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60) 고(故)) 조맹수 씨에 대한 늦은 추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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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60) 고(故)) 조맹수 씨에 대한 늦은 추도기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9.13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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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고(故)) 조맹수 씨에 대한 늦은 추도기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장구를 쳐도 조수광?” 노래 ‘한오백년’을 부르는데 거의 끝날 무렵에, 카라오케 마마(카라오케, 스낵바, 음식점 여주인 등을 일본에서는 마마라고 한다)가 장구를 갖고 와서 묻는다. 곧 끝나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장구를 치면 더욱 잘 갑니다”하면서 몇 차례 쳤다. 손님들은 한오백년도 오랜만에 듣고 장구 반주도 있어서 좋아했다.

태풍 11호(힌남노)가 한반도로 북상하기 전인 9월 3일 오사카 날씨는 변칙적이었다. 파란 하늘 속에 갑자기 연기처럼 나타난 검은 구름과 함께 장대비 같은 게릴라 호우가 발작처럼 쏟아지고 있었지만, 저녁 6시경 파란 하늘이 한없이 펼쳐졌다. 필자는 만약을 생각해서 우산을 준비하고 자전거 타고 카라오케 가게 <파라다이스>로 갔다.

<파라다이스>는 지난 1월 12일 별세한 언론인 조맹수 씨(향년 67세. 제민일보 전 편집국장, 제주투데이 전 대표)가 오사카에 오면 몇 차례 갔던 가게였다. 너무 빨리 마쳐버린 조맹수씨의 인생을 애석해 하면서 그와 같이 갔던 곳에서 삶의 흔적을 반추하고 싶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첫 추석을 맞이하여 이승에 찾아올 조맹수씨의 혼을 일시적이나마 제주에서보다 먼저 오사카에서 같이 하고 싶었다. 그의 별세를 약 2개월 후에야 알았던 필자의 회한에 대한 염원이기도 했다.

조맹수씨와는 약 20여 년 전에 제민일보 주일특파원으로 오사카에 주재할 때 알았다. 당시 지방신문이 외국 특파원을 파견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는 특히 재일제주인의 생활상을 독점에 가까울 정도로 취재하고 제주에 알렸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 출신으로 남주고, 광주대 신문방송학과, 중앙대 방송대학원을 졸업했다.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언론중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4년 ‘이정식 씨 제주 땅투기사건’ 보도로 한국기자상 수상. 저서로는 <제주의 섬>, <한국은 조국, 일본은 모국>이 있다.

그가 제주에서 처음으로 발행한 인터넷신문 <제주투데이> 대표로 있을 때 필자가 2003년 12월부터 그가 대표를 그만둔 후에도, 2021년 1월까지 제주투데이에 17년 동안 <김길호의 일본이야기>를 673회나 연재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제주와 오사카에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났었다. 그때마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칡넝쿨처럼 어우러졌다.

조맹수씨를 알고 있는 마마에게 그를 추모하기 위해 혼자 왔다고 전하고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서 가게를 둘러보았다.

깜짝 놀랄 정도로 가게는 만원이었다. 어쩌다 아는 사람들끼리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 연장선인 2차로 카라오케라도 갈까 해서 온 차림새가 아니었다.

짜증스러울 정도로 무더운 찜통더위의 토요일 밤인데 남성 손님 중에는 정장을 한 사람도 있었고, 여성 손님 중에는 연회용 드레스를 입고 온 사람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댄스를 즐기러 온 손님들이었다.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혼자 간 필자는 압도당해서 한순간 들어가는 것을 머뭇거리기도 했다.

홀의 내부 구조는 4면의 모서리에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조그마한 무대 장치가 있고, 3면의 벽에 손님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을 배치하고 바로 그 앞에 테이블이 놓여 있다. 텅 빈 가운데 공간은 손님들이 댄스를 즐길 수 있게 남겨두었다.

몇 사람의 손님이 흥에 겨워 가운데 나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마가 세트로서 여러 과일과 맥주 한 병을 갖고 왔다. 하나 밖에 갖고 오지 않은 컵을 보고 또 하나 더 갖고 오라고 하자 자기는 안 마신다고 했다. 마마는 이상하다면서도 일어나서 다시 컵 하나를 갖고 왔다.

나는 컵 두 잔에다 맥주를 가득 붓고 양손에 들었다. "맹수씨 이럴 때는 헌배라고 해야 할지 건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갑습니다. 그렇다, 서로 오래간만에 만났으니 반가우니까 건배입니다. 자, 건배!" 그렇게 하고 두 잔을 단숨에 비웠다."

옆 테이블에 앉은 손님은 필자의 괴이한 모습을 힐끔거리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다. 컵을 두고 갔던 마마가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앉으며, 오가는 인사 몇 마디 나누고 노래 신청하라고 다시 권한다.

많은 손님들이 있으니까 나중에 부르겠다고 했더니 모두 불렀으니까 괜찮다고 했다. 무대에서는 어느 중년 여성이 패티김의 ‘이별’을 일본어로 부르고 있었다.

필자는 ‘한오백년’을 신청했다. 처음부터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마음속으로 정했었다. 잘 불러서가 아니다. 음치이지만 이 노래를 좋아했고 목청이 커서 그랬다. 음정은 저리 두고 필자가 멋대로 편곡을 하고 불렀었다. 조맹수씨와 왔을 때도 언제나 이 노래를 불렀었다. 그는 ‘칠갑산’을 잘 불렀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무대에 나가서 부르기 시작했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요…”

노래 3절이 끝날 무렵 가만히 듣고 있던 제주 출신 마마가 장구를 갖고 와서 ‘장구쳐도 조수광?” 하고 물었다.

그래야 저승길에도 잘 간다고 했다. “손님 없을 때 와서 다시 부를 테니까 그때랑 처음부터 장구 쳐 줍서”

노래를 마치고 다시 오겠다고 해서 계산을 끝내고 나왔다. ‘한오백년’ 노래 한 곡 불러서 서둘러서 나가는 필자를 손님들은 어리둥절한 표정 속에서 쳐다보고 있었다. 밖은 다시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마음이 홀가분했다.

많이 늦어진 추도기이지만 조맹수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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