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49) 일제시대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제막
상태바
[김길호의 일본아리랑] (49) 일제시대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제막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6.14 11: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9) 일제시대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제막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이것은 우연이었습니다.”

5월 29일, 오전 10시반부터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兵庫縣 寶塚市 武庫川) 강변에서 열린 추도비 제막식에, 양기호 주고베한국총영사, 효고현 현의원, 다카라쓰카시 시의원들의 인사 후, 헌화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추도비 설명을 한 <다카라쓰카시 외국인 시민 문화교류협회> 재일2세 김예곤(88) 선생의 첫 마디였다.

참석자들에게는 오늘의 제막식 차례와 추도비 건립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쓴 김예곤 선생의 자료까지 배부되었다. 그 자료 중에 발췌한 내용을 소개한다.

일본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 강변에 세운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앞면).
일본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 강변에 세운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앞면).

추도비는 구 국철(국영기업이었던 철도회사. 지금은 민간 기업 JR철도회사임) 후쿠지야마선 철도 턴널 공사 중 다이나마이트 폭발 사고로 1929년에 사망한 윤길문(21), 오이근씨(24), 그리고 고베 수도 턴널 공사 중에 1913년에 사망한 김병순 씨(30),1914년에 사망한 남익삼씨(37), 같은 해에 사망한 장장수씨(27), 다섯 분을 위령하기 위한 추모비였다.

옛날 이야기라고 할는지 모른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서 합병하여 100년 이상이 되었다. 그러나 먼 이야기처럼 들릴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지금도 식민지주의의 여파를 주변에서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러니 가까운 이야기이다. 일본이 식민지시대에 행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지우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뒷면)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뒷면)

교과서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국민을 뇌지(惱止:사고정지:思考停止) 시키려는 정책이 지금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지우려고 하는 사실이 마음 있는 사람들의 지원에 의하여 남아 있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식민지 당시 한반도로부터 징용당해 위험한 노동 속에 생명을 잃은 조선인을 추도한 위령비는, 역사를 풍화시키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의해 전국 각지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역사를 감추려는 사람들에 의하여 위령비의 철거를 위한 움직임도 있다. 군마현 다카쓰기시(群馬縣高崎市)에서는, 현이 위령비 설치 불허가를 정하고, 설치를 놓고 소송을 일으켜서 고등법원에서 시민 측이 패소했다. 대법원에서도 패소하면 위령비를 철거하지 않으면 안될 사태까지 초래할는지 모른다. 고등법원의 판사가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다카라쓰카 이야기, 지역 노인 이야기

내가 후쿠지야마선 철도 턴널 공사에 조선인이 관련된 것을 안 것은, 다카라쓰카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는 동생, 상곤씨의 이야기에서 처음 알았다. 상곤은 고노모도지장이라는 지역에서 측량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지역에 사는 노인과 알게 되었고 그 노인이 어느 날, 상곤에게 말했다.

“당신에게 이런 말 해도 괜찮을까” 망설이면서, “저쪽에 있는 작은 집은 손으로 누르는 펌프실이었는데, 그 앞에 있는 작은 집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장작을 쌓아 놓고 사고로 죽은 두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조선인이라고 들었다. 그 유체의 모습은 차마 볼 수 없었다.”

동생한테서 이 말을 들은 김예곤씨는 효고현의 재일동포 관계를 연구하는 친구인 정호영씨에게 전하라고 해서 동생은 그대로 전했다. 정호영씨는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무궁화회>의 호리우치 미노루씨에게 의논했다. 호리우치씨는 당시의 신문을 조사했다. 1929년 3월 28일자 신문에, 동26일 철도 개수(改修) 공사 중에 사고가 나서,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사상했다는 기사를 확인했다.

정호영씨는 ‘다카라쓰카 가극단’으로 유명한 다카라쓰카의 또 하나의 아픈 역사를 자신이 쓴 『가극의 거리 또 하나의 역사- 다카라쓰카 조선인』이라는 저서에 이 사실을 게재했다. 그리고 재일동포와 뜻 있는 일본인들과 해마다 3월 26일 사고 현장 부근에 가서 제사 겸 추도회를 가졌다.

추도비 건립 운동

정호영씨의 활동상을 알고 스승으로 모시던 곤도도미오씨(전 고교 교사)는 1993년도부터 1914~15년에 고베 수도수로(水道水路)공사와 철도공사 중에 순직한 다섯 분을 위한 추도를 하면서, 그후 별세한 정호영씨로부터 언젠가 희생자를 위한 추도비를 세우고 싶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다카라쓰카 외국인 시민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시민회의 건립위원회 멤버로도 참여하게 되었다.

다카라쓰카시에서 건립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은 일본 사회이기 때문에 곤도씨가 맡기로 했다. 이렇게 활동하는 가운데 다카라쓰카시에서의 활동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활동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

마침, 김예곤씨가 오사카를 중심으로 설립한 <목련회>( 한일문화 등을 주제로 의견 교환하는 모임)도 있어서 같이 합류하게 되었다. 필자도 목련회 회원이어서 설립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장은 그대로 곤도씨가 맡기로 했다.

건립 재정이 필요해서 모금 운동도 벌였는데, 이쿠노에 사는 제주 출신, 한국식당, <경애관>을 경영하는 변순희씨. 그리고 박정자씨, 윤순덕씨, 카라오케방 <미도리>를 경영하는 강정숙씨의 협력에도 이 글 속에서 다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건립지의 우여곡절

건립 장소의 토지 확보가 가장 중요한데 적합한 장소는 사고가 일어났던 곳이 좋은데, 그곳은 JR철도의 소유지였고, 그 토지를 다카라쓰카시에 임대하고 있어서, 결국 JR철도 측이 설립 허가 요청을 거절했다. 김예곤씨는 채석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JR철도가 국영 기업이었던 때에 국철을 위해 채석장을 포기한 적도 있었지만 그러한 기여도 소용 없었다.

그래서 사고 장소와는 멀지만 자신의 소유지에 건립하기로 했다. 그곳은 동생 김상곤 씨에게 조선인 노동자 사망을 들려준 노인이 살고 있는 고노모도지장을 안내하는 안내판을 김예곤씨가 감사의 표시로 토지를 제공하고, 사비로 설치한 장소였다. 도로 표지판이어서, 물론 담당 시인 다카라쓰카시에 인접해 있는 니시노미야시(西宮市)의 허가를 받고 설치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앙부서인 국토교통성이 난색을 표명했다. 그 부근에서 대형 공사를 하는데, 그 토지를 차용하여 사용하고 싶으니, 건립도 중단하고 빌려 달라고 간절히 요청해 왔다. 그렇다면 JR철도회사와 다카라쓰카시와 협의해서 처음 건립하려고 했던 장소를 허가해 달라는 부탁을 김예곤씨도 요청했다. 그래서 허가를 받았지만 어떤 교섭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본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 강변에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건립과 관련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김예곤씨.
일본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 강변에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건립과 관련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김예곤씨.

유족 찾기

결국 여러 우여곡절 속에 장소는 원위치로 돌아와서 건립을 추진하여 2020년 3월 26일 준공을 했다. 그 사이 김예곤씨는 필자에게 한국의 유족 찾기를 의뢰했다.

필자는 2019년 12월 28일 당시 박삼득 한국 국가보훈처장에게 추도비 유족 찾기를 요청하는 편지를 등기우편으로 보냈다. 그분들의 인적사항, 추도회 건립 취지문, 그리고 필자도 제사를 치를 때, 참가해서 쓴 글 <조선인 제사를 하는 일본인>(제주투데이. 2009.3.31)을 동봉했다.

2020년 1월 14일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박지환 주무관으로부터 필자에게 전화가 왔다. 한국 국가보훈처는 담당부서가 아니기 때문에 행정안전부의 과거사업무지원단에 신문고 형식으로 연락이 왔었다고 했다.

이 부서에서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징용공의 명부는 있지만 그 이전의 자료는 죄송합니다만 없다고 했다. 유족찾기에 도움이 안 돼서 대단히 죄송하지만 이 보고에 납득하신다면 이 유족찾기 의뢰서를 취소해 달라고 했다.

상부에 결과를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친절히 응대해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 의뢰를 취소했다.

그런데 곤도 위원장이 다른 쪽에서 조사한 중에 수도 공사 중, 사망한 한 분이 강릉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강릉시에 문의했으나 유족은 찾지 못했다.

그래도 강릉시는 추도비를 건립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감사패를 전달한다고 해서, 금년 2월에 지병으로 별세한 곤도도미오, 故 정호영, 김예곤, 추도비에 조각을 한 다마노세이조씨 등 8명에게 4월 16일 타카라쓰카호텔에서 수여되었다. 김예곤씨는 몸이 좋지 않아서 불참했다.

본래는 사업주가 건립해야 할 추도비

많은 사람의 노력으로 5명의 추도비 건립은 실현되었다. 본래 추도비 건립과 신원확인 조사는 고베수도, 구 후쿠지야마선 공사 사업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사고 당시에 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니시다니에 현존하는 위령비에 새겨진 구 후쿠지야마센 공사에 관여했던 일본인 노동자 20명도 마찬자지이다. 희생자가 그뿐이었던가. 조사도 하지 않고 추도비 건립지 토지도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것인가.

추도비를 건립한 목적

내가 추도비를 건립한 목적은 다음 세 가지이다.

희생자를 추도하고 위령한다.

고베수도, 후쿠지야마센이라는 가혹한 공사에 조선인도 참가해서 희생을 하면서 이뤄낸 사업이었다는 것을 후세에 알리는 것.

우리 민족은 38도선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것이 지금 재일사회에는 38도선이 없는데도 두 개의 단체가 있어서 서로 오가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이 추도비 앞에서 그 벽을 넘고 현재와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으면 한다. (제막식 때, 한국민단 타카라쓰카 박진수 지단장은 참가)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 강변에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제막식에 이은 헌화후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했다.
효고현 다카라쓰카시 무고가와 강변에 조선인 노동자 추도비 제막식에 이은 헌화후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했다.

나에게 남은 일

추도비를 세운 후, <이러한 곳에 이것은 뭐야!!>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 때문에 추도비를 보존하는 법적인 권리 획득이 필요하다. 추도비 토지의 권리를 받을 수 있도록 국토교통성을 통해서 JR철도와 교섭 중에 있다. 건립 후의 추도비의 보전, 관리는 외국인 시민회가 하도록 3년 전 회의에 정했다. 추도비 보전을 위해서 법적 권리를 확보할 때까지 나는 노력할 것이다.

추도비 권리 관계가 해결되면 그 주변에 무궁화와 산진달래를 심고 그 앞에는 동백꽃을 심고 싶다.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이 이 꽃들에 눈을 멈추고 추도비에서, 후쿠지야마선, 고베수도 공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 싶다. 이상이 발췌 내용이다.

2020년 3월 26일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코로나 확대로 중지되고, 지난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도 3월 26일 제막식을 가질 예정이었으나, 큰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와 제반 사정으로 준공 후, 2년이 지나서 50여명의 참가 속에 제막식을 가졌다.

김예곤 선생은 짤막하게 설명을 하고 나서 "감개무량합니다!"하고 끝을 맺었다. 추도비 건립을 위해 행정 당국과의 교섭을 거의 혼자 다 맡고, 회사의오브제로 사용하려고 한반도에서 갖고 온 귀중한 석재를 추도비로 제공하는 등, 어느 누구 보다 추도식 건립에 정열을 쏟았다.

<김상곤 동생이 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형인 김예곤 선생에게는 필연적인 이야기>가 되어서 추도비 건립까지 이르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