998년 와흘리민 일동

이 비석에 새겨진 복지회관 공사비는 8천8백만원에 달하고 여기에는 군 지원 5천만원과 참여로 1억2천만원으로 재일교포친목회, 새마을금고 잉여금, 마을 조성 자금, 경로 자금, 본향당 자금 등이 망라되었고 재일교포 고태우님, 제주시 강희열님 등이 성금을 보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의연금 기록비를 옆으로 마을 발전에 큰 손을 펴주신 분들의 비석도 가지런히 서있는 바 일본에 건너가 크게 성공하신 임광부(任光夫)님 공덕비, 양남용(梁南龍) 여사 추모비가 세워져 있고 또 그 옆으로 임광부, 양지호, 김희봉, 고봉우, 이광오, 김태원, 김진옥, 김경문, 문우열, 임경환, 임경형, 임경옥, 임경보, 양치만, 이순정, 김탁사 등 제씨의 이름이 새겨진 재일교포친목회 공덕비가 있고 별도로 마을 발전에 공헌하신 재일교포 고정부(高政夫)님 기념비를 비롯해 역시 고태우(高泰祐) 선생, 김희봉(金禧奉) 선생, 고태준(高泰俊) 선생 기념비 등도 아름답습니다.
또한 1986년 이 마을에 전기 가설 자금 200여 만원 쾌척해 와흘리를 밝힌 고달훈님 공덕비가 우뚝서 돋보이고 ‘遠南地傳기념비’가 눈에 띄는 바 이 비석은 와흘리 362번지 46,041평의 너른 초지를 흔쾌히 부락민 공동 초지로 내어주신 분들 이름이 적혀있는 바 천두심(千斗心), 김용하(金龍河), 김종선(金宗先), 고운백(高雲伯), 문백능(文白能), 박의행(朴義行), 한치남(韓致南), 강석오(康錫五), 장운현(張雲賢), 장의규(張義奎) 등 10분의 꽃같은 이름이 새겨져 있고 또 장의현(張義賢)), 강석창(康錫昌), 김위현(金位賢), 박영봉(朴永鳳), 양영운(梁永雲), 백규문(白奎文), 임만식(任萬植), 김백현(金百顯), 홍성담(洪性淡), 백일학

고향발전에 의연금을 내신 분들의 아름다운 이름들
고향발전에 의연금을 내신 분들의 아름다운 이름들
천만리를 떨어져 살아도 태사른 땅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 본능적 애향심을 깊이 심어놓았음이 아닌가
천만리를 떨어져 살아도 태사른 땅을 잊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가슴 속에 본능적 애향심을 깊이 심어놓았음이 아닌가

(白日鶴)씨 등은 와흘리 25번지 4의4번지, 초지 47,675평을 역시 리민들의 공동 초지로 쓰도록 기증한 고마운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오늘에 사는 거주민은 물론 지나는 길손들의 마음에 뜨거운 애향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널찍하게 터잡은 복지회관 내부에는 사무실, 문서고, 회의실 등 다양한 마을 운영에 필요한 시설을 고루 갖추고 이 마을 발전에 심혈을 기울여오신 역대 이장님들 사진이 가지런히 벽면에 걸려 후대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일게 하고 있음은 참으로 뜻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바로 복지회관 옆에는 경로당이 있어 동리를 지켜온 어르신네를 위한 널찍한 공간을 마련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이들의 복지를 지켜주는 모습은 한 폭의 정겨운 마을을 보는 것 같고 자랑스럽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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