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운 선생님의 아름다운 동티모르](39)초등학생 선거 운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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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선생님의 아름다운 동티모르](39)초등학생 선거 운동원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4.12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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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초등학생 선거 운동원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오늘은 한국에서는 어버이날이다. 나에게 어버이라야 이제 장모님 한 분 밖에 없다. 마음이 몹시 쓸쓸하다. 사람에게는 모름지기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말씀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침에 아이들이 카톡으로 축하의 말을 전해왔다.

우리학교에 한국어교사로 근무하던 김현진 선생이 이제는 코디네이터로 신분을 달리해서 이곳에 도임한다. 오늘 입국한다고 해서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12시경에 나왔다. 어제 부소장이 입국시간이 1시 20분이라고 해서 두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기술고 선생님들과
로스팔로스 기술고 선생님들과

입구에 코이카 차량이 있는데 직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우리 직원들은 여전히 안 보이고 공항 안에 사람들도 별로 없다. 1시 40분이 되어서 누군가 인사한다. 현지 직원 코넬리아다. 그는 내가 공항에 들어설 때 인사를 했다고 한다. 나는 보질 못 했는데 그냥 인사를 건네고 어디 갔다 왔나 보다. 큰소리로 하던지 재차 인사를 해서 서로 알아봐야 하는데 우리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에게 물어보니 비행기는 1시 45분에 도착 예정이고 사무실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2시가 조금 지나서 검은색 원피스를 멋있게 차려 입은 김 선생이 나온다. 환영객이 아무도 없었으나 그나마 내가 나와서 기쁜 모양이다. 사진을 한 장 찍고 밴 차량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요즘 거리는 선거 유세 차량으로 마치 성난 파도처럼 온 시가지가 출렁대고 있다. 거리도 인산인해다. 다행히 공항 쪽 길들은 경찰관들이 교통정리를 잘 하고 있어서 정돈이 되어 있다. 우리가 나가는 쪽은 비어 있다.

 

이곳에 있는 모든 트럭들이 다 동원된 것 같다. 트럭과 긴 트레일러 등에 Fretlin, AMP 등 단체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거의 미어터질 정도로 많이 올라타서는 정당 구호를 격렬히 외치며 행진한다. 수백 대의 차량들이다. 일반 사람들은 도로 양편에 서서 박수를 치거나 구호를 함께 외친다. 그런데 차량 위에 올라탄 사람들은 어린애들이거나 2, 30대 젊은이들이다. 요즘 이곳에는 국회의원 재선거 운동이 한창이다. 5월 12일 즉 오는 토요일이 선거일이다.

동티모르의 국회의원 선거 제도는 특이하다. 국회의원 개인을 선출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은 지지하는 정당에 투표를 한다. 전체 50석인데 지지표 숫자에 대한 비례로 정당별로 의석수가 배정된다. 100% 비례 대표제라고 할 수 있다. 지난번 선거에서는 과반수 득표 정당이 없어서 두 당이 연합하여 출범했었는데 장관 등 요직을 나눠 갖는데 이견이 많았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도 국회 예산이 통과되지 않아 재선거를 하는 것이다. 다시 어느 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면 또 지금과 비슷한 결과가 생겨날는지 모르겠다.

요즘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모든 젊은이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티셔츠와 깃발을 들거나 오토바이 등에 꽂고 경적을 울리며 거리를 질주한다. 또 수많은 차량, 특히 트럭들이 거칠게 도로를 휩쓸고 있다. 오늘도 학교에서 나오면서 보니 트럭에 웃통을 벗고 온몸을 흰 백회로 바른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또 저녁때는 아주 어린 초등학생들이 자전거에 정당 깃발을 꽂고 달리고 있었다. 집집마다 지지 정당의 스티커가 붙어 있다. 담벼락도 벽보 투성이다. 사람들의 모습이 축제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쟁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토요일이 선거일이다. 그래서 목요일부터 다음 주 월요일까지 임시 공휴일이다. 우리 학교도 이 기간 동안 임시 방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선거일에도 학생들은 정상 수업을 하는 데 이처럼 오래 쉬고 있으니 기업의 생산성이나 학생들의 학습권 등은 어떻게 보장되고 있는지 몹시 아쉽다.

포스팔로스 고등학교에서 이영운 선생님
포스팔로스 고등학교에서 이영운 선생님

 

여스님의 초청

12시에 이무현 선생님과 함께 한국 여자 스님 댁을 방문했다. 지난번 우리 학교 견학을 왔었는데 성의껏 안내해 주었다. 학교를 둘러보고 나서 내 사무실에서 차를 마시며 두어 시간 보냈었다. 마음에 와 닿는 대화가 오갔다. 생각해 보니 전에 새 소장님이 도임할 때 공항에서 여 스님을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었다. 혹시 한국 스님이 아닌가 해서 알아보니 한국인이었다. 그 분이 바로 이 스님이었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나서면서 스님은 한번 집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냥 인사말인줄 알았는데 오늘 초대 받은 것이다. 마침 집에서 걸어서 10여분 거리여서 이무현 선생님과 중간에 만나 함께 갔다. 오늘 초대받은 사람은 우리만이 아니라 The Promise 봉사단원 두 분과 조희영 선생님이다. 우리는 먼저 도착했고 나머지 분들은 30분 뒤에 왔다. 함께 만나서 오느라고 늦었다고 한다. 요즘 나이든 분들은 시간 같은 것을 잘 지키지만 젊은이들은 시간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무척 자유스러워 보인다. 이 곳 사람들이 워낙 시간관념이 없다보니 그들도 몇 달 지나자 잘 적응하여 금새 현지화된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스님은 이곳이 동티모르인가 싶게 한국의 고급 한정식 식단을 준비하셨다. 아주 정갈하고 먹음직스럽다. 대충 차린 음식을 살려 보니 겉절이, 배추김치, 파김치, 호박 찜, 미역무침, 호박잎과 양배추 쌈, 두부찜, 계란말이, 된장찌개, 파파야 무침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집밥’을 맛보게 되었다. 또 차는 연잎차, 홍차, 보이차 등이 나왔고 과일도 파파야가 푸짐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계란말이는 전에는 먹지 못했지만 특별히 준비했다고 한다. 계란이 불교 음식에 저촉되는 것 같다. 모든 음식 하나하나가 우리 입맛에 딱 맞았다. 특히 쌈장은 10여 가지 과일이 들어간 천연조미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아주 풍미가 일품이다. 나는 밥 두 공기를 비웠다. 오랜만의 폭식이다. 모두가 행복을 먹고 있어 보였다.

식사하면서 조희영 선생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스님은 부처 즉, ‘최고의 깨달음’이라고 답한다. 세상에서 행복하면 사후도 행복하고 세상에서 불행하면 사후의 생도 불행이 계속된다고 말씀하신다. 또 동양은 차츰 기독교가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요즘 서양은 불교 정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맞기도 하고 아리송하기도 하다.

식후에 잠시 마당으로 나왔다. 그 사이에 이곳에 와서 3개월이 된 이무현 선생님이 한 장소로 안내한다. 마당발 이 선생님은 누구와도 화통하고 성격이 아주 외성적이어서 모두가 좋아한다. 또 하는 것이 많다. 안내한 곳을 보니 시멘트로 정성스럽게 포장한 무덤이 있고 양쪽에는 의자도 있다. 정면에는 대형 현수막에 성경구절(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26절)인 ‘나를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하리라’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예쁜 여자 사진이 함께 인쇄되어 걸려있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이 집의 딸 세실리아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어 집안에 무덤을 만들어 모신 것이다. 바깥채에는 사위와 자녀들이 함께 살고 있다. 무덤을 집안에 모시는 것은 인도네시아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나도 몇몇 곳에서 집안에 모셔진 무덤들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집에서 외출할 때 무덤 앞에서 기도하고 돌아오면 또 기도하고 들어온다. 좋은 가정적 분위기가 오래 계속되는 것이 좋아 보이기도 하지만 죽은 이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한다.

들어오니 스님은 작은 유리병에 키우고 있는 고구마 순 얘기를 한다. 이제 줄기가 나고 새순들이 피어올라 아주 싱그러운 방안 풍경을 보태고 있다. 나도 사무실과 집안에 계속해서 고구마 순을 키우고 있어서 우리는 뭔가 공통된 의식이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은 The Promise 지도위원으로 오랫동안 전 세계의 NGO 활동을 지도, 지원하는 일을 해왔었다. 세계 각처 모르는 곳이 없다. 영어 실력도 아주 뛰어나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냐고 물으니 대답을 않고 웃음만 지으신다. 많이 고민하고 준비하고 수고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무더위에 혼자 그 험한 따이베이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왔다고 한다. 오랜만에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맘껏 헤엄치며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말 고맙다.

 

닷새간의 오랜 선거 방학을 마치고 등교했다. 그런데 에어컨이 고장이다. 아침부터 사무실이 찜통이다. 그러나 출장 신청 등 몇 가지 사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더위와 싸우며 일을 처리했다. 학교에서는 며칠 전부터 수리 기사에게 전화를 했다는데 오지 않았고, 내일 1시에 온다는 연락이 있었다.

조금 일찍 귀가하여 읽던 책을 마무리했다. 징비록(懲悲錄)이다. 3권으로 되어 있는 징비록은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정무와 군무의 최고기관인 비변사의 수장으로서 피비린내 나는 전장의 일선을 몸소 겪은 현장 지휘자로서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참혹한 격란을 겪고 나서 삭탈관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겪은 일을 돌이켜 보며 그 전반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懲悲)란 시경(詩經) 소비(小悲) 편에 있는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해서 후환이 없도록 조심하라’라는 구절에서 유래한 말이다.

로스팔로스 시내 관광 오토바이
로스팔로스 시내 관광 오토바이

유성룡은 자신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들, 임금과 사대부, 군부 지도자, 백성 등의 잘잘못과 전날을 반성하는 모든 일들을 과감 없이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그래서 서책으로서는 드물게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은 이 땅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전란으로 7년 동안이나 전란 속에서 나라와 모든 고을이 거의 모두 잔혹하게 유린되었고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은 원통하게 희생되었다. 무능한 지도자 선조가 있었지만, 유성룡과 이순신이 있었기에 나라를 구하고 왜군은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까지 질투한 선조는 그를 백의종군하게 하고 원균에게 3도 수군통제사를 임명했으나 거북선 4척을 비롯한 160척의 아군 전함들이 수장되거나 소실된다. 또 우리 배 40척이 적의 손에 넘어가고 조선 수군 1만 명이 전사한다.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명랑에서 단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군함에 대승한다. 1598년 11월 노량 해전에서 일본군을 대파했으나 명나라에서 파견되어 이순신과 합류하여 싸우던 명나라 수군도둑 ‘진린’을 돕는 과정에서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 전사한다.

이순신은 거북선, 학익진법 등 과학적 군함과 체계적 전술을 도입하여 우리나라 전쟁사를 새로 쓰게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위기의 도독을 구하기 위해 조선 함대가 달려오고 이순신이 달려왔다. 이순신의 대장군 깃발이 나타나자 왜군들은 엎드려 집중 사격했다.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미증유(未曾有) 참담한 전란, 버러지 같이 밟히고 버려지는 백성들, 속절없이 죽어가던 그 천한 목숨들을 구하고자 애를 태우며 동분서주했던 단 한 분의 정승, 그 어른을 보내면서 백성들은 가슴을 쳤다. ’어른은 가시고 우리는 살았소‘.

위태위태한 로스팔로스 출장

5월 22일부터 24일, 어제까지 Lospalos에 출장을 다녀왔다. 동티모르에 와서 처음으로 먼 외곽지로 떠났던 단독 출장이었다. 아프리카 세네갈에 있을 땐 거의 전국을 헤집고 다녔는데 이곳에서는 일들이 많고 자리를 비우기도 힘들어 출장을 억제해왔었다.

출장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리학교 자동차학과에 Armondo라는 선생님이 계신데 22일날 대학교 졸업을 한다고 했다. 졸업식이 끝나면 바로 함께 Lospalos에 갈 수 있다고 했었다. 그의 집이 Lospalos여서 귀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에 연락해 보니 아주 늦게 출발한다고 한다. 그런데 늦게 출발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밤늦게 Lospalos에 도착하면 숙소 물색도 어렵고 또 다음 날 기관 방문을 해야 하는데 정돈된 모습으로 방문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일찍 버스로 가면 될 것 같아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전날 교감선생님이 아민도 선생의 졸업식이 취소되어서 아침 8시에서 9시 사이에 학교에서 기다리면 출발할 수 있다고 하고 전화 확인도 했다고 했다.

이친범 대사님의 수업 참관
이친범 대사님의 수업 참관

아침 6시 30분 미사를 보고 학교에 7시 30분 경 도착하여 기다렸다. 그 사이에 카톡과 메일을 확인하고 또 방문지에서의 출장 내용과 설문지, 기관 선물 등을 확인했다. 9시가 되어도 어떤 연락도 함께 갈 차량도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아민도 선생님께 해보니 가족들이 함께 가는데 부인이 은행에서 돈을 찾으러 갔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10시경에 도착한다고 했다. 다시 11시에 온다고 한다. 다시 12시로 변경되었다. 그 후에는 아예 전화를 꺼 놓았다. 결국 1시까지 기다리다 아무래도 버스로 가야할 것 같아서 교감에게 버스 시간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교감은 내가 짐이 있으니 버스 터미널에 먼저 가서 버스 시간 등을 알아보고 오겠다고 한다. 조금 기다리니 전화가 왔다. 1시 30분에 아민도 선생님이 도착한다고 한다. 어쨌든 통화가 됐으니 기다리기로 했다. 2시경에 교감이 터미널에 다녀왔는데 버스가 끊겨서 없다고 한다. 저녁 6시에 버스가 있다고 한다. 그 버스는 새벽 6시경에 Lospalos에 도착한다. 선생님이 온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2시가 지나도 안 온다. 전화해 보니 주유중이라고 한다.

2시 30분 경 갑자기 외교관 차량이 보인다. 이친범 대사님이 내린다. 이 대사님이 한국어 취업반 수업 현장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다. 취업반은 세 선생님이 가르치고 계시다. 그런데 이무현 선생님은 몸이 편찮아서 지금 싱가포르에 질병 치료차 출타 중이다. 다른 기관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김영실 선생님이 임시로 와서 가르치고 있다. 또 경은지 선생님 반은 학생이 반 정도밖에 출석하지 않았다. 대사님이 경은지 선생님께 왜 학생들이 반밖에 없는지 묻자 성적이 안 좋은 아이들을 탈락시켰다고 대답한다. 수업 중인 선생님과 수업을 중단시키고 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간다.

조금 있으니 새 코이카 소장님인 김식현 소장이 도착했다. 오늘 처음 학교 방문이다. 대사님이 우리 학교를 방문한다고 하니 어디 갔다가 황급히 따라온 것이다. 다음에 정식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3시가 지나서 차량이 도착했다. 차에는 이미 손님이 가득하다. 7인승 차량인데 트렁크와 뒷 칸에도 짐들이 가득하다. 아이들을 포함하여 모두 12명이다. 앞 좌석에 5명 가운데 5명 뒷 칸에 2명이다. 아민도 가족 전체와 기사 가족 전체와 나다. 교문을 나서 가다가 다시 주유를 한다고 해서 돌아왔다. 헬라 지역을 지나 도심을 떠났다. 길은 거의 비포장으로 아주 좁은 이차선이다. 그러니 차량이 교차할 때와 급커브를 할 때는 위태위태하다. 거의 전 구간이 공사 중이다. 모두 도로는 파헤쳐져 있고 배수관을 묻고 다리를 놓고, 하수구를 만들고, 경계선 석축을 쌓느라고 아주 아주라장이다. 기존 도로는 아주 좁은 포장도로였다. 4차선으로 보수하고 있다.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모래 자갈을 깔고 새 도로를 만들고 있으니 먼지가 온 길을 뒤덥고 있다. 더구나 거의 40도의 무더위에 수많은 차량에 정신이 없다.

그러나 오랜만에 교외로 나와서 산과 바다와 강과 푸른 숲을 보니 마음이 싱그러워졌다. 먼지는 계속 휘날린다. 그리고 늦게 출발하여 벌써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모든 길은 해안선을 따라 나있고 아주 급한 해안 산등성이를 따라 만들어져 있어서 급경사와 급회전 구간이 너무도 많다. 아차하면 추락할 상황이다. 기사와 차량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가다가 바닷가에 잠시 멈추고 발을 바닷물에 담궈 본다. 아주 깨끗한 바다다. 조약돌을 하나 주어 주머니에 넣어 본다. 다시 차를 타고 달리다 보니 8시가 되었고 배가 고파서 함께 길가 간이식당에 모여 식사를 했다. 생선구이와 찐빵을 곁들여 먹으니 아주 잘 어울린다.

다시 어둠 속을 달린다. 운전기사는 교사 Armondo의 친구로 Lospalos에 살고 있다. 고향에 갈 일이 있으면 함께 왔다 갔다 하나 보다. 부인과 아이들은 아빠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수도로 왔었는데 졸업식이 연기되어서 그냥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합승료로 15달러를 냈다. 버스비는 8달러다.

기계과 실습실
로스팔로스 학교 기계과 실습실

새벽 1시 경에 도착했다. 거의 10시간을 달려서 왔다. 그런데 엄청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사는 나의 숙소로 게스트 하우스로 안내했다. 짐을 들고 들어가 보니 여러 명이 함께 머무는 아주 작은 숙소이고 또 방도 없었다. 다시 나와서 호텔로 갔다. Alberto Carlos Hotel이다. 손님은 거의 없어 보였다. 여주인이 나와서 17호실로 안내한다. 35달러다. 가격은 아주 비싼데 시설은 너무 엉망이다. 깨진 변기, 거무죽죽한 습기에 잔뜩 찌든 벽, 벌레가 왔다 갔다 하고 먼지가 가득 쌓인 바닥 등이 몹시 불결해 보인다. 가구나 TV도 없다. 그나마 에어컨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음 날 아침 8시 30분에 방문할 학교에서 차와 기사님을 보내 주어서 학교에 무사히 도착했다. Armondo 선생님도 9시경에 학교로 도착했다. 교장 선생님이 환영해 주었고 여학생이 목에 타이즈를 걸어주었다. 따뜻한 응접이다. 학교는 허허벌판에 자그마한 콘크리트 본관 건물과 또 조그만 부속 건물이 두 개 있다.

학교 시설이라곤 남는 교실에 거의 부셔져 사용하기 힘든 책걸상을 교실 뒤쪽에 쌓아둔 것이 전부다. 그러나 학생들은 모두 기쁜 표정이고 미소 짓는 여학생들이 무척 예쁘다.

Lospalos는 예부터 미녀가 많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장가를 들려면 양 150마리를 지참금으로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는 딸이 많으면 부잣집이라고 한다.

이 기술학교에는 전기과, 기계과, 건축과가 있다. 기계과는 아예 실습실이 없고 허름한 창고로 안내하는데 고장 나고 녹슨 밀링이 한 대 있었다. 건축과는 나무 절단용 테이블이 한 대 있었다. 전기과는 실습실이 없고 고장난 전기 회로 테이블이 교실 한 구석에 있었다. 어쨌든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보아야 하겠다. 코이카에 한국어 교사를 신청해서 그 교사의 현장사업비를 활용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조금씩 해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일반계 고등학교도 방문했다. 학생수가 1200명인데 잘 정돈되어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조금 권위적인 분위기를 풍기면서 맞는다. 화학실험실 등 특별실을 가보니 수도는 모두 망가져 있고 실험 테이블은 많이 망가져 있다. 선반에 약품들이 몇 개 진열되어 있다. 졸업생들은 10% 정도 대학에 진학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대학 진학은 쉽지 않아 보인다. 대학은 일종의 유학이고 이 농촌에서 많은 유학비를 감당할 집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호텔로 돌아왔다. 자세히 보니 호텔은 숲속의 밀림 정글 같은 분위기다. 여기저기 무성한 열대 나무들과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호텔을 밖에서 보니 여러 개의 양철 지붕을 얼기설기 얽어서 연결시켜 놓은 집이었다. 아주 오래된 건물들로 투자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보였다. 그래도 이 호텔이 로스팔로스에서는 최고급이면서 거의 유일무이한 호텔이다.

시간이 있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200여 미터 가자 전통 시장이 나온다. 파파야, 바나나, 야채, 중고 옷, 신발 등을 팔고 있다. 내려오다 오토바이 택시를 탔다. 시내 한 바퀴 둘러보는데 1달러라고 한다. 시내 중심가는 호텔에서 도보로 3, 40분 거리에 있다. 조금 먼 거리여서 2달러를 지불했다. 중국식당에 들러 뷔폐식 점심을 먹었다. 나와서 파파야와 바나나를 조금 샀다. 바나나 일달러 작은 파파야 두 개가 50센트다. 저녁은 이 과일로 건너뛰기 했다. 할 일이 별로 없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비가 쏟아진다. 좀 개다가 다시 쏟아 붓는다. 콩 볶듯이 요란하다는 말이 이런 경우 같다. 지붕이 양철지붕이어서 그 소리가 정말 요란하여 깊이 잠든 아이도 모두 깨울 판이다.

휴게소 식당
휴게소 식당

저녁 때 여주인에게 내일 버스 정류장까지 픽업을 부탁했다. 5시에 일어나 챙기고 6시 30분에 프론트에 가니 불이 꺼져있다. 날씨는 이제 조금씩 개고 있었다. 남자 직원이 여주인은 지금 자고 있다고 손으로 표현한다. 조금 있으면 나오겠거니 기다리는데 버스가 도착했다. 원래 7시에 오는 버스인데 30분 먼저 도착한 것이다.

버스에 오르니 다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버스에 오르니 차장이 앞쪽 출입구 옆자리에 앉으라고 지시해 준다.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주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버스는 수도 딜리로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었다. 1시간 20분가량 로스팔로스 지역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을 싣는다. 미리 전화를 해주면 아침에 그 집까지 가서 태워가는 방식이다. 편하기도 하지만 많은 시간이 거리에서 낭비되었다. 덕분에 로스팔로스 곳곳을 관광하듯 구경할 수 있었다. 지역 전체가 거의 전원주택 형태로 살고 있다. 워낙 많은 숲과 나무가 있고 그 사이에 조그만 주택들이 듬성듬성 들어선 모양이다. 집들은 아주 허술한 형태지만 자연과 잘 어울리게 지어서 살고 있다. 대부분 블로크로 벽을 쌓고 양철 지붕을 올린 집들이다. 이곳은 워낙 비가 많아서 숲이 무성하고 키 큰 나무들이 워낙 많다. 그래서 과일과 채소 등이 풍부해 보인다.

딜리로 돌아오는 길은 단 하나의 길밖에 없고 또 구부러진 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며 나 있다. 그런데 전 구간이 대규모 공사 중이다. 이 공사를 거대한 중국 자본이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로스팔로스를 벗어나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로스팔로스 밖은 비가 오지 않았다. 길이 모두 메말라있었다. 전 구간이 공사 중이어서 온통 먼지 그리고 먼지바람이 뜨거운 열기 속에 모두를 짜증나게 하고 있다. 차는 에어컨도 안 되고 또 위험한 급커브와 낭떠러지를 수 없이 지나가고 있다.

차는 25인승인데 40여명이 타고 있다. 또 모두가 많은 짐들을 갖고 있다. 짐들은 바닥과 버스 지붕에 실었다. 세 명의 청년이 천정 밖에 위로 올라가 있고 출입문에 5명이 매달려 있다. 아이들은 계속 울어대고 닭도 몇 마리 합승하여 쉬지 않고 뭐라고 외치고 있다. 통역이 필요하다. 이 곳 젊은이들은 아주 예의 발라 보였다. 청년들은 어르신이나 여자가 타면 자리를 기꺼이 양보한다. 동방예의지국이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2시를 조금 지나서 소위 고속도로 휴게소에 해당하는 어느 마을 정거장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10여 채의 엉성한 작은 집들이 길가에 얼기설기 들어서 있고 식탁과 의자가 마련되어 있다. 손님들은 여기서 향토 음식을 사서 간단히 요기하였다. 나도 구운 생선과 쌀밥을 1달러 50센트 주고 사서 간단히 요기했다.

사람들이 차에 오를 때 모두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탄다. 나는 조금 의아해 했다. 환자들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그런데 이제 이해가 됐다. 너무도 많은 먼지 때문에 마스크와 색안경이 필수품이었다. 나는 마스크를 갖고 다니는데 외국인이 티내는 것 같아서 그냥 참고 있었다. 그런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두어 시간 썼다. 딜리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8시경이다. 집에 와서 나의 모습을 살펴보니 마치 탄광에서 일하다 나온 사람 형색이다. 얼굴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옷과 가방, 신발까지 온통 먼지투성이고 먼지로 샤워를 오랫동안 한 모습이었다. 샤워를 하고 신발까지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단잠에 빠졌다.

너무도 힘든 그러나 많은 경험을 했던 2박 3일 로스팔로스 출장이었다.

(2018년 5월 8일, 5월 8일, 5월 15일, 5월 25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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