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6)남로당구국투쟁위원회 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오일균 대대장의 비밀 회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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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6)남로당구국투쟁위원회 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오일균 대대장의 비밀 회합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4.26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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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6)남로당구국투쟁위원회 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오일균 대대장의 비밀 회합

1948년 5월 7일에 제주에 도착한 중앙당 오르그(지도원)는 지난 3월 15일에 전남 오르그가 한 말과 같은 내용인 “국경 프락치(고승옥, 문덕오)에 대한 지도는 제주도당(島黨)에서도 할 수 있다(문창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 제주 : 대림인쇄사, 1995,, p.78.)”고 하면서 남로당인민해방군 대표와 국방경비대 프락치 대표간의 회담을 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그로부터 3일 후인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제헌의원 선출의 투표날인 5월 10일에 남로당제주도당 대표로 군책(김달삼)과 조직책(김양근) 2명과 그리고 국방경비대 프락치 대표로 대대장 오일균 소령 , 부관 나희필 소위, 제9연대 정보주임 이윤락 중위 등 3명, 모두 5명이 제주읍 칠성통 미도원 비밀아지트에서 회합을 갖고, 국방경비대 프락치에 대한 지도문제, 제주도 투쟁에 있어서 국방경비대가 취할 태도, 정보교환과 무기 공급 등에 대하여 아래 주제에 대하여 심도 깊은 토의를 하였다.
  
㊀ 국방경비대 프락치에 대한 지도 문제
㊁ 제주도 투쟁에 있어서의 국방경비대가 취할 바 태도
㊂ 정보 교환과 무기 공급 등 문제
 위 3가지 사항을 중심으로 토의한 결과

다음의 결론에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었다.
● 국방경비대 프락치 지도 관리 문제는 일방에서는 제주도당에서 지도할 수 있다고 하고, 일방에서는 중앙당 직속이라고 하므로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제주도당에서 심어놓은 사병 프락치만은 제주도당에서 지도하되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각각 소속당부의 방침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협조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 제주도 치안에 대하여 미 군정과 통위부에서는 전면적 토벌작전을 지시하고 있으나 이것이 실행되면 결국 남로당 제주도 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므로 국방경비대에서는 포위 토벌작전에 대하여 적극적인 사보타주 전술을 쓰며, 국방경비대 호응투쟁에 관해서는 중앙당에 건의한다. 특히 제9연대내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이하 반동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된다.
● 최대의 힘을 다하여 상호간의 정보교환과 무기공급 그리고 가능한 한 도내에 있어서의 제9연대 탈출병을 적극 추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상게서, pp.79~80.)

앞서 4월 20일경의 김달삼과 문상길 회합시의 합의내용과 비슷하다. 다만 국방경비대 포위작전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사보타주 전술을 쓰고, 박진경 연대장 등 반동장교들을 숙청하기로 한 것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것으로 보아 남로당 중앙당은 박진경 중령의 제9연대장 부임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여 오르그에게 제9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린 것으로 추측되어진다.
이것은 바로 박진경 중령 취임 5일 만에 남로당제주도당 측에 의한 박진경 대령 제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남로당의 비밀세포 조직이 국방경비대 내에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남로당 중앙당 오르그 파견과 남로당제주도당 군책과 조직책이 국방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와의 비밀모의는 미 군정이 제9연대장 김익렬을 박진경으로 교체하고 남로당인민유격대를 진압 토벌의지를 강하게 내세우는데 따른 남로당측의 적극적인 맞대응이라 볼 수 있다.
 이 합의내용에 앞서 미군정은 제주4·3사건을 처음에는 제주의 치안상황으로 간주하고 경찰력만으로 대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사건발생 10여일이 지나도 경찰이 이를 진압하지 못하고 상황이 오히려 악화되자 국방경비대 군인들을 투입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군정장관은 1948년 4월 16일에 국방경비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리면서 제9연대의 실 병력이 1개 대대임을 고려하여 부산주둔 제5연대 1개 대대를 추가로 제주도에 보내도록 하였다.
 

미군정장관 위리엄 프리시 딘
미군정장관 위리엄 프리시 딘

1948년 4월 16일 미군정장관 윌리엄 프리시 딘의 출동명령으로 부산 5연대 2대대(대대장 오일균 소령)는 4월 19일 19시에 해상으로 진해를 출발하여 1948년 4월 20일 아침에 제주항에 도착[제주4 3사건자료<미국자료편 ①> 7권. p. 219.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1948년 4월 16일∼23일 (No. 21, 1948. 4. 24. 보고)경비대 제5연대 2대대 제주로 이동]하여 제주비행장에 주둔하였다.
제5연대 2대대는 제9연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재9연대와 함께 미군정 중대장 겸 미군정관 맨스필드 중령의 지휘하에 들어갔다[제주4 3사건자료[미국자료편 ③] 9권. p. 26. 주한미육군 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일반문서. ∎ 1948년 4월 18일 주한 미군정 사령부 제주도 작전 / Cheju-Do Operations. ].
오일균은 사상적으로 문상길 중위와 연계하면서 남로당군사총책 김달삼과 밀회 하면서 정보교환, 무기 공급, 탈출병 추진과 토벌작전에는 사보타주 전술을 쓰며, 박진경 대령 암살에 공모에 합의도 하였다. 

남로당제주도당 군사총책 김달삼
남로당제주도당 군사총책 김달삼

오일균은 남로당반란군측에게 카빈총 2정과 탄알 2,400발, M-1총 2정과 탄알 1,443발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국방경비대 1개대대가 제주도에 증파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제9연대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는 남로당인민해방군 군사총책 김달삼에게 긴급연락을 하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문상길과 김달삼은 평소 잘 아는 사이[제주4·3연구소. 4·3증언자료집Ⅰ 이제사말햄수다. (제주: 도서출판 한울, 1989), p.200.]였으며 문상길이가 말 타고 거닥거닥 와서 유유히 말을 매어놓고 김달삼 집에 며칠 머무르다 가기도 했고, 이때 김달삼 가족들은 대구로 피신해 있을 때이다. 제9연대와 대

제9연대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중위
제9연대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중위

정초급중학교는 일본군 해군 항공대 병영을 나누어 사용하였는데, 김달삼은 대정초급중학교 공민과목을 담당한 촉탁교사였고, 둘 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젊은 청년이었다.) 이 회합에서 국방경비대의 출동문제와 남로당인민해방군에 대한 지원문제 등을 논의하였는데, 김달삼은 국방경비대도 4·3항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문상길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를 받지 못했으니 제주도당의 지시에는 응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 국방경비대의 장교 세포는 중앙당 직속이므로 제주도당의 지시에 복종할 수 없으나 행동의 통일을 위하여 밀접한 정보교환, 최대한의 무기공급, 인민군 원조부대로서의 탈출병 추진, 교양자료의 배포 등의 문제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더욱이 최후단계에는 총궐기하여 인민과 더불어 싸운다.[문창송, 전게서, p.78.]

  이들 두 사람은 명령계통이 달라 지휘의 통일을 기하지는 못했으나 밀접한 협력을 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즉 남로당 제9연대의 장교 프락치는 중앙당 지시를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문상길이 제주도당 군사총책인 김달삼의 지시에 복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상길과 김달삼의 합의사항은 ‘최후단계에서 총궐기한다’는 부분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충실하게 실행되었다. 국방경비대가 작전을 실시할 시에는 작전계획이 사전에 남로당인민유격대측에 누설되어 별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4월 중순에 문상길 중위는 99식 소총 4정을 남로당 반란군 측에 공급하였으며, 5월 21에는 문상길 중위의 지시로 제9연대 병력 41명이 탈영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문창송, 전게서, pp. 80~81.] 이들 탈영병은 도중에 분리되어 절반은 입산하여 남로당인민유격대와 합류하였으나 절반은 국방경비대에 체포되어 군법에 의한 총살 및 의법 처리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제9연대 내에 있는 프락치들이 군의 정보를 입수하고 남로당반란군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제9연대의 움직임에 대한 대책을 수립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진압부대로 1948년 5월 1일 수원에서 창설된 국방경비대 제11연대를 5월 6일자로 제주도로 이동시키고 미 6사단 예하 광주 주둔 제20연대장인 브라운 대령을 5월 20일경 제주도에 보내 모든 진압작전을 총지휘하도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4월 27일 제주도를 방문해 제59군정중대의 맨스필드 중령과 토벌작전을 점검한 바 있었다.
  제11연대본부는 5월 15일부로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전북 이리의 제3연대에서 차출되어 11연대에 편성되어 제주도로 출동한 한 장교는 한라산을 수색도 하고 투표함을 수송하는데 경계를 하였으며, 5·10선거 당일 투표장 경계임무도 수행했다는 기록을 남겼다.[정규한,「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육사5기생회,『육사 제오기생』, 1990. 6, pp.117~212.)]
경비대총사령부는 5월 15일부로 제9연대와 제11연대를 작전간 합편하며, 초대 제11연대장에 제9연대장인 박진경 중령을 전보 발령하고, 명령상 9연대 제1대대장(5월 6일)인 임부택 대위를 9연대장 직무대리(5월 15일부)로 임명했다.[육군본부 군사감실,『육군역사일지』제1집, 1948. 5. 15.]

제11연대와 제9연대를 합편하는 개념은 2개 연대의 참모부를 합치고 9연대 1대대를 11연대에 배속시키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새로 편성된 11연대의 참모부란 것이 편성이 부실하여 합편 후의 참모급은 9연대 군수과장 유근창 대위만 있을 뿐 참모장교들이 부족하였다. 제9연대 인사과장 심흥선 대위는 4월 10일부로 총사령부로 전출(심흥선 대위가 제주에 온 것은 육사 졸업 후 송호성 경비대 총사령관의 전속부관으로 발령받아 잘나가다 근무 중 차량사고를 일으켜 제주도로 좌천당했다)되었고, 제9연대 정보과장 이윤락 중위는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남로당반란군 군사총책 김달삼과의 회담 주선 관계로 조사를 받고 있으며, 작전과장은 원래 공석중이었다.
 
임부택 대위(임부택 대위는 1948년 5월 6일에 제9연대 1대대장 요원으로 발령받았고, 5월 15일에는 9연대장 박진경 중령이 11연대장으로 전보되자 제9연대장 직무대리를 겸하였으며, 6월 16일에는 제9연대장 명령이 났고, 7월 15일에는 총사령부로 전출된다. 그리고 1949년 3월 2일에는 제주도전투사령부 전투 제1대대장으로 활약하는 등 제주도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9연대 1대대장, 9연대장 직무대리, 9연대장 등의 명령이 났으나 작전과장 임무가 막중하여 박진경 연대장을 보좌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날때까지 제11연대 작전과장 임무를 수행한다.
제11연대는 3개대대로서 제1대대는 4월 20일에 제5연대에서 제주도에
사진설명: 제11연대 작전 회의 기념촬영 사진. 왼쪽 뒷줄 첫 번째부터 인사과장 최갑중 대위, 작전과장 임부택 대위,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 정보과장 김종평 중령, 군수과장 백선진 소령, ○○○. 앞줄 왼쪽부터 제1대대장 서종철 대위, 제3대대장 김용주 대위, 제9연대 제1대대장 고근홍 대위

 파견된 오일균 대대이고, 제2대대(3연대 1개중대, 4연대 1개중대, 제6연대 2개중대로 편성)는 김도영 대위가 지휘하였으며[김도영(안양시 만안구, 6연대 1대대장) 증언], 제3대대(2연대 2개중대, 3연대 1개중대, 4연대 1개중대로 편성)는 대대장이 공석이었다. 김도영 대위는 명령상으로 제9연대 1대대장직을 역임한바 있다(당시 9연대는 1대대 2개 중대뿐이므로 연대장이 중대를 직접 장악했고, 대대참모도 없었으므로 김도영 대위는 실제로는 부연대장 및 연대부관직을 수행).
  제9연대는 연대본부가 제주읍으로 이동하여 11연대에 합편된 뒤에는 1대대만이 모슬포에 주둔하면서 1중대장 이세호 중위가 대대선임장교로서 대대장이 보임될 때까지 지휘하고 있었다.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제5연대 장교 3명이 경비대원 탈주 사건에 관여되어 무능하다는 이유로 오일균 대대장은 해임되어 육지부로 나갔다.[제주4 3사건자료[미국자료편 ①] 7권. p. 68.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1948년 5월 22일∼24일 (No. 842, 1948. 5. 24. 보고) 경비대원 탈주] 이에 대하여 남로당 인민유격대 노획문서에는 “1948년 5월 17일경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MI 2정, 동 탄환 1443발, 카빙총 2정, 동 탄환 800발을 공급받았다”고 기록했다. 또 “5·10 단선 직전 미 군정과 통위부는 김익렬 제9연대장과 오일균 제5연대 대대장을 육지부로 보낸 후 악질 반동 장교 박진경을 11연대장으로 임명, 병력을 2연대 500명, 3연대 300명, 4연대 200명, 9연대 800명, 5연대 1,500명, 6연대 500명 계 3,800명을 증가, 이를 15개 중대로 편성하여 포위 토벌 작전을 개시”라고 기록하였다.(문창송, 전게서, pp. 80~83.)  [오일균소령]

오일균 소령
오일균 소령

오일균은 대대장직에서 해임되자 남로당인민유격대에게 무기와 실탄을 공급해 주고 제주도를 떠났다.
오일균 소령은 1949년 1차 숙군(1948. 10 ∼ 1949. 3)과정 중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49년 2월 8일에 처형되었다.[ 박윤식, 《여수14연대반란사건》 , 부천 : 도서출판 휘선,2012, p.102.] 제민일보 4·3취재반이 지은 4·3은 말한다에서는 오일균 가족들은 오일균 소령에 대한 공산주의 낙인은 김창룡의 사감에서 조작됐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육사 3기생들은 국방경비대안에 좌익계열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 여수·순천반란사건의 주모자 김지회와 홍순석 중위, 나주 주둔 부대 반란 주모자 김남근, 군산 12연대 2대대의 반란 음모자 중대장 김응록 중위등이 대표적인 좌익 극렬분자이다.
육사 3기에 고위 좌파 장교들이 핵심을 이루었던 이유는, 그들이 재학 중 생도대장을 맡았던 오일균같은 좌파 지휘관들이 생도들의 교육을 담당하여 깊은 공산주의 사상적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오일균 소령 체포에 관하여 김종평(예편 후 김종면으로 개명) 중령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오일균은 여순반란사건 후 내가 잡았다. 당시 나는 현재의 호텔 신라의 자리에 있던 박문사에서 SIS 교육을 받고 있었다. 김창룡. 오일균 등이 함께 교육을 받았는데, 어느 날 정보국에 들어오니 백선엽 국장이 ‘오일균이가 같이 있는데, 잡아야 하는것 아니냐?’고 일러주었다. 당시 여순사건의 여파로 한창 숙군이 진행중이었다. 그러나 마땅하게 잡을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중 한가지 꾀를 냈다. 오일균은 원래 이리 3연대쪽 출신이었는데, 당시 반란군이 이리쪽으로 북상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박문사에서 ‘이리에 가야하는데, 누구 지리 잘 아는 사람 없느냐’고 소리쳤더니 예상대로 오일균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재빨리 그를 지프차에 태워 바로 헌병대에 넘겼다.[『한국일보』, 1990년 12월 11일, 백선엽, 『실록 지리산』, 1992년 6월 10일, p.143.]”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대대장과 연대참모요원을 긴급히 보충해줄 것을 국방경비대사령부에 요청하였다. 이에 대대장요원 3명이 보충되자 5월 24일부로 서종철 대위를 오일균 소령 후임으로 1대대장에, 김용주 대위를 공석중인 3대대장에, 고근홍 대위를 공석중인 제9연대 1대대장에 보직하였다.
또한 경비대총사령부는 3명의 중견장교도 파견하였는데, 김종평(군영) 중령은 정보과장에, 백선진(전 재무부 장관)(군영) 소령은 군수과장에, 최갑중(예비역 육군 준장, 전 경남도지사)(육사 1기) 대위는 인사과장에 배치되었다. 이들 파견된 3명의 중견장교들은 자문요원으로 참모역활을 했으며,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된 후 6월 말까지에는 모두 제주도를 떠났다.[김종면(경기도 성남시 성남동, 당시 정보참모 제11연대 파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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