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치복: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6)마을 이장님으로 벼락 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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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복: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6)마을 이장님으로 벼락 출세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2.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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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을 이장님으로 벼락 출세
양치복 회장
양치복 회장

◇ 개인 아닌 공인의 길로

세상 살다보면 뜻밖에도 벼락 출세가 되는 일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생각치도 않았던 우리 마을 이장으로 당선된 것이 바로 벼락 출세가 아닙니까. 이런 벼락 감투는 제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와흘리장으로 당선된 것인데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우리 마을은 2년에 한번 2월달 농한기에 ‘마을총회’를 열고 그 때마다 리장을 선출해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있어서 총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는데 전에 이장을 지내신 고윤호님이 현장에도 없는 저를 이장으로 추천한 것입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날 총회에는 다른 두 명도 추천되어 투표 결과 부재중인 제가 다득점으로 이장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졸지에 이장이 된 저는 그저 멍청하니 이장직을 수락하기는 했으나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 임기가 끝이 나니 다시 새 이장을 뽑게 되자 다시 재선되고 말았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고 맹탕 손놓고 있을 수도 없어서 이번에는 꼭 동네를 위한 일꾼이 돼야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전직 이장직으로 구성된 7인 개발위원회의 어른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해서 좋은 말씀을 많이 듣게 되었고 이번에는 동네 현안을 꼭 실천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우선 우리 동네 땅인데 군유지로 편입된 것이 4필지(1만평)나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든 와흘리 소유로 되찾아 놓아야 했습니다. 나는 우리 동네 출신 이연봉 변호사를 만나 전후 사실을 알리고 북제주군 신철주 군수를 상대로 와흘리 소유 4필지 토지를 반환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신군수님은 13개 과장을 소집한 회의 석상에서 47가구 밖에 안되는 작은 마을에서 감히 토지 반환 소송을 하다니 몹시 불쾌해 하시며 각 과장들 임기 중에 와흘리의 민원을 잘 들어주는 대신 토지 반환 소송은 취하토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에 총무과장은 이장인 저를 호출해서 군청에 갔더니 새마을과장이 다짜고짜 군수님 임기 중에는 우리 마을의 민원을 모두 들어준다는 조건으로 토지 반환 소송을 취하하도록 종용했습니다.
나는 이 문제가 와흘리의 가장 중요한 해결 현안이라고 여겨서 ‘소송을 취하하면 마을을 대표해서 소송을 제기한 이장 체면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대통령 잘 뽑으면 나라 편안하듯이 이장 뽑은 와흘 주민의 민원사항을 해결해주면 와흘 주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대답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돌아서버렸지요.
총무과장이 이런 내용을 군수님께 보고했지만 결국 문제의 4필지 소유권은 와흘리 소유로 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 마을에서 조천으로 내려가는 시멘트 포장도로가 낡아서 아스콘 포장으로 깔아줄 것을 행정 당국에 요청했습니다. 당국에서 소식이 없자 저는 중앙에 올라가 지역구 출신 양정규 의원에게 사정을 호소했더니 이듬해 4km에 이르는 낡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12m 폭으로 아스콘 포장도로로 건설되어 주민들에게 기쁨을 안겨드렸습니다.
세 번째는 고윤호 이장님 때부터 추진하던 감귤선과장을 당국의 지원과 윤태현 도의원의 지원을 받아 150평도 짓고 밀감 보관 창고도 만들었고 네 번째는 우리 마을 출신 재일교포가 마을에 기증해준 농토를 마을 운동장으로 개조해 주민 체력 증진에 기여토록 했고 다섯째 마을회관 옆에 있는 이발관 터를 사들여 회관 주차장을 확장했습니다.
여섯째는 마을 가운데 있는 너분못 주변을 가꾸고 조경에 착수했는데 후임 이장들은 행정지원을 받아 너븐못 중앙에 휴식정자를 곱게 지어 주민정서 순화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일곱번째 재임기간 4년동안 마을을 지켜온 환갑노인들 20여 명에게 경로잔치를 베풀고 3kg들이 설탕 한 포대씩을 선물하고 금일봉을 담아 노인 공경의 미풍을 진작시키기도 했습니다. 하기는 이장이 되기 전에도 30여 명의 동네 어르신들을 위해 연말이나 음력설 전후로 해서 보선이나 양말 등 작은 마음의 선물을 마련해 드리기도 했지만 이장이라는 자리에 앉고 보니 마을을 발전시키려는 마음이 간절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세상 나서 벼락감투를 쓴 것은 처음이었지만 이런 일을 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보람을 느끼는 일은 다른 이웃을 위해 봉사 활동 행사를 계속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안 내력


사실 저는 어려서 4․3사건이 발생해서 그 내용도 모른채 와흘에서 부모님 따라 신촌 동가름으로 피난 가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아버지 함자나 기억할 정도이고 나의 조부모님이나 증조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저의 집이나 조상님 내력을 알려줄 가까운 일가 친척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변명같지만 제가 초등학교만 다니고 소나 말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목동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무식한데다 허겁지겁 매일의 생활을 꾸리기에 딴 생각을 품을 시간도 없었지요. 그때의 빈곤한 환경을 벗어날 끼니 걱정만 하면서 살아온 무식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국가도 사회도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모르고 청년이 되어버린, 그래서 축산농가의 목동으로 커버린 것이 저의 가장 큰 약점이고 아쉬운 점으로 남은 것입니다. 이제 와서 그걸 한탄한다고 고쳐질 일도 아니련만 때로는 모르는게 많아서 서럽습니다.
그래도 세상이 그렇게 야박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앞장에서도 잠깐 전술하긴 했지만 저희 집에 언제나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시는 강두식 이장님이 “답답하고 방황하는 저에게” 사람의 도를 다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 분은 신촌에서 와흘리로 돌아와 살 때 어려운 저희 집 사정을 딱하게 여겨 복구 주택을 먼저 짓도록 해주었을 뿐만아니라 제가 청년이 되어 군에 입대할 때도 저를 ‘의가사 신청’으로 군생활을 크게 단축시켜 어려운 저의 집 사정을 도와주신 분이십니다.
저는 독자였기 때문에 사실상 군 입대 전에 이런 사정을 병무 당국에 출원해서 입대면제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전혀 몰랐던 저는 소집 영장이 나오자 무턱대고 입대하고 말았지요. 그런데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강이장님께서 “너가 독자인데 어찌 군대에 갔느냐?”면서 의가사 신청을 해서 군면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혜택을 까맣게 몰랐던 나는 병무당국을 거쳐 ‘독자’가 받는 의가사 제대 신청을 제출한 결과 이것이 재가를 받아 7개월(210일)만에 제대해서 가정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그냥 군대 복무를 계속했다면 저는 36개월을 꼬박 군대생활을 할 것인데 29개월 빨리 제대하는 행운을 입게 되었으니 강이장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리고 신촌리에서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장사치르는 일에도 큰 도움을 주신 어른이셨지요.
당시 너무도 생활이 곤궁했던 우리 집안에 거푸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아버님이 병을 앓고 시내 병원까지 드나들었지만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저희 아버지 장례는 고향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 마을 가까운 곳에 있는 길 옆 공터에 임시로 모셨지만 사실상 가매장한 셈이었지요.
그 정도로 우리 집안 형편은 너무도 어려워 아버지 장사마저 동리분들의 도움으로 그 정도의 장례를 치른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제가 스무살이 되었을 때 역시 이번에도 강이장님이 저를 불러 아버지를 제대로 이장(移葬)을 해서 정성껏 모셔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지요.

부모님 합장묘
부모님 합장묘

저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동리 가까운 곳에 마침 적당한 산터 1375평을 구입해서 이 곳으로 아버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때 기왕이면 어머님도 함께 합장묘를 조성하는게 좋다고 해서 함께 모셨는데 내친 김에 할아버지 묘를 이곳으로 이장할 계획이었습니다. 산터를 보는 분이 할아버지를 모신 묘역을 돌아보시더니 산소가 명당에 터잡았으니 산담 하나 건드리지 말라는 말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산소는 쌍묘인채로 이장하지 못했습니다.
너르닥한 묘역에 부모님을 모시니 웬지 이제야 아들 노릇을 제대로 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편했는데 와흘 종친들에게도 연락해서 우리 가족묘로 이장하도록 해드렸더니 현재는 30여 명 종친들이 조상님들의 묘를 아버님 가족묘로 이장을 한 상태입니다.
이를 보는 저도 조상을 잘 모시는 후손이 되었다는 뿌듯한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뿌리에 대한 것도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해서 종친회에도 가입하고 쫓아다니다보니 이제야

내가 서둘러 마련한 와흘 양씨 가족묘지 전경
내가 서둘러 마련한 와흘 양씨 가족묘지 전경

제법 종친 구실을 하면서 새롭게 조상님의 뿌리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와흘 소낭골에 모신 양영훈 조부님과 조모님은 쌍묘로 모셔져 있는데 와흘에서 일생을 살았다고 하고 가족묘에 모신 어머니는 지난 1999년 9월 노환으로 85세로 돌아가셔서 제가 서둘러 가매장했다가 아버님과 합장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 내일 모레 80고개를 향하는 마당에 서고 보니 사람의 일생이 길기도 하고 일장춘몽이라는 말처럼 짧기도 한 것 같습니다.
바로 엊그제 맴쇠를 받아 키우고 목장을 누비던 소년 시절이 펏득하니 청년이 되고 장가 가서 애기들 낳고 그 어린 핏덩어리들이 어느새 커서 제가 만든 목장을 맡아 당차게 관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살아온 세월을 생각해보니 어린 시절 동새벽에 일어나 하루를 서른시간으로 잡고 동분서주하며 쉴새없이 달려온 나도 이제 황혼길에 서있음을 느끼며 새삼 살아온 과거를 정리할 시간이 되었음을 느낄 때 오늘까지 건강하게 나를 보호해준 가족들은 물론 저를 믿고 도와준 동네분들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 많은 일들(하기는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겠지만)을 하게 해준 주위 분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던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꼭 잊지 말아야 할 분이 여러분 계시겠지만 특별한 한 분이 계시지요.
바로 제가 철없던 소년 시절에 재건주택을 짓도록 도와주신 강두식 이장님의 큰 사랑을 일지 말아야 하겠지요. 오늘 내가 밥숟갈이나 뜨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큰 목장도 만들수 있었던 것 

고 강두식 이장님
고 강두식 이장님

은 강이장님의 저의 집에 대한 배려가 있었기에 그 초석을 다지게 된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강이장님은 오래 전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의 가족들은 모두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오늘도 우리 동네에 함께 살고 계셔서 늘 고마운 마음으로 그 분들을 만나고 있지만 그 은혜는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요얼마전 강이장 사모님 댁을 찾아뵈었더니 작은아들 집에 붙여 아담한 살림집을 꾸며 아들딸들이 잘 모시고 계신 것을 보면서 마음 착한 이장님이 세상을 뜨셔도 그 자식들이 어머님을 잘 모시고 있음을 확인하니 마음이 참으로 가벼웠습니다.
강이장님의 큰아들 익범씨는 대학을 졸업해서 식물검역소에 근무하는 박사가 되고 3남매의 아빠입니다. 둘째 익상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남매를 두시고 행복하게 지내시며 한때는 조천청년회를 이끄시는 사회 봉사활동에 전념하셨고 막내 익상씨도 마을청년회장을 맡아 동네일을 거념하는 남매를 거느린 가장이십니다. 나머지 세분 따님도 모두 서울과 제주시 등지에서 직장을 다니는 가정주부가 되어서 건강히 지내고 있다고 하니 이것이 이 선량한 집안에 내려진 축복이 아닐까요.
아버님의 선행이 지금 후대의 번영과 행복으로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니 저 또한 우리집 일처럼 기뻐집니다.

강이장님 사모님
강이장님 사모님

강이장님 사모님은 지금 91세의 노령이심에도 80세도 안된 젊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시며 옛적 일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집 소로 밭갈고, 우리집 마차로 두 집 일을 열심히 하면서 착하게 사니까 오늘 동네 제일의 부자가 된거 아니라”
할머니는 옛일을 되생각하는 듯 기쁜 얼굴로 “느처럼 착하고 부지런하면 못살 사람이 엇져(없다). 경허난 죽어분 우리 아방도 느를(너를) 아들처럼 생각해났주.”
91세 할머니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마치 아들 대하듯 웃으며 나를 칭찬해주십니다. “제발 할머니 오래 사십서” 하는 말로 발길을 돌리면서 선한 마음으로 살면 결코 늙음이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습니다.

강이장 둘째 아들 강익상씨의 자택 전경

 

                                      ◇ 내 아내의 소설을 들어보세요


저는 성산면 수산리에서 아버지(강종하)와 어머니(오순옥) 사이에서 오빠(강계현)와 막내인 저의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오빠는 4․3사태 훨씬 전에 태어났고 저는 4․3사건 2년 전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4․3사건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저희 외가집에 숨어 살았는데 한 동네에
내 일생의 반려 강순자님
 사는 고모라는 청년이 저의 아버지 숨은 곳을 밀고하는 바람에 폭도들은 저희 아버지와 동네 청년 대여섯 명을 끌고 성산포 터진목까지 끌고가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나는 어릴 때 일이라 잘 모르지만 훗날 우리 할머니는 당신 아들이 숨은 곳을 폭도들에게 밀고한 그 사람을 원수로 여겨 9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일체 상종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희 집에는 계현 오빠가 있어서 농사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먹고살 걱정은 없었지요. 오빠는 수산초등학교와 성산중, 성산수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평범하게 농사일을 하며 살았지요.

내 일생의 반려 강순자님
내 일생의 반려 강순자님

제가 스물을 갓 넘긴 어느날 목안(제주 성내) 사람이 저희 집에 와서 말 중매인과 흥정을 하는데 우연히 아니, 운명적이겠지만 목안 남자의 눈에 제가 띄었던 것이에요. 그 남자는 말을 사는 핑계로 말 임자와 저희 집에서 흥정을 하면서 저를 콕 집어서 장가를 들겠다고 오빠와 말임자를 졸라대어 혼담이 오고가더니 끝내는 스물두살 되던 해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지요.
목안(제주 성안을 말함)에 산다고 해서 신랑집 와흘리에 혼인 예물을 트럭에 싣고 와보니 우리 고향 수산리보다 훨씬 못한 시골 구석이라 섭섭한 생각이 들었지요.
결혼 후 얼마 없어 이런 불평을 했더니 남편은 수산으로 돌아가라며 이불짐을 마당으로 내던지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고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매달려 겨우 첫번째 신혼의 부부싸움은 끝이 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지 오늘까지 52년의 부부생활 중 우리 부부는 다툼 한번 해본 일 없이 농사짓고 과수원 일구고 곶자왈을 산 후 그것을 목장으로 만드는 작업에 세월가는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감귤농사를 할 때는 이렇게 고생스럽지는 않았지만 곶자왈을 사서 가시덩쿨 우거진 덤불을 걷어내고 또 그 땅 속에 널려진 바윗덩어리를 파내어 한 곳으로 치워내는 작업은 정말 여자의 일로서는 너무나 고된 작업이었지요.
그래도 그걸 치워내야 마소를 키우는 초원목장이 되는 일이기 때문에 기왕지사 목표를 정한 일이라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온 몸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고왔던 손발을 정말 피멍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래도 너른 목장이 조금씩 커지는 기쁨에 육체적 고통은 얼마든지 견디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기는 그 때는 목장을 사는게 아니라 곶자왈을 사는 것이였지요. 그러니 그게 그냥 마소가 뛰노는 초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시덩쿨 우거지고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같은 덤불 속이었지요.
그걸 초지로 만들려면 우선 가시덩쿨과 잡나무 숲을 잘라낸 다음 맨살이 드러나면 이제 땅 고르기 작업이 시작됩니다. 한 평 땅을 만드는데 2․3일 넘게 걸린 적도 있지요. 이 곳이 바로 돌더미로 쌓인 돌무더기인데 요즘처럼 포크레인이나 경운기, 안그러면 무슨 리어카라도 있었으면 그 작업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거에요.
못괭이나 삽, 호미 등으로 돌무더기 근방을 깔끔하게 도려내고 큼직한 돌덩이를 파내면 이것을 포대에 담고 온 가족이 그걸 둘 혹은 서너 명이 모아들어 한 곳으로 쌓아놓습니다.
돈이 여유가 없을 때라 일꾼을 구할 수도 없고 우리 부부와 시누이 그리고 시어머니 4명이 이 힘든 일을 궂은 날만 빼고 9년 가까이 작업을 한 덕에 마소가 뛰어놀 수 있는 초지가 조성된 것입니다.

목장에 기르는 소
목장에서 잘 자라는 소

물론 우리가 키우는 말이나 소도 20여 마리가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은 우리 집 바로 아래 동굴밭 마굿간에서 겨울에는 가두어 키우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조천 마을 공동목장(속칭 바농뱅뒤)에 입식하며 그 힘든 목장 초지 조성 작업을 하는데 9년간 6만8천평이 목장이 만들어진 것이지요. 우리집 식구 누구 하나 손이 성한 사람 없을만큼 목장 조성 작업은 힘들었지요.
목장 윤곽이 2만평쯤 만들어지자 쇠파이프(철봉)을 사서 경계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몇 개 구역 경계를 두르는데도 몇천만원이 들어가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기도 했지만 호수파이프 울타리가 절반쯤 만들어지자 선양목장 입구도 만들고 간판도 떡하니 내걸고 보니 그 동안의 고생이 눈녹듯 사라져갔지요.
그러나 기쁜 일이었지만 한 10년 그 작업에 매달려 노동한 대가로 우리 가족 몸뚱아리는 성한 데가 없게 됐지요. 종아리도 시큰, 허리도 쏘악, 어디 안아픈 곳이 없어 허우대만 멀쩡할 뿐 몸은 반병신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재물이 들어오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집 식구가 엄살을 떨지는 않지만 몸이 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맞는 말이고 지금도 물파스니 무슨 약이니 하며 약으로 때우며 움직이는 생활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어떻든 목장 초지가 거의 다듬어지자 축산 도정의 지원을 받아 축사 200평을 지었고 다음 다음 해로 건너뛰면서 현재 축사는 연 850평이 되었고 이제는 트랙터도 있고 건초를 베어 자동으로 묶어내는 콤바인도 살 정도가 되었으니 우리 집 삶의 규모가 이만하면 조천면에서 손꼽는 축산 농가가 된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애기 아빠는 곶자왈 사는 일을 멈추지 않아 6~8년 동안 30여 필지 7만평을 사들이면서 초지 조성 작업은 정말 그칠 줄을 모르고 10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그렇다고 애기 아빠가 돈을 금고에 넣고 목장을 일구지는 않았습니다.
아빠는 현금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갑자기 “오늘 저녁 곶자왈 흥정헐꺼난 어디강 돈 꾸어와.” 하고 말하면 난 또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다니며 돈을 빌려 곶자왈 매수를 돕다 보니 커다란 목장이 생기고 부자란 소리도 들었고 아빠는 새벽에 눈 뜨면 목장을 돌아보고 말을 타고 제주 성내로 가서 소장수를 만나서 거래를 하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30여년간 저는 뒷바라지 할 일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목장에서 열심히 풀을 뜯는 소
목장에서 열심히 풀을 뜯는 소

그러다보니 장남 병선이도 태어나서 대흘초등학교를 나와 조천중학교와 제주일고를 다니게 되었고 제주전문대학 축산과를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축산연수생으로 1년간 나가서 공부도 하고 돌아와 아버지 목장 사업을 열심히 돕고 있지요. 특히 아버지가 요즘 열심히 손대는 한우 육성 사업에 동참해서 부자지간에 손발을 척척 맞추고 있어서 마음 든든합니다.
차남 우선이도 역시 대흘초등학교를 나왔고 조천중학교와 세화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제주대학교 자연과학 대학 농화학과를 졸업했는데 재학 중에 농촌에서 자란 탓인지 4H클럽을 조직하고 열심하더니 나중에는 제주도 대학생 4H클럽 회장 일도 보고 4H중앙회 부회장직도 맡아 열심히 하는 성실함을 보여주어서 우리 부모님들을 기쁘게 해주었지요.
또 큰놈 병선이는 제주 시내 화북동 성씨댁을 아내로 맞아 1남2녀를 두고 의좋게 살고 있는데 손자는 벌써 할아버지 사업을 돕겠다고 한라대학 마산업자원학과에 진학해서 열심히 하고 있고 손녀도 무언가 자기 사업을 한다고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차남 우선이도 도련2동 김씨댁 따님을 며느리로 맞아서 2남1녀를 두었는데 차남 또한 자진해서 아버지가 경영하는 목장일에 뛰어들어 열심히 하고 있어서 저희 온 가정이 화목하게 지내게 되니 정말 저는 좋은 남편에 착한 자식에 귀여운 손자까지 와글와글 늘어나서 재롱을 받으며 살고 있으니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한 가지 꼭 말씀드려야 하겠는데 아빠가 축산일에 힘쓰며 제주도청 축산 관계 일에 열심히 매달리다 보니 한우 육성책이 시급함을 깨달아 제주도의 특정 지원으로 한우 육성 공급책의 하나로 와흘 우리 목장 근처에 큰 식당을 열고 9년 가까이 이 일에 매달린 적이 있었습니다.
종업원도 10여 명 두고 열심했지만 사기꾼에게 속아 결국 식당도 접고 식당에 붙은 땅 3천여 평도 날리는 재정적 피해를 받았던 일도 있어서 정말 아빠를 도울 셈으로 시작한 사업이 사기꾼을 잘못 만나 피해를 보았던 아픔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목장 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큰아들이 제주일고에 입학하자 와흘에서 통학하는게 어려워 아예 제주시내 인하동 근처에 집을 사려다 아빠와 뜻이 안맞아서 과수원 판 돈을 아예 곶자왈 사는 것으로 대치한 것이 오늘 목장을 만들게 된 동기가 되었고 나중에는 제주시 이도2동 선거관리사무소 근처에 조그만한 집 한 채를 사서 아들들이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아빠의 인생도 초년에는 가난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환경에서 살았지요. 어린 시절 아빠는 4․3사건이 일어나자 와흘에서 신촌으로 부모님 따라 피난갔다가 그 곳에서 저의 시아버지가 되실 분이 병을 얻어 돌아가셨고 그때 아빠보다 5살 연상인 저의 시누이(순여)가 있었는데 처녀때 부산에 가서 방직공장에서 2년 가까이 일하면서 돈을 모아왔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누이는 후일 조천 교래리에 사는 신씨댁 신창림씨와 중매결혼이 이루어져 현재 2남4녀를 둔 복많은 8순 할머니가 되어 있고요. 시동생 순옥씨는 아빠보다 6살 연하인데 신촌으로 피난 갔을 때 태어나서 그 시절의 고생은 모르고 자랐다고 할 수 있지요.
어떻든 시누이는 오빠를 도우며 살다가 대흘초등학교도 졸업했고 가삿일을 돕다가 제주시내 건입동에 사는 박상홍과 중매결혼했는데 시누이 남편은 당시 경찰공무원이었고 1남1녀를 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습니다.
막내 시누이의 큰딸 희연은 제주전문대학을 졸업했는데 한진그룹에 직원으로 일하고 있고 장남 용건은 제주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한 후 제주공항 직원으로 일하고 있으니 아빠의 누나나 누이 가족들이 모두 곱게 성장하여 튼실한 가정을 이루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 있을까요. 생각해보면 이런 행운이라고 할까 축복은 저희 아빠가 밤을 낮삼아 열심히 뛰고 노력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온 보람으로 하느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저는 생각하며 저는 정말 강직하고 부지런한 남편을 맞이해서 복좋게 사는 ‘아지망’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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