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운선생님의 아름다운 동티모르](37) 좌충우돌 성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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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선생님의 아름다운 동티모르](37) 좌충우돌 성주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3.1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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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좌충우돌 성주간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어제는 성주간 목요일이었다. 최후의 만찬과 세족례가 있는 날이다. 돈보스꼬 신부님으로부터 저녁 6시에 예식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혹시나 해서 아침에도 미사가 있을까 해서 성당으로 나가 봤다. 역시 문이 꽁꽁 잠겨 있었다. 집에 와서 오랜만에 느긋하게 쉴 수 있었다.

TV도 보고 또 조희영 선생이 복사해 준 ‘응답하라 1988’ 드라마도 2회 분을 보았다. 전에 몇 회 본 적이 있지만 차례로 보지는 못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이야기 전개 순서에 맞게 생각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옛날 우리들이 생활해온 모습들이 기억되기도 했지만 코믹한 장면들을 너무 많이 집어넣은 것은 아닌지 생각되기도 했다.

야곱신부님과 한인성당공동체
야곱신부님과 한인성당공동체

저녁 5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시작 시간 30분 전이다. 좀 일찍 가야 좋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기 때문에 서둘렀다. 가는 길에 도미니꼬 고아원 맞은 편의 작은 성당을 보았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비다우 성당으로 갔다. 비다우 성당은 문이 열려 있었고 몇몇 신자들이 성당 안팎에 서거나 앉아 있었다. 아직은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6시에 시작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와 있을 터인데 사람 숫자가 적어서 조금 의아스러웠다. 6시쯤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꽤 왔으나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성가대도 텅텅비고 성당 밖 나무 그늘에는 몇몇 합창단복을 입은 청년들이 서성이고 있다. 6시 30분 시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늦게 시작되는 덕분에 오늘이 어머니 기일이기도 해서 고통의 신비 묵주 기도를 바칠 수 있었다. 7시가 되자 성가대원들이 성가대에 들어서고 제대에 촛불도 켜졌다. 성당 안은 오래전에 가득 차고 나무 그늘에는 집에서 가져온 의자를 놓고 사람들이 앉아 있다. 성당 밖 길가에도 사람들이 넘쳐난다. 7시가 되었으나 미사는 시작되지 않고 사람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 얘기를 나눈다. 모든 준비가 되었는데 진작 신부님이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7시 20분이 되자 사목회장이 광고한다. 신부님이 좀 늦는다는 것이다. 옆에 앉았던 수녀님들도 좀 쉬려고 밖으로 나간다. 사람들도 웅성거리며 밖으로 나가 숨을 몰아쉰다. 성당 안이 너무 덥고 습도가 높아 숨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거의 두 시간 동안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니 엉덩이가 쑤시고 혈액 순환도 잘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보지만 온 몸이 불편하다. 더욱이 엄청난 더위에 주변에 가득 찬 사람들의 열기로 몹시 불편한 상황이다.

7시 30분이 되자 머리가 희고 키가 작은 처음 보는 신부님이 제의실로 급히 들어간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미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제대에서 시작을 하는데 이 신부님은 독서대에서 시작한다. 조금 이상하다. 미사 경본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몹시 불안한 모습으로 미사를 집전한다. 강론은 아주 길었다. 거의 30분이 소요되었다. 한국에서는 보통 7분 정도한다. 성체 분배 후에 성체를 지하 교회로 이동하는데 성체를 감싸는 망토를 걸치고 감싸야 하는데 그냥 갖고 간다. 복사가 황급히 망토를 갖고 오니 신부님께서 돌아와서 다시 준비하고 떠난다. 부제가 함께 집전하면 여러 가지로 보완할 수 있는데 혼자 하다 보니 순서와 준비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여러 가지로 아쉬운 성목요일이었다. 9시 30분 경에 끝났으나 거의 4시간이 걸린 조금은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11시경에 잠이 들었다. 평소보다 두세 시간 늦은 취침이다. 그러나 성주간 예절을 잘 참례할 수 있어서 마음이 기뻤다.

인근 고등학교의 수업시간
인근 고등학교의 수업시간

 

오늘은 성금요일이다. 지난번 야곱 신부님이 3시에 시작한다고 해서 반신반의했었다. 2시 20분에 출발하여 40분경에 도착했다. 성당은 조용하고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입구에 학생들이 있어서 시간을 물어보니 다행히 한 명의 학생이 영어를 했다. 오늘은 3시에 있고 내일은 저녁 7시에 모레는 아침 7시에 미사가 있다고 한다. 오전에 니나 수녀님께 미사 시간 문의 메시지를 보냈는데 이미 행사가 끝났다는 엉뚱한 답변이 있었다.

수난 예식은 한국과 비슷했으나 수난 복음을 성가로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다른 부분들도 성가로 하는 부분들이 많아 미사 시간이 거의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오는 길에 계란 등을 사려고 마트에 들렀으나 모두 문을 닫았다. 가톨릭 국가여서 성주간에는 모두가 쉬나보다. 집으로 돌아와서 깻잎 통조림, 갓 김치, 김으로 흰 밥을 먹었다. 맛있고 기분도 좋았다. 오늘은 성금요일이기 때문에 육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즉 금육의 날이다.

부활 성야

어제는 부활절 성야였다. 저녁 때 일요일 아침 미사를 갈까 생각하다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저녁 미사에 참례하기로 했다. 어제 학생들이 저녁 7시에 예식이 있다고 해서 6시 20분에 집을 나섰다. 도착해 보니 성당의 모든 문들이 잠겨있고 100여명의 신자들이 성당 밖 그늘 밑 여기저기 앉거나 서성이고 있었다. 나도 물이 흘러가는 하수구 겸 갯가 근처에 앉아 기다렸다. 시궁창 냄새가 계속 났으나 심하지는 않았다.

조금 있으니 한 청년이 테툼어로 뭐라고 얘기하며 반댓쪽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곳은 모기가 많으니 반대쪽으로 이동하라는 것 같아 자리를 옮겼다. 좀처럼 문을 열지 않아서 아마도 촛불 의식을 밖에서 하고 안으로 들어가는가 보다 생각했다. 잠시 후 반댓쪽 문으로 사람들이 들어간다. 나도 따라 갔다. 덕분에 앞에서 세 번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7시가 지나간다. 엄청나게 더운데 앞에는 기둥이 막고 있다. 7시 15분쯤 되자 성가대가 자리를 잡는다.

7시 30분이 되어도 예식은 시작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웅성이기 시작한다. 아마도 신부님이 좀 늦나보다. 지난 수요일처럼 다시 늦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조금 짜증이 났다. 8시가 되어도 신부님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열기로 더위는 더욱 심해져서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앞쪽에 자리 잡은 내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가기도 그랬다. 오른쪽에 앉은 할머니가 그래도 계속 부채질을 하니 그 작은 바람에 약간의 선선함을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심해진다. 옆에 영어를 할 수 있는 분이 있으면 물어볼 터인데 모두 나이든 분들만 보인다. 잠시 후 안내가 있었다. 아마 조금 기다려 달라는 말일 것이다.

정부 고위 간부들의 학교 방문.
정부 고위 간부들의 학교 방문.

 

8시 40분이 돼서 신부님이 도착하고 예식이 시작되었다. 지난번 그 신부님이다. 부활절 예식에는 초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채 준비하지 못 했다. 앞에 앉은 할머니가 한 자루 주었다. 이곳에서는 촛불과 더불어 성수도 함께 축성하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생수병에 물을 담고 왔다. 또는 그냥 개봉하지 않은 생수병을 들고 있다. 신부님은 처음에는 성당 안에서 그리고 밖으로 나가 마당과 나무 밑 그리고 길가와 건너 쪽까지 모든 곳을 아니 작은 마을을 다니다 시피 옮기며 신부님 성수로 모든 신자와 성수병을 축성한다. 축성식만 거의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성가대는 준비를 많이 한 것 같았다. 지휘자가 서로 교대하면 열정적으로 마치 춤을 추듯이 지휘를 하고 성가대원은 흥과 호흡과 음률과 반주가 아주 조화롭게 천상적 화음을 만들어냈다. 목소리들이 아주 곱고 성스럽다.

밤 12시 30분경에 예식이 끝났다. 정말 힘든 날이었다. 어둠을 헤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에서 깨니 아침 8시다. 많이 늦잠을 잤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밝아서 어제 저녁에 거실에 전등을 켜고 잤나 생각하고 문을 열었더니 햇살이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늦게 일어난 날은 기억에 없다.

청소하고 샤워하고 그냥 쉴까 하다가 주교좌 대성당 미사에 참례하기로 했다. 전에 10시에 미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그런데 가보니 미사가 거의 끝나고 있었다. 그늘에서 신부님 강복을 받고 성당에 들어가서 성체 조배를 하고 나왔다. 대성당 입구에 다른 성당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연단에서 목사님이 교회가 꺼질것 같은 큰 목소리로 설교를 하고 있었다. 성당이 아니라 개신교 교회였다.

미크롤렛을 타고 티모르 플라자로 갔다. 그런데 티모르 플라자 앞 성당에 많은 사람들이 미사를 길가에서 보고 있었다. 시간도 있고 해서 버스에서 내려 성당 쪽으로 갔다. 미사는 거양성체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나무 그늘에서 미사를 보고 성체도 영했다. 나중에 신자 대표가 광고를 하는데 거의 30분 정도 한다. 신부님 강론보다 더 길어 보인다.

미사 끝에 티모르 플라자로 가서 채소와 사과, 바나나 등을 사서 귀가했다. 간단히 겉절이를 해서 점심을 먹고 쉬었다. 오늘도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한방병원 원장님

학교에서 퇴근하려는데 장용기 한의원 원장님이 전화를 했다. 이곳에서는 그를 원장님이라고 부른다. 30분쯤 후에 도착한다고 한다. 심심해서 학교 방문을 하나보다 생각했다. 도착하자 함께 믹스 커피를 마시며 요즘 사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금교건 사장님과 어려서부터 절친이고 또 그 인연으로 금사장님의 초청으로 이곳에 왔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금사장님 댁에서 나와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오래 함께 생활하다 보면 서로의 결점이 노출되고 하찮은 다툼이 큰 감정싸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어쨌든 지금은 집을 나와 또 다른 친구인 임사장님 댁에서 지낸다고 한다. 나는 임사장을 잘 모른다. 한 시간 가까이 학교에 있다가 함께 퇴근했다. 그런데 버스가 우리집 근처에 이르자 내가 집에서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고 인사를 했더니 바로 내린다. 나는 학교에서도 차를 마셨으니 그냥 갈 줄 알고 인사차 건냈는데 의외였다.

행복한 학생들과
행복한 학생들과

집에 와서 쥬스를 마시면서 장원장은 나로서는 꽤 많은 액수의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 요구한 돈은 내 생활비의 거의 석달치에 해당되는 액수다. 내 생활비도 거의 떨어져서 결국 사무용품 구입비로 준비해 둔 돈으로 두 달치 정도의 생활비에 해당하는 돈을 빌려주었다. 이 주 후에는 갚겠다니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핸드폰에 찍어둔 어느 시장 표창장 등을 보여주었다. 나는 진실한 사이면 뭐 상장이나 표창장을 찍어두었다고 보여 줄 필요가 없는데 조금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아버지가 한국에서 한약방을 했고 그는 한약 재료상을 했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한의사가 하는 일들이나 한약 관련 지식이 있어서 이 곳 한국인들이나 현지인들에게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는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신용 상태를 들은 바가 없었으나 겉으로는 진실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사람을 인상을 보고 그냥 믿어버리는 성격이어서 나로서는 거금을 빌려주었다.

한의사로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돈을 빌리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이기도 해서 믿음이 갔다. 물론 차용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엄청 많은 액수가 아니기도 해서다. 그는 이곳에 7, 8년을 족히 생활한 것 같은데 그러면 친한 친구들도 많은데 한두 번 본 나에게 신세를 지는 것은 이상하기도 했다. 추경숙 선생님과는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계속 들려주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 10년 정도 거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강제 추방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한국정부가 세운 ‘한방병원’ 원장으로 병원을 운영했었다. 그 곳에서 아파트도 사고 땅도 4만평을 49년간 임대 받아 감초 등 약초를 재배했었다. 그런데 어떤 여자 선교사가 의료 봉사 요청을 해서 치료를 지원해 주었는데 선교 활동을 지원했다며 적발돼서 추방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소련 연방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나라인데 아직도 공산주의가 사회 기반을 조성하고 있어서 선교 활동을 국가에서 금하고 있다. 적발되면 바로 추방된다고 한다. 땅은 몰수당하고 아파트는 기업체 명의로 구입했는데 회수할 방법이 없었다.

동티모르에 와서 살아보니 사람들과 자연이 자기와 잘 맞아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경치 좋은 해안가에 호텔을 짓기 위해 땅을 구입했다. 돈을 다 치렀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자기가 주인이라고 나타나서 점유해 버려서 지금은 소송 중이라고 한다. 이곳은 아직도 지적이 잘 구분되어 있지도 또 부동산 등기가 잘 되어 있지 않아서 부동산 특히 땅을 구입해 보면 또 다른 주인이 나타나 소유를 주장하기 때문에 땅을 구입할 때는 신중을 기하고 잘 확인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

어쨌든 모든 문제가 잘 풀려서 이곳에서 행복하게 적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또 지금은 장원장이 이 곳 한인 성당에 나오지 않고 현지인 교회에 다닌다. 아마 교인들과 어떤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성실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그에게 모든 일들이 잘 풀리기를 기원해 본다.

한국어 선생님 간식비

전경무 코이카소장님을 공항에서 환송하다
전경무(왼쪽2번째) 코이카소장님을 공항에서 환송하다

오늘은 전경무 코이카 소장님이 출국하는 날이다. 이 곳에 근무한지 4, 5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한국 본사로 발령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본부에서 월드 프렌즈 보급팀에서 일했다고 한다. 아주 휜칠한 키에 미남형이고 성격도 서글서글해서 인기가 많았는데 많이 섭섭하다.

공항에 2시 경에 도착해 보니 코이카 단원은 한 사람도 안 보인다. 전날 정혜진 과장이 아마 VIP실로 나갈 것이라고 한 기억이 있어서 VIP실로 가보았다. 중국인 한 사람이 있을 뿐 텅 비어 있다. 5분 정도 기다리다 다시 일반 대합실로 갔다. 이친범 대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계셨다. 대사님이 일반 단원들은 환송하러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왠일이냐고 한다. 함께 기다리며 나의 군대 생활 얘기도 조금했다. 나는 국방부에서 정보 관련 부대에서 근무했었다. 내 특수 부대도 알고 계셨다. 옛날에는 특혜가 많은 부대였는데 요즘은 바뀌었다고 말한다.

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우리학교 취업반 한국어 강좌에 대해서 조금 얘기했다. 대사님 뜻에 따라 120명 정도를 선발해 교육할 예정인데 약간의 지원을 부탁드렸다. 개막식 하는 날 현수막을 제작해 주고, 선생님 간식비 400달러를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예산이 여의치 않아 어려울 것 같다고 한다. 이 돈은 대사님이 손님과 한 끼 식사값도 안되지만 의지가 없으면 모든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우리 선생님들이 정규 수업 후에 거의 점심도 먹지 못하고 2시간씩 연장 수업을 하려면 간식과 음료수 정도가 필요한데 최소한의 지원이다.

전경무 소장님은 출발시간 2, 30분 남기고 출입문이 거의 닫히는 순간에 도착했다. 현지직원 코넬리아가 출국 수속을 미리 모두 해 놓은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바쁘지만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코이카 소장님이 출국하는데 환송객이 거의 없어 몹시 서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광하 건축 PM 차에 동승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 며칠 간 콧물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목도 아프고 콧물도 자주 난다. 한국에서 구입해온 액티피드를 한 알 먹고 잠자리에 일찍 들었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2018년 3월 30일, 4월 1일, 4월 6일, 4월 7일 토요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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