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8)제11연대의 토벌작전준비와 남로당인민유격대의 조직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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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8)제11연대의 토벌작전준비와 남로당인민유격대의 조직정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7.1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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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8) 제11연대의 토벌작전준비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조직정비

1948년 5월 15일에 제11연대(2개 대대)에 제9연대 1개 대대 및 제5연대 1개 대대를 흡수시켜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으로 하여금 통합 지휘케 한 후 토벌작전준비를 하여 1948년 5월 28일부터 본격적인 제11연대의 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그 앞에 조선경비대총사령부는 1948년 5월 1일 수원에서 창설된 제11연대(2·3대대)를 5월 6일자로 제주도로 이동토록 하고, 연대본부는 5월 15일부로 제주도로 이동시킨바 있다.

조선경비대총사령부는 5월 15일부로 제9연대와 제11연대를 작전상 합치기로 하고 초대 11연대장에 제9연대장인 박진경 중령을 전보 발령하고, 정부 명령상 제9연대 제1대대장인 임부택 대위를 제9연대장 직무대리로 임명했다(육군본부 군사감실,『육군역사일지』제1집, 1948년 5월 15일).

그 당시 제9연대에는 군수과장 유근창(전 15대 국방부 차관 역임) 대위만 있을 뿐 참모장교들이 부족하였다. 제9연대 인사과장 심흥선 대위는 4월 10일부로 총사령부로 전출하여 갔고, 제9연대 정보과장 이윤락 중위는 전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남로당 인민해방군 사령관 김달삼과의 회담 알선 관계로 구속되어 군 영창에서 수감되어 조사를 받고 있으며, 임부택 대위(임부택 대위는 1939년 일본육군특별지원병 출신으로 1948년 5월 6일에 제9연대 1대대장)는 제9연대 1대대장, 제9연대장 직무대리, 제9연대장 등으로 명령이 났으나 작전참모의 임무가 중대하여 박진경 11연대장을 보좌하기 위해 제11연대 작전과장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제11연대는 원래 3개 대대로서 제1대대는 4월 20일에 제5연대에서 제주도에 파견된 오일균 대대, 제2대대(3연대 1개중대, 4연대 1개 중대, 제6연대 2개 중대로 편성)는 김도영 소령이 지휘, 제3대대(2연대 2개 중대, 3연대 1개 중대, 4연대 1개 중대로 편성)는 대대장이 공석이었다. 김도영 소령은 대위시절 명령 상으로 제9연대 1대대장직을 역임한바 있다. 당시 제9연대는 1대대 2개 중대뿐이므로 연대장이 중대를 직접 장악했고, 대대참모도 없었으므로 김도영 대위는 실제로는 부연대장 및 연대 부관직을 수행하였다[나종삼 편저. 제주4·3사건의 진상. (서울 : 아성사, 2013), p.183.]

제9연대는 연대본부가 제주읍 소재 제주농업중학교로 이동하여 제11연대에 합편된 뒤에는 1대대만이 모슬포에 주둔하면서 1중대장 이세호 중위가 대대 선임장교로서 대대장이 보임될 때까지 지휘하고 있었다.

미군정과 통위부는 부대정비상 4개 대대중 2명뿐인 대대장중 제1대대장 남로당 프락치 오일균 소령을 5월 중순경에 육지부로 전출시켰다. 이에 대하여 노획문서에는 “5월 17일경 오일균 대대장으로부터 MI총 동 탄환 1443발, 카빈총 2정 동 탄환 800발 등 소총 4정과 실탄 2243발을 공급받았다”[문창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 (제주 : 대림인쇄사, 1995), p.80.]고 기록했다. 이 노획문서에서 오일균은 대대장직에서 해임되자 남로당 인민해방군에게 무기와 실탄을 공급해 주고 제주도를 떠난 것이 확인되었다. 후일 오일균 소령은 1949년 2월에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49년 12월 1일에 처형되었다.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대대장과 11연대 참모요원을 긴급히 보충해줄 것을 국방경비대사령부에 요청하니 이에 대대장요원 3명이 보충되자 5월 24일부로 서종철 대위를 오일균 소령 후임으로 1대대장에, 김용주 대위를 공석중인 3대대장에, 고근홍 대위를 공석중인 제9연대 1대대장에 보직하였다.

또한 국방경비대총사령부는 3명의 중견장교도 파견하였는데, 김종평(군사영어학교) 중령은 정보과장에, 백선진(전 재무부 장관)(군영) 소령은 군수과장에, 최갑중(전 11대 경남도지사)(육사 1기) 대위는 인사과장에 배치되었다.

이에 앞서 주한 미군 24군단 G-3 타이센(Tychsen)대령의 지시에 따라 슈(Schewe) 중령은 1948년 4월 27일 항공편으로 제주도로 향하였다. 그의 임무는 제주도 주둔 59군정중대장 맨스필드(John Mansfield) 중령을 만나서 섬의 상황을 평가하고 활동을 관찰하며 제주도의 민간인에 대한 통제와 게릴라 활동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맨스필드 중령이 제안한 계획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4월 27일 12시에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슈 중령은 맨스필드 중령을 그의 본부로 찾아가서 함께 공항으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20연대장 브라운 대령, 제주도 주둔 20연대 병력을 책임지고 있는 게이스트(Geist) 소령, 그리고 한국 5연대 고문관 드루스(De Reus) 대위 등과 상황을 논의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맨스필드 중령에게 제주도 상황의 처리에 관하여 주한미군사령관의 지시사항을 고지하였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자료집7[관보편]. (서울:금성문화사,2003), p.237.)

그 내용은

a. 국방경비대는 즉시 임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b. 모든 종류의 시민 무질서는 종식되어야 한다.

c. 게릴라 활동을 신속히 약화시키기 위하여 국방경비대와 경찰 사이에 확실한 결속이 이루어져야 한다.

d. 미군은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남로당인민유격대 진압이 부진하고 2개 선거구가 무효화 되자 5월 20일경 미 6사단 예하 광주 주둔 제20연대장인 브라운(Rothwell H. Brown) 대령을 제주지구 주둔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해 현지의 제11연대의 모든 진압작전을 전개하는데 고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브라운 대령은 ‘4‧28평화협상’ 직전 제주를 방문해 예하 부대인 제주도 주둔 제59군정중대의 맨스필드 중령과 토벌작전을 예비 점검한 바도 있었다.

브라운 대령이 남로당제주도위원회가 일으킨 4·3사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1948년 5월 22일에 취해진 조치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자료집9(관보편), 서울:금성문화사,2003, p.42.]은

a. 경찰은 모든 해안 마을들을 보호하며, 무기를 소지한 폭도들을 체포하며, 양민에게 테러를 가하고 살해하는 것을 중지시킬 것

b. 국방경비대는 제주도의 내부에 조직된 남로당인민유격대를 진압할 것

c. 경찰과 경비대에 의하여 체포된 모든 포로를 심문할 취조실을 설립할 것. 심문센터에서 획득된 정보는 명백한 범죄자의 재판준비에 이용되거나 혹은 폭동에 참가한 개인들을 체포하는데 이용할 것

d. 행정기관 관리들은 경찰과 국방경비대의 보호를 받으며 행정기관 기능은 최대한 신속히 복구할 것

e. 절단된 전신주를 다시 세우고 절단된 도로를 복구할 것 등을 알리면서 남로당제주도위원회 조직에 대해 치밀하게 조사도 하였다.

박진경이 지휘하는 제11연대의 토벌작전준비에는 해군 전신인 조선해안경비대의 해안 봉쇄를 비롯한 작전지원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제11연대가 병력을 증강하고 남로당 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돌입하자, 인민유격대는 1948년 5월말에 인원을 379명에서 240명으로 축소하고, 조직체계도 개편하여 종전의 도사령부 밑에 두었던 제1, 2 및 3연대(총 370명)를 두고 그 밑에 대대 ~ 중대 ~ 소대로 편성했던 것을 도사령부 밑에 기동대 1 및 2를 두었으며, 기동대 1예하에 제1, 2, 3 및 4지대를 두고(총 240명), 지대 밑에는 3개 소대로 편성하여(신상준, 『제주4·3사건Ⅳ』, 제주 : 도서문화, 2010, p.11.), 소대 밑에는 3개 분대를 두었다.

1분대는 5명이고, 3분대 1소대는 16명, 이중 제3분대는 취사분대로 취사·연락·위생 등을 담당하여 인민유격대의 제대 편성도 1개 단계를 축소하였다. 노획문서(1948년 8월 2일 4․3사건 주모자 김달삼이 안세훈, 조몽구, 강규찬, 문등용, 고진희, 이정숙 등 6명과 함께 목포 경유 해주로 월북하여 같은 해 8월 25일 소위 조선최고인민회의대의원 선출을 위한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행한 연설 내용인 것으로 보고 있다.)에는 5월 말일 인민유격대 제3차 조직 정비로 “국방경비대의 대량 입도(약 4000명)와 그의 포위, 토벌전이 전개되자 충돌 회피와 비합법 태세 강화의 필요상 인원을 대량 감소 정리하게 되었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종래 경찰에게는 공격을 하면서도 국방경비대와는 조우전을 회피했던 인민유격대도 제11연대의 본격적인 토벌작전이 전개되자, 이에 대응해서 정면적인 도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1948년 5월경의 제11연대 토벌작전 대상인 인민유격대의 조직과 일상 활동[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자료집9』(미국자료편 ⑨), 서울 : 금성문화사,2003, p.46.]의 일면을 살펴보면

남로당 제주도당의 유격부대는 인민유격대의 군사부에서 명령을 받고 있다. 인민유격대와 자위대 등 2개의 주요 부서로 구성된다. 인민유격대 구성원들은 재산인민유격대원들이며 그들은 제1선의 전투부대라 할 수 있다. 자위대는 재산인민유격대 인력을 보충하고 마을과 인민유격부대 사이의 연락책임을 맡는 기능 이외에 일반 군대의 보급부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남로당 인민유격대 부대및 병력

대대 지휘관들은 정보부, 병기부, 보급부, 의료부 등의 조직을 갖고 있었다.

중대 지휘관들은 소련군의 영향을 받거나 이를 본뜬 모든 군대의 전형인 정무 담당 정치지도원의 도움을 받는다. 기동부대는 김달삼 군사 총책 사령관의 직접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인민유격대 장교들은 보통 일본식 권총과 철모를 쓰며, 대부분 일본군 장교 칼을 갖고 다녔다. 경례를 하지 않으며 어떤 표식이나 신분증명서, 또는 군 상징을 표식하지 않았고 인민유격대원들은 서로 ‘동무’라고 부른다.

인민유격대 부대에서 “지휘관이 인원을 파악할 수 있도록 막사 앞에 2열종대로 집합하는 하루 3차례의 점호가 있으며 오전 점호 뒤에는 1시간 동안 달리는 등 엄격한 체력훈련이 있었다.

부대에 있는 동안 나무 모으기와 숯 만들기 식량창고에서 식량을 운반하는 등의 임무도 한다.

대부분의 부대 입구에는 보초(한국어 빗게)를 서며 100야드 정도 떨어진 곳에 2개의 검문초소가 있다. 한 건물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엄격하게 격리되며, 막사 부근을 떠나지 말도록 명령을 받는다.

또 이 부대에 있는 건물들은 약 100야드 정도씩 떨어져 있으며, 인접 건물에 있는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는다.

실제 마을 습격 나갈 때만 여러 건물의 인원들이 2열종대로 집합해 점호를 받으며, 무기와 실탄이 지급된다.

남로당인민유격대 부대에 소속된 정치지도원들은 끊임없이 남로당의 목적을 강조하며 특히 마을 습격에 앞서 “어떤 특정 마을에 있는 모든 인민은 가치가 없어 죽어 마땅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의 반역자다”라는 말을 확고한 진실로 받아들일 것을 대원들에게 강요했다.

정치지도원들은 또 경찰이나 경비대에 잡힐 때는 부대의 위치나 인원을 누설하지 말고, 오도(誤導)하거나 거짓말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세부지침을 대원들에게 지시한다.

부대 지휘관들에게는 ‘선전 선동 활동’과 관련해 신중하게 준비되고 써진 지침들이 하달된다. 이 지침들은 흔히 그렇듯이 인민유격대원들이 결정을 해야 할 경우에 각각의 단계를 주의 깊게 고려한 것으로서 인민유격대 지휘관은 모든 마을 주민들을 불러 모아서 연설을 하게 되어 있다. 지침에는 “실내 집회가 위험하지 않습니까?”와 같은 질문들을 하게 되어 있고 답변도 상세히 나와 있다. 보안을 이유로 간부들은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단순히 ‘지휘관’으로 불렀다.

인민유격대원들은 미제와 일제 무기들을 사용하는데 일본제 장비들이 압도적이고 99식 일제 소총이 주류를 이룬다. 미제 카빈총과 M1 소총을 보유하고 있으며 25명으로 구성된 기동부대가 미제 카빈총 10정과 일제 99식 소총 15정으로 무장했다.

인민유격대가 보유한 총기

실탄은 실제 습격이 계획될 때만 지급된다. 그리고 총을 갖고 있는 유격대원들은 마을 습격이 끝난 뒤 사용하지 않은 실탄을 반납하라는 명령과 함께 20~50발의 실탄을 받는다. 상태가 나쁜 일제 기관총 부품이 국방경비대가 급습한 부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유격대원들이 갖고 다녔던 다른 무기들은 일본 장교 칼과 총검, 지팡이나 곤봉, 죽창과 같은 숨길 수 있는 에페(끝이 뾰족한 칼) 모양의 긴 비수들이 있다.

인민유격대원들은 ‘지원기관’ 즉, 면내 마을에 있는 남로당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이 마을의 남로당은 사전계획에 따라 음식물과 의류, 자금, 인력충원, 명령과 정보를 제공한다. 마을 남로당은 자위대에 있는 인민유격대원들의 연락과 보급에 책임이 있다.

특히 자위대 조직은 남로당의 주요 부분이다. 1948년 2월께 마을 단위로 제주도 전역에 걸쳐 조직됐으며 1948년 5월 초 인민자위대로 명칭이 바뀌었다.

마을자위대조직은 표면상으로는 인민유격대들의 활동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사실상 교활한 인민유격부대의 임시보급창이며 마을기지다. 자위대는 자신이 지원하는 폭도부대와 비슷하게 군사노선에 따라 조직되었으며 각각의 마을과 소대와 분대마다 장교(지도자)를 두고 있다. 마을 자위대에 대한 명령은 남로당 마을위원회 위원장이 내린다.

자위대의 임무는 이름이 뜻하는 것과는 다르다. 인민유격대원들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대가 마을을 습격할 때 테러 공격에 적극 참여하고 인민유격대원들과 합류하는 것이다. 국방경비대나 경찰이 가까이 있을 때만 경고한다. 자위대 구성원들은 군대가 전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보급조직 임무를 수행한다.

식량과 자금 모집은 정기적으로 이뤄지고 이렇게 모집된 식량과 자금은 인민유격부대의 연락원에게 전달하기 위해 마을 남로당위원회 위원장에게 건네진다.

자위대는 언제, 무엇을, 누구에 의해, 누구로부터 어느 정도 모집, 전달 계획 정보도 갖고 있다.

남로당인민유격대 2명이 실제 자위대의 구역 책임자로 활동했고 그들을 통해서 면 지역의 인민유격부대와 남로당 마을 세포조직 사이에 매우 긴밀한 연락이 이루어진다.

4·3사건 직전 마을 유격대와 자위대 조직을 살펴보면 각 면 투쟁위원회 군사부 산하 각 면 군사위원회를 두고 그 밑에 위원장(군책겸임), 총사령, 참모를 두고 총사령 밑에 유격대(10인 1소대, 2소대 1중대, 2중대 1대대)와 자위대(10인 1소대, 2소대 1중대, 2중대 1대대)를 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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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균 2022-07-14 20:19:08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민의 고통이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후속 글 기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