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9)조선경비대 제11연대의 남로당 인민유격대 토벌작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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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9)조선경비대 제11연대의 남로당 인민유격대 토벌작전 개시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8.11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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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9)조선경비대 제11연대의 남로당 인민유격대 토벌작전 개시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왼쪽)이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오른쪽)과 악수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왼쪽)이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오른쪽)과 악수

1948년 5월 28일을 시작으로 박진경 중령이 지휘하는 제11연대는 경찰과 더불어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Rothwell H. Brown 육군 대령의 작전 지휘하에 대대적인 남로당 인민유격대들에 대한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은 1948년 5월 6일 제9연대장으로 부임하고서부터 제9연대를 지휘하여 남로당 인민유격대를 향한 토벌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였으나, 사태파악과 작전계획 수립상 방어적인 작전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48년 5월 15일부로 제9연대와 제11연대를 작전상 합편하였다. 초대 제11연대장에 박진경 중령을 전보 발령하고 제11연대는 원래 3개 대대로서 제1대대(1,500명)는 4월 20일에 제5연대에서 제주도에 파견된 대대이고, 제2대대[3연대 1개중대, 4연대 1개중대, 제6연대(500명) 2개중대로 편성)는 김도영 대위가 지휘하는 대대, 제3대대[2연대(500명) 2개중대, 3연대(300명) 1개중대, 4연대(200명) 1개중대로 편성]로 대대장이 공석이었다. 제9연대(800명)1대대만 모슬포에 주둔하여 이세호 중위가 대대 선임장교로서 지휘하였다. 이러므로 박진경은 4개 전투대대를 지휘하므로 여단장급으로 격상되었다. 훗날 대령 진급도 이에 대한 조치였다.

흡수 통합된 제11연대를 지휘해서 남로당인민유격대 토벌작전에 임했지만, 주로 산속의 수색작전에 머물러 한라산중의 남로당인민유격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 작전은 크게 수행하지 못하고 1948년 5월 28일에서야 본격적인 대공세 토벌작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노획문서인 ‘제주도인민유격대투쟁보고서’( 문창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 제주·대림인쇄사, 1995, p.83.)에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국경(國警)의 토벌 작전

5․10 단선(單選) 직전 미군정과 통위부(統衛部)는 김익렬(金益烈) 제9연대장과 오일균 (吳一均) 제5연대장을 육지부로 보낸 후 악질 반동 장교 박진경(朴珍景) 중령을 11연대장으로 임명, 병력을 2연대 500명, 3연대 300명, 4연대 200명, 9연대 800명, 5연대 1,500명, 6연대 500명 계(計) 3,800명을 증가, 이를 15개 중대로 편성하여 포위 토벌 작전을 개시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악질 반동 장교’라고 표현하고 토벌작전에 참여한 병력수를 3800명으로, 15개 중대가 토벌작전에 임했다고 했다.

박진경 연대장은 제주로 출발하기 전, 미군정청 장관 윌리엄 프리시 딘으로부터 무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폭동을 진압(이종찬·김충남(역), 『한국전쟁의 기원과 진실-John Merrill』, “The Cheju-do Rebellion”, The Journal of Korean Studies, 서울 : ㈜두산동아,2004, p.101.)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브라운 대령이 1948년 5월 22일부터 1948년 6월 30일까지 제주도에서의 활동 보고를 주한미국육군사령부 군정청 사령관에게 보낸 내용 중에 “ 공산주의 동조자들의 한국 경비대 침투는 두 명의 11연대장들이 공산 선동가들과 협상을 벌이면서 단호한 작전이 필요한 곳에 지연전략을 구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만일 군정중대의 민간업무 담당 장교(Chief Civil Affairs Officer)가 단호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였더라면 한국 경비대는 즉각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제주4 3사건자료(미국자료편 ③) 9권. p.41. 주한미육군 군정청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FIK.일반문서. · 1948년 7월 17일 브라운 대령의 제주도 활동 보고서(1948. 7. 17)]” 라는 문장이 있다. 두 명의 11연대장들은 김익렬과 박진경을 일컫는 단어로 추정이 되어진다.

하여튼간 박진경 제11연대장은 남로당인민유격대원들을 귀순·자수시키는 데 실패했고, 인민유격대원들이 귀순협상을 질질 끌려고 하자 그들과 접촉을 끊고 토벌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남로당인민유격대 진압 토벌작전은 5월 28일부터 시작되었다. 국방경비대가 한라산에 근거지를 둔 남로당인민유격대들에 대해 진압 토벌작전을 펼치게 되면서, 경찰은 해안 부락에 대한 순찰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박진경 연대장은 전통적인 대 게릴라 전술인 3단계 전략(이종찬·김충남(역), 전게서, p. 101.)에 따라 진압·토벌 작전을 실시했다.

제1차 진압·토벌은 5월 27일에서 28일까지 2일간 한라산 오름의 산록을 진압·토벌작전을 전개 했으나 성과는 별로 없었다. 이는 제9연대 남로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에 의해 남로당인민유격대에 진압·작전 정보가 새어나가 김달삼이가 지휘하는 남로당 인민유격대는 국방경비대와 교전을 회피했다.

제2차 진압·토벌은 5월 30일부터 6월 2일까지의 4일간 제주도를 4개 지대(地帶)로 나누어 실시했다.

제1지대(地帶)(문창송, 전게서, pp.83~84.)는 한림면(翰林面) 금릉리(金陵里)로부터 출발 구좌면(舊左面) 종달리(終達里)에 도착하였다.

북제주군 한림 금릉리
북제주군 한림 금릉리
제헌국회의원 양병직 추모비
제헌국회의원 양병직 추모비

출발을 금릉리로 선택한 것은 이 마을에 제주 4·3사건 와중에 실시된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북제주군 을구 제헌의원 선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대한청년단(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약칭 한청(韓靑)은 1948년 12월 19일에 대동청년단을 중심으로 서북청년회 등 여러 우익 청년 단체를 통합한 대한민국의 우익 청년 단체이다.) 소속 양병직이가 추천한 것으로 보아진다.

4·3사건 당시 양병직은 금릉리가 고향으로 한림면 우익 대한청년단장으로 활동을 하니 경찰의 보호를 받아가며 경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선거 전후에 습격을 받았지만 특히 집 주변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여 남로당자위대원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였다.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소리는 한림리까지 들렸다. 밤에는 남로당 자위대가 양병직의 목숨을 없애려고 습격을 하니 양병직은 조그마한 목선을 타고 비양도까지 갔다가 밝으면 그 배를 타고 금릉리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5·10 총선거일에도 남로당 자위대가 올까봐 배를 전부 대기해서 남로당자위대원들이 오게 되면 그냥 선거함을 배에 실어서 띄울 준비를 했다. 경찰들도 양병직의 집 주위에 배치하여 지키곤 하였다. 투표소는 한림교, 금릉리사무소, 협재교회였다. 고향인 금릉과 월령, 협재리 등 3개 마을의 경우 선거 참여율이 한림면에서는 높은 편에 속했으나 선거 결과 북제주 갑구 양귀진 3647표, 을구 양병직 3474표로 각각 1위 했으나 투표율 과반수 미달로 인해 다 무효처리가 되었다. 양병직은 1949년 5월 10일 실시하는 북제주 을구 재선거에 도전하여 제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리하여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이 반대하는 5·10 총선거는 유일하게 제주도 갑·을 선거구에서만 무사히 치러지지 않아 대한민국 선거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북제주 구좌 종달리사무소

제1지대 작전 종료 마을을 구좌면 종달리로 선정한 것은 북제주군에서는 동쪽의 끝 마을로, 마을 공회당인 구(부락)사무소에서 편의를 볼 수 있어 선정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종달리는 1947년 6월 6일 좌익민주애국청년회의 불법 집회를 단속하던 제주경찰서 소속 순경 3명이 오히려 집회 참석 좌익청년들로부터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은 사건이 발생한 마을이기도 하다.

제2지대(地帶)는 한림면(翰林面) 음부동(音富洞·월림리는 1953년도에 행정구역 폐합으로 인하여 부락은 한경면 저지리의 일부와 한림읍 상명리의 일부가 합해져 이루어진 마을로서 처음에는 부자가 많다는 데서 "음부동"(音富洞)이라 불리워졌으나 후에 ‘월림리’로 개칭함)으로부터 출발 성산포(성산포동공립국민학교로 추정)에 도착하였다.

북제주 한림 음부동(현 월림리)마을 사무소

출발을 한림면 음부동에서 한 것은 이곳은 중산간 마을의 작전지역 중에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이 주둔한 망오름(느지리오름)이 있어 오름 정상에 오르면 제주도 북서부 전역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어 출발점을 택한 것 같다. 리(부락) 사무소로 잡은 것은 그 당시 공회당으로 주민들에게 편의를 받을 수 있어 선정한 것이다.

작전 종료 장소를 성산포로 정한 곳은 당시 성산포동공립국민학교였다.

남제주 성산면 성산포동공립국민학교 옛 건물 흔적
남제주 성산 성산공립동국민학교 흔적

운동장을 연병장으로 이용하고 교실은 군인들이 숙박과 주둔하기에는 좋았을 것이다. 이 학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로 훗날 1949년 100여 명 정도의 제2연대 서청특별중대가 약 3개월 정도 주둔한 장소이기도 하다. 일본식 건축양식을 사용한 건물의 틀과 바닥, 천정, 복도 의 형태로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제3지대(地帶)는 한림면((翰林面) 금악(今岳)을 출발 성산면 (城山面) 온평리(溫平里)에 도착하였다.

북제주 한림면 소재 금악리사무소
북제주 한림면 소재 금악리사무소

한림면 금악마을에서 작전 출발을 한 것은 이 마을은 동남쪽에 금악오름이 있어 그안에 일제 강점기의 일본군 주둔 진지 동굴도 있고 오름 정상에서 사방팔방으로 살펴볼 수 있어 남로당 인민유격대를 추적하는 데는 적격인 장소인 것이다. 1948년 5월 14일 금악리 남로당 자위대원들이 명월, 신흥, 대림, 귀덕, 수원 등지에서 모인 자위대원들과 같이 한림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는 한림면 남로당 아지트가 있는 금악 위 지경에서 남로당 한림면책 양병시가 지령을 내린 것이다. 응원 경찰대와 모슬포의 제9연대의 추격전에 남로당자위대원들은 금악으로 철수하였다.

금악리 공회당(리사무소) 옆의 돈지(연못)주위를 빙빙 돌며 적기가를 부르고 철창을 높이 쳐들고 주민들과 같이 한림지서 습격의 성공을 자축하는 한판 놀이가 벌어졌다.

작전 종료 장소는 성산면 온평리로 정하였다.

남제주 성산 온평리사무소
남제주 성산 온평리사무소

제3지대 작전 종료 장소도 성산면 온평리로 정한 것을 보면 군인들이 작전하기 좋은 편의 시설이 온평리에 있지 않았는가 추정을 해 본다.

4지대(地帶)는 대정(大靜)으로부터 출발해서 온평리(溫平里)에 도착하였다. 작전 출발한 곳은 모슬포 상모리 소재 제9연대이다.

국방경비대 제9연대 옛터 자리(사진 제공 김응철씨)
국방경비대 제9연대 옛터 자리(사진 제공 김응철씨)
대정읍 상모리 3392-3 소재 제9연대 병사
대정읍 상모리 3392-3 소재 제9연대 병사

제3차 진압·토벌 작전은 6월 3일부터 각 지구별(地區別)로 각 부락에 주둔했다.

제1지대는 구좌면 종달리 마을에 주둔,

제2지대는 성산포 성산공립동국민학교 주둔,

제3지대 성산면 온평리 마을 주둔,

제4지대 성산면 온평리 마을 주둔.

제4차 진압·토벌작전은 6월 13일부터 6월 17일까지 5일간 한라산 백록담을 중심으로 포위 토벌하는 작전을 펼쳐나갔다.

한라산 백록담 밑에서 작전중인 제9연대 국방경비대. (사진=웨솔로스키 소장)
한라산 백록담 밑에서 작전중인 제9연대 국방경비대. (사진=웨솔로스키 소장)

이 작전에 대하여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장 Rothwell H. Brown 육군 대령은 제주도의 정세에 대해서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약 10일 전에 부임하였다. 내가 오기 전에는 경찰과 육·해군 사이에 서로 협력을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있었는데 내가 온 후부터는 그러한 일은 없어졌다.

그러므로 우리의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즉 (1) 경찰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도로로부터 4㎞까지 사이에서 치안을 확보하는 임무를 수행중에 있으며 (2) 국방경비대는 제주도의 서쪽으로부터 동쪽 땅까지 모조리 휩쓸어 버리는 작전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 임무를 각각 분담한 것은 첫째 경찰은 치안 행동을 취하게 하고, 둘째 국방경비대는 산중에서 전투를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3) 해안경비대는 하루에 두 번씩 제주도 일대 해안을 순회하며 밀선의 왕래를 방지하고 있는 한편 국방경비대의 수송에도 종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작전 목적은 백성들이 산중으로부터 내려와서 안전하게 하곡을 수확하고 새 곡식을 심도록 하기 위함이요, 약 20명 가량으로 보이는 산중의 두령들을 체포하는 데 있다. 이러한 결과는 치안을 회복하고 관공리들이 돌아와서 평화스럽게 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5ㆍ10 선거 때에는 성적이 좋지 못하였는데 백성들을 보호함으로써 6월 23일 재선거 시에는 자유롭게 자기네의 대표를 선출하도록 될 것이다. 여하간 사태는 6월 23일까지에는 진정될 것이다.”

그런데 경찰관은 자기네의 동료와 가족들을 살해당함으로써 복수심에 불타고 있다고 들리는데 이에 대한 소감 여하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어느 경찰관이든지 그러한 일을 했다는 말이 있으면 그 경찰관은 24시간 이내에 제주도를 떠나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그런 말이 있어 그 진상을 조사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는 증거가 나타난 일이 없다.”( 현대일보. 1948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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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2022-08-12 09:44:11
4.3 당시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토벌작전이 없었다면 제주는 빨간 섬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