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서울현충원서 고 박진경 대령 제74주기 추모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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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서울현충원서 고 박진경 대령 제74주기 추모행사
  • 김동훈 기자
  • 승인 2022.06.20 06: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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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연대장으로 4.3사건 수습임무 수행중 취임 43일만에 암살돼
18일 유족회와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등 참석
제주4.3사건 수습 임무 수행중 국방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장교와 사병에 의해 암살당한 고 박진경대령 제74주기 추모제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8일 오전 11시 거행됐다.
제주4.3사건 수습 임무 수행중 국방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장교와 사병에 의해 암살당한 고 박진경대령 제74주기 추모제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18일 오전 11시 거행됐다.

제주4·3사건 수습 임무 수행중 국방경비대 남로당 프락치에 의해 암살당한 고 박진경 11연대장의 제74주기 추모행사가 18일 오전 11시 국립서울현충원 54묘역에서 유족회와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관계자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됐다.

추모행사에서는 이승학 제주4·3사건진실규명을위한도민연대 사무총장의 고 박진경 대령 약력보고, 박철균 고 박진경 대령 양손자(예비역 육군준장)의 유족 인사, 이영란 예비역 육군여군장교의 특송, 헌화 순으로 진행됐다.

고 박진경 제11연대장은 남로당프락치인 국방경비대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하사 등 일당 8명에 의해 제주4·3사건 수습이 한창 진행중인 1948년 6월 18일 피살당했다.

고 박진경 대령 11연대장은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제9연대장으로 취임하였다. 취임후 43일만인 6월 18일 국방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장교와 사병에 의해 암살당했다.

고 박진경 11연대장은 오사카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에 유학하여 3년 1등으로 졸업하고, 일본학도특별지원병에 강제 징집되어 치바현 마쓰도공병예비사관학교 수료후 공병 소위 임관후 제주도에서 근무, 요새 구축중 해방이 되자 귀향하여 1945년 10월 부산의 사설군인단체인 군관학교 교관으로 일하고, 부산국방경비대 제5연대 창설시 사병으로 입대했다. 1946년 4월 25일 육군소위로 임관하여 제5연대 부관이 됐고 1947년 9월에는 중령 진급했고, 국방경비대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했고, 1948년 5월 제9연대장으로 취임했다.

고 박진경 11연대장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故 박진경 대령(1918. 12. 22 ~ 1948. 06. 18) 약력 ]

제11연대장 故 박진경 대령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출신으로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1942년 4월 7일 오늘의 오사카외국어대학교인 오사카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성적이 3년 줄 곧 1등을 하여 1944년 9월에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일본 군대 간부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한 일본학도특별지원병에 강제로 징집되어 치바현 마쓰도공병예비사관학교 수료 후 공병 소위 임관 후 제주도에서 근무 요새 구축중 해방이 되자 귀향하여 1945년 10월 부산의 사설군인단체인 군관학교가 발족하자 교관이 되었으며,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창설 시 사병으로 1946년 1월 29일 군번 1500001로 자진 입대하니 모두가 놀래고 말았습니다. 이때 박진경은 “나라가 해방되어 독립한 이 마당에 사병이면 어떻고 장교면 어떻냐”하면서 심정을 드러냈습니다.

그후 미군정으로부터 “일본통치하에서 습득한 전투기술을 신생 조국을 위해서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주위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군사영어학교를 거치지 않고 1946년 4월 25일부 현지에서 군번 10,091,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5연대 부관으로 근무합니다.

박진경은 사병때부터 연대부관을 마칠 때까지 미군 야전교범을 한글로 번역하여 전술 교육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영어실력을 십분발휘하여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물려 받은 노후된 무기와 장비를 미군의 최신식무기로 바꾸어 전력증강에 기여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던 건군 초기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그후 부단한 노력으로 1946년 12월 중위, 1947년 3월 대위, 1947년 6월 소령으로 국방경비대총사령관 부관, 1947년 9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거쳐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제9연대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박진경 중령은 제주 부임 한달 만에 6월 1일부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였습니다. 이 진급은 적극적인 남로당반란군 세력들의 토벌 전과로 미군정에게 눈이 들어 진급하였다고 제주좌파들은 이야기하지만 4개 전투대대를 지휘하는 여단장급으로 격상된 직위 진급이었고 작전중 전과와 실적도 없이 토벌의지만으로 진급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고 박진경 대령은 제주4·3사건을 슬기롭게 진압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교였으며 선 선무공작, 후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각급 지휘관에게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지시와 동시에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단위 대장들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는 그의 부하들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그 당시 박진경 제11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은 증언하였습니다.

박진경 대령이 제주도 재임기간은 1개월 13일(43일)에 불과합니다. 실제 부대를 장악하고 작전을 지휘한 기간은 이보다 더 짧습니다.

5월 10일(총선거일) 제주읍에서 남로당 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남로당프락치 오일균 대대장 등 양측 5명이 비밀 회합하여 정보교환, 무기공급, 토벌작전 사보타주, 탈영병 적극 추진, 특히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기로 합의, 이것이 박진경 부임 4일 만에 남로당 지령하에 암살계획을 결정한 것입니다.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1948년 6월 17일 저녁 제주읍내에 있었던 고급 요릿집 ‘옥성정’에서 그의 대령 진급 축하연은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 그리고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고 합니다.

박진경 대령은 술도 잘하지 못하는 편이어서 자정 무렵 다른 참석자들보다 먼저 돌아와서 제11연대본부가 위치한 제주농업중학교 영내의 집무실에 마련된 야전침대에서 잠이 들자, 남로당 프락치 군인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위생병 손선호 하사 등 일당 8명이 침실 밖에서 일부가 경계를 하는 동안 일부는 창문을 열어 손전등을 비추고 취침중인 박진경 대령을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됐던 남로당 프락치 손선호 하사는 M-1 소총으로 상관인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하였습니다. 잠시 후 위생병이 달려와 울면서 시체를 씻어냈는데 M-1총탄이 심장과 두개골을 정확히 관통하였습니다.

직접 총을 쏜 사병은 울면서 박진경 대령의 피를 씻어내던 부산 5연대 출신 위생병 손선호 하사였습니다.

젊은 고급장교로 유명을 달리한 박진경 대령의 그때 나이는 만 29세였다. 박진경 대령의 암살 사건을 주도한 이는 남로당 장교 세포였던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인 문상길 중위였고,

암살 연루자들은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모두 9명이었고, 관련자 중 이정우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M-1총을 소지하고 남로당 반란군측에 합류하였습니다.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 등 4명은 8월 14일 열린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양회천에게는 무기징역을, 강승규에게는 5년 징역을, 황주복·김정도 하사에게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선고가 내려졌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한 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숙군의 시초는 제주4․3사건 당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되면서, 암살범 문상길 중위 일당을 체포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여수 14연대 반란 등 계기로 육군본부는 바로 남로당의 대대적인 숙군을 하게 되며, 이후 군 입대자에 대한 사상검열이 강화되었으며, 좌익 혐의자에 대한 검거가 군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비록 고 박진경 대령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숙군의 결과 국군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숙군은 국군 내의 좌익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6․25 한국전쟁시기 국군은 전쟁 초기의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 박진경 대령님의 죽음은 헛되지 아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례는 1948년 6월 18일 우리나라 국군 최초 육군장으로 엄수되었고, 1950년 6·25한국전쟁 때 나라에서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이상으로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님 약력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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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2022-06-20 09:28:45
여러분들의 수고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응원합니다
군경의 명예회복과 대한민국 정체성 회복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