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38) 『제주문학』2021(89집),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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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38) 『제주문학』2021(89집), 겨울호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2.2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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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제주문학』2021(89집), 겨울호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2022년 봄이 눈 앞에 다가왔는데 새삼스럽게 지난 해, 겨울호를 들먹거리다니 세월 감각이 무뎌버린 것이 아닌가 할지도 모른다. 계간지 '제주문학'이 필자에게 도착될 때마다 언제나 투정부리 듯 쓰고 있지만, 이번에도 1월 1일 제주우체국 소인이 찍힌 책이 50일이나 걸려서 지금이야 오사카에 사는 필자에게 배달되었다.

코로나의 빠른 전염 속도와는 달리 모든 일상은 그와는 반대로 역행하고 있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던 삶의 연쇄를 끊어버리고, 느림과 운둔과 단순함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했다.

제주문학 겨울호에 게재된 시 중에 나름대로 선택한 작품에서 표현의 단순함을 느끼게 했다. 그 단순함은 적당하게 마무리진 희멀건 단순함이 아니다. 밤새 소복이 쌓인 함박눈처럼 새하얗다.

강방영 시인의 <너>이다.

지금 떠나는 것은 가을이지

네가 아니야

계절이 간다고 네가 가겠어

우리를 잊는 것은 세상이지

네가 나를 잊겠어,

내가 너를 잊겠어,

보고 싶다는 말 하지 않아도

구름으로 와서 비로 내리고

아침해로 와서 노을로 지며

함께 늘 너 숨쉬고 있으니

모든 것이 자연과 세월의 흐름처럼 지나면서 삶의 여운들까지 잊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자연의 섭리 속에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을 상징적 의미로서 부여 시켜 언제나 공생(共生)한다는 비유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다음은 고광자 시인의 <동행>이다.

동행

그렇게 25세 청춘이 어느 사이 희수가 되었다,

어느 날

땅도 잔디도 잡풀도 하나로 보인다고 하였다

민들레도 풀도 없어졌다고 했다

그냥 쉬라고 했다.

할머니처럼 보호 본능이 생겼다.

걸음이 느린 것도 거짖인 줄 알았다

나는 아직 저만큼 앞장서고 가는데

다시 되돌아와서 함께 걸음을 맞춘다.

소담히 핀 뭉게구름 사이

부처님이 온화하게 미소 지으신다.

나이를 말할 때, 환갑과 고희(70세)는 한국에서도 일반화 된 단어들이지만, 기수(77세), 산수(80세),미수(88세), 졸수(90세) 등은 일본에서 많이 사용하고 또 그에 걸맞는 축하연을 베풀기도 한다.

젊은 세대 속에서 남의 일처럼 인식하고 느꼈던 백세시대 속에서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늙음이 있다. 부정적 시각에서 바라보던 늙음의 실상을 긍정적 시각으로 자신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부처님처럼 내려다보는 뭉게구름의 미소는 우리를 아늑하고 포근하게 감싸면서 즐겁게 한다.

다음은 김승범 시인의 <사랑 2>이다.

사랑 2

틈이 없어도

스며든다

마음인가

틈이 없어도

스며든다

바람인가

움직임 따라

그림자 되어

춤을 춘다

사위는 몸짓에

접신 되어

몸을 흔든다

사랑은 희열이다. 가만히 있어도 모든 것이 햇병아리 날개처럼 들썩들썩하면서 펄쩍 지붕 위로 비상할 준비를 한다. 그래서 '사위는 몸짓에/ 접신 되어/ 몸을 흔든다'

다음은 문순자 시인의 시조 <새별오름의 가을>이다.

 

새별오름의 가을

 

"멜 들었져 멜 들었져"

"오름에 멜 들었져"

와글바글 가을 햇살

와글바글 억새 무리

그물에 걸려든 바다

윤슬로 파닥인다

간단 명료하다. 이렇게 쓰면 서정성이 결여된 시와는 동떨어진 사무적인 평과 같은 느낌이 들런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표현과 비유지만 그 단순함이 멜처럼 번쩍 빛나는데 자질구레한 평이야말로 윤슬을 흐리게 해버린다.

다음은 김영기 시인의 동시 <아름다운 거짖말 8>이다.

 

아름다운 거짓말 8

 

황소가 푸른 산을

꿀꺽꿀꺽 마셔요

바람이 높은 산을

흔들흔들 흔들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거짖말 같아요

호수의 산 그림자를

마시니 그렇지

산 그림자 호수를

흔드니 그렇지

시인은 눈도 맑네요

그런 것을 다 보니.

언젠가 동시도 작품 감상에 소개해 줘서 고맙다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말에 어느 정도 납득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 말을 곰곰히 되새겨보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른을 위한 시보다도 어른들을 위하여 읽게 하는 동시가 더욱 빛나고 있었다.

아름다운 거짖말이 아니고, 황소가 푸른 산을 먹는 것, 바람이 높은 산을 흔든 것은 사실이었다. 순간적인 이미지의 번뜻함이 시를 읽고 나서도 그 여운의 통쾌함에 빠지게 한다.

다음은 김익수 시인의 동시 <나도 그래>이다.

 

나도 그래

 

똑 같은 바람 없고

똑 같은 파도 없듯

내 맘도 그래

오락 가락.

어린이를 위한 동시라기 보다는 어른이 읽어야 할 시였다. 군더더기 다 걸러내고 단순하고 알기 쉬운 언어의 진수만을 정제했다. 그래서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오락 가락하지 않게 콕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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