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7)제주의 미래, 축산업 성공 여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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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축산왕을 꿈꾼다](7)제주의 미래, 축산업 성공 여부에 달렸다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9.1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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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혹 달린 소가 수입된단다
양치복씨
양치복씨

◇ 등에 혹 달린 소가 수입된단다

1957년 후반부터 우리나라에 외국 소가 수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주항에서 하역되는 외국 소는 체구가 큰 등에 혹달린 브라마 소, 우락부락한 빨간 소, 노랑색을 띈 덩치 큰 소가 축산 농가의 관심을 끌었지요.

목장에 풀어놓은 외국 소는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대개 세 종류로 분류되는데 하얀 백색 소는 싸르레라 하는데 1,200kg 정도로 덩치가 한국 재래 종의 2배에 가깝고 헨리 포드라고 하는 노란색 털복숭이 역시 크기와 체중이 그만하고 낙타처럼 등에 혹달린 놈은 브라마라 하는데 800kg 정도가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재래 소와 교접종을 낳고 보니 이놈 또한 우람한 송아지로 자라나 양축 농가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한 가지 장점은 이들이 브르셀라나 구제역 등의 질병에는 잘 걸리지는 않아 좋기는 한데 겨울철을 나는 동안 먹일 사료가 엄청나게 부족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즉 겨울을 나는 동안에 소용될 축사 건축비나 사료비가 엄청나 양축농가로서는 사료비를 감당하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사실 수입 소는 여름 겨울에 관계없이 너른 초원에서 사계절을 방목하기 때문에 마굿간 시설도 겨울을 날 사료도 필요없기 때문에 비좁은 우리 나라 여건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흑우는 원래 제주 태생이었으나 차츰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흑우는 원래 제주 태생이었으나 차츰 소멸되어가고 있었다.

한편 이즈음(1980년 이후) 제동목장을 비롯한 일부 선도적 양축농가는 육지부에서 한우를 들여와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나라에서도 한우사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한 결과 한우의 수는 더욱 급증하면서 1987년 조사에서는 제주도 내 사육 소 2만7천여 두 중 한우는 12,500두를 차지했고 2002년에는 총 1만여 두 가운데 한우가 4천500두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한우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개량 번식, 고급육 생산 등 한우 산업의 경쟁력 강화가 절대 필요했지요.

그러나 제주도는 육지에 비해 우량 방목초지 점유율이 떨어져 결국 필수 사료인 목초가 부족한 것이 커다란 장애로 나타나서 사양 관리에 결정적 악재가 등장한 것입니다. 더하여 축산물 수입 자유화에 대비해 수입 소고기와 가격 경쟁에 이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한우로 키울 경우 육질 개선으로 고급육을 생산하고 맛이 차별화를 이룩해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를 극복하는 데는 제주의 청정 환경을 부각시켜 육질의 고급화된 브랜드를 만들고 이러한 판매 전략을 잘 짜야 하고 수입소와의 육질 경쟁에서 이기는 사육 기술 보급이 전제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밖에도 고급육 생산 공장의 시설을 현대화하고 1일 도축량도 지금의 3~5두에 그친 소비 시장을 넓혀 30두 이상의 도축 시설을 갖추어야 농가의 한우 사육량도 크게 증가시킬 수 있고 한우 사육에 전념하게 되므로 한우 사육 증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설 확장이나 도민의 육식 소비량을 늘리는 일이나 다른 지방으로 소비 지역을 확대하는 마케팅 전략이 구체적으로 뒤따라야 함은 재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처럼 축산물 도소매 시장의 확대는 양축 농가의 지원이 축산 농가를 늘리는 결과가 되고 당국은 이를 적극 지원해야 될 입장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97년 통계는 축산 농가가 2/3으로 줄어들어 이 상태가 계속 되면 한우의 미래는 없는 것이 됩니다.

이를 극복하려면 정부 지원의 확대가 절대 필요한 것이지요. 한 가지 방법으로 양축 농가 감소를 막는 길은 2천평 이상 감귤을 재배하는 농가에게는 수입소 대신 한우로 바꾸어 10~20두를 기를 수 있는 축사를 당국이 지원해주면 한우 농가도 늘어나고 그들 농가에서 발생한 퇴비는 훌륭한 비료가 되어 당도 높은 감귤을 생산할 수도 있고 축산 사업도 활성화되는 지름길이 될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런 나의 생각과는 반대로 축산 관계 당국이나 농협, 전문 교수, 축산 관계 단체에서도 수입소만 장려할 뿐 다른 대책이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너무도 답답해서 북군 고두배 축산과장을 만나서 하소연했더니 당국이 일선 현장의 소리를 안들어주니 도청으로 가서 따져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도청에 가서 김추영 식산국장을 면담하고 축산농가의 의견을 수용해줄 것을 요청했더니 그는 행정당국이나 축산 관계 기관, 전문 교수, 심지어 축산 단체에서도 수입소 사업 지원만을 주장하고 한우 증식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니 별다른 지원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도 화가 나서 “나는 한우 7마리를 육지에서 사들여와서 잘 키우고 있다는데 왜 안되느냐”며 박차고 나오려니까 김국장 왈 “어떻든 도 차원에서라도 방안을 강구할 터이니 소나 잘 키워 성공해보라.”며 오히려 격려를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생긴 후 제주도 축산 관계과에서도 한우 농가에 관심을 가져주면서 제주도축산시험장에서도 한우 연구 프로젝트가 짜여지고 제동목장도 한우 증식에 참여하고 농가에도 일선 담당관이 드나들면서 애로사항을 듣고 한우 농가를 도와주는 체계로 선순환의 정책 전환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2001년 3월의 일로 기억됩니다. 한갑수 농립부장관이 초도 순시차 제주에 내려왔었지요. 제주시 갑구 장정언 국회의원과 농수산부 축산국장을 대동하고 오셨고 김호성 부지사 그리고 4개 시군 농축산 과장 그리고 축산농가 대표 등 200명이 모인 자리에서 저는 전국한우협회 제주도지회장으로서 제주 축산 애로 사항 등을 대표 발의하게 되었지요.

저는 평소에 생각했던대로

첫째, 제주가 청정지역이라는 점을 널리 부각시켜 각 읍면별로 한우 송아지 생산기지를 만들고 지원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둘째, 외국산 소와 한우 사이에서 생산된 교잡우나 외국산 소는 제주 풍토에 적응이 되기는 하지만 겨울나기에 어려운 문제가 있고 쇠고기 수입이 개방될 경우 한우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에 한우 농가가 소멸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런 사태를 국가에서 막아주어야 합니다.

셋째, 제주의 청정지역에서 한우가 생산하는 송아지는 최고의 육질을 보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홍보하면 제주는 ‘세계적인 한우 송아지 생산기지’로서 명성을 얻을 것이므로 이 사업을 장관님이 적극 도와주실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한 장관은 청정지역 제주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되는 송아지 생산기지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되면 반드시 성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며 이 사업의 성공을 위해 일천억원을 지원해주겠다는 답변을 주셨지요.

어찌나 기쁘고 감사했던지 그 ‘한우 송아지 생산기지 건설’의 꿈이 언제 실현될 것인지 어린 애 소풍 갈 날 기다리듯 목을 빼고 2~3년을 기다려도 장관의 약속은 그야말로 공약(空約)으로 끝나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 약속했던 지원금 어찌됐나요. 도지사나 행정 실무 당국자는 지원금의 행방을 알아보기나 했을까요. 국장도 모르고 도지사도 모르는데 제가 어찌 알 수 있나요. 생각컨데 아무래도 빽좋은 어느 도지사나 수단좋은 어느 도의 축산국장이 천억짜리 돈뭉치 움켜쥐고 ‘쌈박질’ 하면서 갈기갈기 찢어 가져갔겠지요.

제주도는 도세가 꼴등이라 그런 싸움에서는 팔짱 끼고 멀찌감치 서서 꿀먹은 벙어리가 되야 신분이 보장되거든요. 요망지게 따지고 들었다가는 눈덩이가 빠지거나 코피가 줄줄 흐르겠지요. 아니면 장님처럼 귀머거리처럼 천정만 바라보아야 건강에 좋겠지요. 저는 그래도 한 가지는 소득이 있었지요.

제가 한우 육성의 깃발을 들고 동네방네 떠든 덕에 제주 한우의 씨앗은 결국 와흘 촌놈 양치복이 만든 작품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 정도의 수확은 장관 덕에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도 10년 전쯤 그러니까 2003년 8월 하순 제가 한우협회 제주도지회장을 맡고 있을 때 장정언 의원님을 만났을 때 송아지 생산기지 지원금을 어쭈어 보았더니 “아쉬워이, 정말 아쉬워이” 하는 말만 하니 더이상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그즈음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2003년 8월 22일 한우협회 제주도지회장이 주관하는 ‘제주한우산업 활성화 토론회와 시식회’가 제주대학교에서 열렸죠. 이 자리에는 김경택 제주부지사와 남호경 전국한우협회장, 강상헌 제주농업시험장장, 강용권 제주축협장, 김영훈 남제주축협장 등 100여 명이 참석했는데 저는 인삿말을 통해 수입소의 교잡우가 많이 사육되어 왔으나 90년대 말부터 수입소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맛의 차별화, 식품안전성 등을 담보할 수 있는 한우 사육을 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보고 현재 한우는 70% 이상 사육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김경택 부지사도 축사에서 “옛부터 소는 우덕송이라고 해서 소는 주인을 위해 모든 일을 다해 일하고도 나중에는 뼈와 고기까지 바치는 아주 덕스러운 가축으로 불리어온다고 밝히고 앞으로 제주한우 사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양축 농가의 노력이 필요하고 도 당국에서도 적극적인 지원도 하고 가축질병 방역에도 힘쓰겠다.”고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남호경 회장님도 외국산소 수입을 반대하는 이유는 이미 새로운 외국소의 질병을 함께 들여온 결과가 되어 더욱 걱정스럽다고 말하고 한우의 유통 투명성이 확보되어야 소의 질병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 날 현우범 제주도 축정과장님은 “제주 한우 산업 활성화 방안으로 2010년까지 사육기반, 한우입식, 개량 및 증식, 조사료 기반, 초지 관리 등 18개 사업에 천백억 원을 지원해 10만 두의 한우를 증식해 연간 3만5천 두의 송아지를 육지로 공급할 계획도 밝혀 우리 축산 농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 날 행사에 동참했던 전북대학교 백동훈 교수님도 한우 개량과 소 육질 고급화 노력이 절실하며 제주에는 흑한우를 브랜드 상품으로 특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이 날 토론회에는 저희 한우협회가 마련한 한우 특상 등급 숯불구이로 참석자들 전원을 푸짐하게 대접하는 행사도 이채를 띄었고 칭찬과 격려를 받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무튼 전국한우협회 제주도지회장을 맡기 전부터 나의 축산미래 건설 구상이라고 할지, 아니면 제주 축산 발전을 위해서는 축산업에 대한 일대 변화와 혁신을 통한 개혁이 없이 제주 축산의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사업이 성공하려면 소신을 가진 축산 공무원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일선 현장에 대한 축산 현안을 미리 파악하고 도와주는 국가의 적극적 보호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공무원의 탁상 공론, 탁상 행정의 소극적 자세를 바꾸어 현장에 나타나 축산 농가와 함께 연구하고 도와주는 자세와 소명 의식의 개혁 그리고 관에만 의존하려는 우리들 일선 양축 농가의 반성과 자기 사업에 대한 적극적 연구가 있어야 제주 축산의 미래가 열린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기는 배움이 부족한 저에게는 항상 노력하지 않으면 결코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어서 언제나 더 일하고, 더 생각하고, 나의 주변을 항상 보살피며 살아가야 결국은 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늘도 제주 축산 현장에서 부지런을 떨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가끔 ‘높이 올라 멀리 보라’는 명구가 생각납니다. 내 주변, 우리 집 일만 생각하면 나는 굶지 않고 살아남겠지만 우리 동네, 우리 사회, 우리나라의 미래는 높이 올라 멀리 보아야 튼튼한 미래가 열린다는 경구가 아닐까요. 특히 공무원은 바닥 민심을 살피고 모든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야 하겠기에 밑바닥을 살피는 일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축산 제주의 꿈 과연 실현될까

- 제주도지사에게 건의

한갑수 농림부장관이 지난 2001년 3월 제주도 초두 순시 중에 저는 제주 축산인을 대표하는 자리에서 장관에게 제주 축산 현황을 간략히 설명하고 특히 제주가 축산 산업의 적지이기 때문에 이러한 청정 환경 아래서 정부가 조금만 밀어준다면 반드시 축산국으로 발전하는 나라의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며 외국산 소 수입이 설사 개방된다고 해도 충분히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청정 제주 지역을 ‘한우 송아지 생산 기지’로 지정해주시고 정부의 대폭적인 축산 지원을 요청드린 바 있었고 장관님은 이에 대해 제주에 1천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흔쾌히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저는 잔뜩 기대를 했지마는 이후 몇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서 기다리다 지친 저는 최후의 몸부림으로 제주도지사에게 축산 정책 일반에서 느끼는 애로와 도정의 지원을 요청하는 간절한 건의문을 제출하였는 바 그 건의문의 질의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습니다.

① 이날 2010년까지 1,100억원을 송아지 생산기지화 사업에 투자해서 제주도에서 년 10만 두를 생산하여 한우 관련 브랜드 사업을 추진할 것이라 굳게 믿었는데 현재에 이르러 지방비로만 한우 생산 기지화 사업이 추진되는 것에 대한 이유에 대해 그 내용을 밝혀주시고 2006년 지방비로만 6,152백만원을 투자하였다는데 이 돈이 과연 한우 사업에만 투자가 된 것은 확실한 것입니까.

② 제주도에는 읍면별로 공동목장이 75개가 운영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공동목장을 이용한 방목 중심의 축산이 경영비를 절감하는데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재 많은 농가가 개인 축사에서 사육 경영비가 40% 가량 더 쓰고 있는데 그 해결책이 어떤 것이 있는지 또 공동목장에 대한 지원은 무엇이 있는지요.

③ 답변서에 보니 자연종우가 유전능력이 떨어지고 불량인자 및 근친 번식 등의 피해가 있다고 밝히셨는데 제주도에서 보증하며 다른 시․도 종모우만큼 우수한 종모우를 생산해본 적은 있었습니까. 먼저 농가에서 쓰고 있는 종모우에 대하여 유전능력을 검증해보는 것 또한 우선적으로 검토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제주도가 방목형 축산을 해 나가야 한다면 방목형 축산에 맞는 종모우에 대해서도 연구는 어떻게 진행하실건가요.

④ 또 인공수정이 낫다고 하면 방목형 축산을 할 경우 어떻게 해야 수정을 쉽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제주도에서는 한우 우수 농가 선정시 한우 농가에 대해서만 지원하는 것으로 아는데 젖소 및 교잡우 사육 농가에도 함께 선정한 이유와 자연교배 농가가 지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자연교배 송아지는 한우로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⑤ 축제행사시 투우대회 시행 요망에 대하여

제주도 축산 사업을 알리기 위해서는 진흥대회가 가장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며 이 대회에 많은 이벤트 행사를 첨가하면 제주도민 뿐만 아니라 육지부 사람들에게도 인식시켜 관광산업까지 연결할 수 있는 사업이 되므로 이런 방향으로 추진할 의향은 없으십니까.

⑥ 번식우 부분, 송아지 부분, 비육우 부분, 투우행사 등에 대하여

번식우 및 송아지 부분에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인공수정과 자연교배를 비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되며 비육우 부분은 생소할뿐 아니라 도축 후 육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반인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시킬 수 있는 행사를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투우 행사에 참가하는 소의 경우 입상 및 챔피언이 되면 경상남도청이나 타 시도에서는 상당한 금액에 거래가 되고 있으며 농가에서는 그를 이용한 수익이 높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투우 행사는 한우협회에서 몇 해 전부터 사업 추진 계획서를 도청 축정과에 올렸으나 받아주지 않다가 2005년에 추진한다고 하였다가 다시 묵살하였습니다.

이런 아이템은 한우협회 및 농가와 다시 토의를 하면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지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⑦ 끝으로 농가에서는 축산 발전을 위한 당국의 노력을 귀 기울이는데 반해 공무원들은 너무 안일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 같습니다. 선진 축산이 나은 것은 그곳의 실정에 맞게 변화 발전시켜 농가와 공무원이 합심해서 모두 노력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 제주도는 선진 축산을 그냥 도입하여 그 정책에 환경을 맞추려 하니까 효율성이 떨어지고 있는 현실이며 선진 축산의 결과를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것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변화시켜 농가에 보급해야 하는 것은 담당 공무원의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쉽고 농가가 생각하고 실천하는데 도정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는 현실에 가슴 아프고 이대로는 축산에 희망이 없다는 것은 축산인 누구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라도 농가와 공무원이 한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니 지사님께서 축산인들의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시기 바랍니다.

※ 그러나 이러한 저희 축산 농가의 건의사항은 어떤 회시도 받지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 뿐이지요.

◇ 4각모를 쓰고 대학 문을 두드리다

- 농과대학 입학

20여년 전 저는 제주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이렇게 4각모 이야기를 써놓고 보니 정말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사실 저는 농과대학에 정규 과정으로 입학해서 4년간 공부를 한 진짜 대학생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정규 학력은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살아오면서 못배운 것이 한이 된 적이 너무도 많았고 더 많이 배우고 싶었던 소위 향학열은 성년이 된 후에도 더욱 뜨거웠지요. 그러나 변명같은 말이지만 저희 집안 환경이나 제가 소 키우는데 매달려야만 소득을 올릴 수 있고 소장수 일도 열심히 뛰어다녀야 생활비가 생기기 때문에 중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대학에 들어가 사각모를 쓴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어서 학교 문을 두드릴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았습니다. 학교 얘기가 나오면 고개를 모로 틀고 말았지요.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모로 틀고 관심을 끊어버리려고 해도 그 곳에 대한 동경은 결코 가슴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학교 진학 문제는 생각할 시기가 훨씬 지나쳐 장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무슨 공부를 하겠습니까. 그저 내 팔자가 그런 것이려니 하고 까마득히 잊어버렸는데 어느 날 신문 광고를 보니 ‘제주대학교에서 최고 농어업인 경영자 과정을 설치해서 지망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소문해보니 중고등학교 과정을 밟지 않더라도 자기 사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에게 학문적 이론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주는 1년 교육 과정이 시행되는데 입학하고 공부를 마쳐 졸업할 떄는 박사님 쓰는 사각모자도 쓰고 1년 동안 전문교수님들로부터 자기 사업 분야에 대해 학술적․이론적 논리를 확실하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못배운 것에 대한 ‘한’이 어느 정도 풀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또 대학교 교수님들로부터 훌륭한 전문교육을 일년동안 받을 수만 있다면, 그래도 고등교육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강의내용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대단한 자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습니다.

1989년 3월 입학식이 열렸지요. 참 그 입학식 날 제가 느꼈던 감동은 글로 다 쓸 수가 없겠지요. 제가 선택한 학과는 농과대학 최고농어업경영자 과정이었는데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20여 명의 신입생들이 함께 들어왔는데 나이가 대부분 저와 얼추 비슷한 장년인 분들이 절반 정도쯤 되고 아주머니같은 여사님들 몇 명 보이는 데 말은 서로 하지 않았지만 생각컨데 모두 저와 비슷한 마음 고생을 하면서 자기 사업에 몰두하다보니 제 연령에 대학을 못갔던 분들이 입학식에 참석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나와 비슷한 고달픈 삶의 역정을 지내온 분들인 것 같아 갑자기 동료가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이들과 정말 마음을 함께 하는 대학 생활을 하려고 결심했지요.

그런데 최고경영자 과정의 교육기간은 1년 밖에 안되고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등교해서 두 시간 정도 교수님 강의를 듣는 것으로 과정이 짜여져 있는데 학문적으로는 어쩐지 모르겠으나 일선 현장에서 축산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온 저에게는 교육 내용이 너무 동떨어져 기대감이 떨어지고 탁상 교육으로 끝나고 현장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 내용은 없어서 점차 실망감이 쌓여갔습니다.

물론 내가 기초가 너무 부족해서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교수님의 축산 분야 강의는 사육 농가의 생각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교육생들의 한결같은 여론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책상 물림의 공부는 현장 실무에서는 괴리가 너무 커서 교수님도 현장의 애로나 개선점 혹은 개정할 점 등을 면밀히 파악해서 교육하지 않으면 소기의 교육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크게 실망한 면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이론적으로 새롭게 얻는 지식은 많았지만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업 애로는 교수님 자체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 과를 담당하는 교수님이 달랑 한 분으로 정해져서 교육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송아지의 사육관리 요령이나 질병예방책, 사육 기술, 비육우 사육 요령 등은 책에서 얻은 지식만으로는 절대 우리 현장 축산인에게는 만족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간간히 대학장 유장걸 박사의 특강이나 학생 입장에서 현장 사육 사례 등을 발표해 다양한 간접 경험과 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되었던 것도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고 졸업 논문 작성 요령도 깜깜 절벽인 벽창호에서 일반적 논문 형태를 잡고 써가는 요령을 어느 정도 습득한 것도 대단한 경험이었음은 저의 어두운 까막눈을 새롭게 뜨게 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생각하며 이 과정 입학을 추천해주신 한동휴 전 제주 축산 시험장장님의 배려에 새삼 고마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쨌거나 1년간 열심히 쫓아다닌 결과 1990년 2월 22일 졸업식에서는 농과대학장 유장걸 농학박사님으로부터 학업 우수상을 받고 정치학 박사, 조문부 총장님으로부터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뻤던 것은 나의 세상의 소원이었던 멋진 학사복에 사각모를 턱 쓰고 독사진도 찍고 동기생과 얼싸안고 졸업의 영광을 함께 했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감투가 턱하고 씌워졌습니다. 이 과정을 마치자마자 총동창회장 김광선님으로부터 이사로 임명받는 혜택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도 없고 또 학문에 목말랐던 많은 동료들과 한두리에 묶이는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 새마을 운동은 나에게는 새마음운동이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무엇인가? 이름 그대로 옛부터 살아온 터전을 새롭게 가꾸고 다듬어서 현재의 고리타분한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새마음 새결심으로 새로운 동네를 만들자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저는 1980년대에는 제주시를 줄불나게 드나들며 소를 팔고 사는 소장수로 한눈 팔 겨를이 없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동네마다 잘 살아보자는 선전 광고물이 나붙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구경꾼이 되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얼마간 세월이 흐르다보니 ‘새마을’이 나를 완전히 감싸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지요.

동네에 걸어놓은 스피커에서는 아침 새벽부터 “초가집도 고치고, 마을길도 넓히고 잘살아보세~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 하는 노래가 넘쳐났습니다. 저는 새벽 3시면 깨어나는 것이 체질화된 터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익숙하고 좋은 내용이어서 싫지는 않았지만 목장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올 때 쯤이면 이 노래로 잠이 깬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비좁은 동넷길을 다듬고 쓸고 난리굿을 치는데 모두의 얼굴이 노래의 내용처럼 환하게 밝은 것을 보면서 朴대통령이 음악대학을 나온 군인었던가 하며 지나쳐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집 골목을 들어서니 여느 때와는 달리 모든게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이런 것이 새마을 운동인가 하고 심드렁하게 지나쳤는데 그럴수록 기분이 좋아져갔습니다.

고윤호 이장님이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주민들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요즘 들어 동네 좁은 골목길 넓히느라고 서류 뭉치를 들고 자기 땅을 동네길로 내놓겠다고 하는 각서에 집주인이 도장을 찍는 작업이 계속 되면서 고이장님도 칭찬을 많이 받기도 하지만 그런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애로가 많이 있는 것 같고 고통이 말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지난 1991년 3월이었는데 느닷없이 북제주군 새마을운동본부에서 통첩이 왔는데 저에게 새마을운동 지도요원 교육을 중앙새마을연수원에 올라가서 받고오라는 통지서가 나왔습니다.

어딘 령이라 거절할 수도 없었지만 교육을 받아서 손해볼 것도 없을 것 같아 제주도에서 선발된 몇 분이 중앙연수원 본부에 가서 1991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3박4일간 새마을지도요원 교육을 받았지요.

당시 연수원에 입소할 때는 제가 초등학교만 나왔기 때문에 강의가 어려우면 어쩔까 하고 걱정도 되고 긴장하기도 했지만 또 닥치면 그 때에 알맞게 적응하면 되겠지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연수원 문턱을 들어설 때는 초등학교 입학할 때처럼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저희 팀은 오후 2시에 연수원에 도착해서 등록을 마친 후에 생활반을 배정받고 연수복을 갈아입고 보니 꼭 논산훈련소 입소 첫날처럼 생소했지요.

저희 반은 20명으로 편성됐는데 곧바로 강당에 모여서 연수생활기록부와 입교 소감을 쓰고 입교식에 참석했습니다. 곧이어 입소식 후에는 연수원을 소개하는 비디오가 상영되고 연수에 임할 생활 요령이 소개되었고 간단한 오락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 식사도 함께 하고 긴장감을 풀어서 서로 친숙해지는 프로그램도 진행됐지요.

연이어 강당에 모여 분임토의 안내를 받고 우리 반 분임원은 서로를 소개하고 즐겁게 교육을 받을 것을 약속하고 침소에 들었는데 한참 자는데 새벽 6시가 되니까 ‘새벽종이 울렸네’ 하는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오자 즉시 기상해서 인원을 점검하고 국민의례와 생활신조를 제창하고 운동장을 도는 가벼운 운동을 하고 역사관도 보고 녹색체험관도 보았는데 곧바로 아침 식사로 연결되었습니다.

8시부터는 조회가 시작되고 명상의 시간을 진행하는 가운데 심성 계발에 도움이 되는 좋은 말씀이 방송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이어서 연수생들의 경험 교환과 소감, 다짐, 결의를 다지는 개인적인 발표의 기회가 있었고 주간에는 사례 교육, 강론, 새마을에 대한 이해와 참여동기를 부여하는 시간도 가졌지요. 특히 새마을 성공 사례를 발표하는 지도자들의 경험 발표를 들을 때는 감동을 많이 받았고 애로를 극복하는 과정이 진실로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분임토의시간도 전 시간에 받은 교육 내용에 대한 감상을 서로 교환하고 새롭게 느끼는 경험을 기탄없이 얘기하는 시간도 많이 가졌지요. 강의 후에 서로의 소감을 발표하는 것이 더 큰 참고가 되기도 했지요.

이런 교육 시간은 심성 계발 프로그램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론 교육 끝에 서로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지요. 참으로 많은 것을 듣는 기회가 되고 몰랐던 것 체험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고 터득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수료식 전날 밤에는 교수단과 연수생 전원이 모여 과정별 분임토의를 하고 배운 것은 귀향한 후에 현지 주민에게 전수할 것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수료식 전에는 연수 결과에 소감을 작성하고 수료식에는 원장님의 수료식의 의의를 강조하고 연수생은 지금까지 배운 것을 바탕으로 새마을에 앞장 서는 일꾼이 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3박4일의 전 과정은 끝이 나게 된 것이지요.

고향에 돌아와서는 새마을에 관한 역사를 조금은 알아야 되겠다 싶어 북군 새마을과에 들러 여러 가지 새마을 간행물을 빌리거나 얻어다 읽으며 그동안 내가 너무도 모르고 무식하게 살아온 것을 크게 반성하게 됐지요.지금까지 저는 내 생활에만 관심을 두고 마을공동체 발전이나 의식개혁 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제주도에 관심을 가져 5·16 횡단도로를 뚫어 포장해주기도 했고 어승생 수원지를 만들어 봉천수에 의존했던 우리가 수돗물을 먹게된 일이며 국가가 앞장서 도로포장공사를 지원해서 우리 동네로 오는 도로가 주민 생활에 큰 불편을 없애주게 된 것을 알게 되었고 비로소 대통령이 우리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해왔던 점도 알게 되었지요.

그 뿐만이 아니지요. 땅 속 깊이 흐르는 지하수 착정 기계를 특별히 수입해서 제주도에 지하수 개발 사업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도 알게 되면서 정말 한 사람의 지도자가 이렇게 국민 생활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이런 기초도 모르고 지내온 제가 부끄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박대통령은 남쪽 나라 제주는 밀감원을 조성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밀감 식재를 권고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제주도 전체 밀감원은 90헥타르에도 못미치는 소규모 과수원이었지만 1970년도 이후에는 300~400배로 늘어 30년 동안 밀감 산업은 제주 제일의 소득 작물이 되어 제주도민 40만 명을 먹여살리고 자녀들을 대학으로 진학시킬 수 있는 「대학 나무」라고 할만큼 유명한 밀감 고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박대통령은 국민소득을 높이고 환경을 개선하며 도시와 농촌을 살리는 희망의 빛 ‘새마을운동’의 단초를 열어준 것이라고 합니다.

1970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손수 ‘새마을노래’를 작사·작곡하고 전국적인 새마을 운동을 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킨 것이고 비좁은 골목과 농로를 넓게 펴고 마을 환경 개선, 변소 개량, 청정바다 만들기 등 우리 생활 주변을 깨끗이 다듬어 사람이 사람답게 먹고 편히 살 수 있는 소득원 개발, 도시공장 새마을 사업까지 세세하게 다듬어 생산성과 능률을 배가시킴으로써 국민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박 대통령은 중앙에 새마을연수원을 개원하고 각 시도 새마을 사업을 지도할 지도자를 계속적으로 양성하면서 각 지역의 특수작물 재배, 농촌진흥원을 통한 종자 개발, 특수작물 기술 연구 등을 통해 주민소득을 증대시킨 결과 짧은 기간에 빈국에서 탈출하여 수출입국의 길을 터놓았고 1960년도 국민소득 60불에 그친 나라는 1964년 1억불 수출을 달성하고 해마다 수출실적 5백억불 천억불로 늘려갔다는 것입니다.

그간 새마을중앙연수원에는 외국의 농어업 관계 장·차관들 혹은 실무 국·과장들이 스스로 방문하게 하여 길게는 보름, 짧게는 하루동안 새마을 연수에 참가하였고 이 내용을 귀국 후 자국 산업에 적용하는 사례가 빈번하였으니 1980년부터 지난 해까지 모두 70여개 국가 고위급 농·어업 관계 외국 공무원 3,500여 명이 우리 연수원을 견학하고 새마을 학습방법을 배우고 돌아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마을 사업이 시작된지 20년 그간 우리 새마을에 몸담아 헌신했던 선배는 120만 명을 넘고 이 분들이 새마을 회원들이 전국 각지 새마을 조직에 참여하여 희생과 봉사와 자조를 신조로 삼고 고향과 읍면, 시군의 발전에 몸바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세계에 널리 이름을 알린 새마을 운동이고 이것이 앞으로도 세계인을 복지마을 복지도시로 만드는 모범조직의 표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이미 1970년 이후에는 북한보다 주민 소득을 앞질러 비로소 북한과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한 첫걸음으로 우리나라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씨가 비밀리에 북한 김일성을 만나 남북 협상을 하고 돌아오는 역사적 사실 배경도 알게 되었습니다.

나도 이 나라 백성으로서 고항에 돌아가면 더욱더 내 고장 발전에 보탬이 되는 지도자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지도자 연수교육을 마치고 돌아와 미력이나마 봉사 활동에 헌신하는 길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하기는 지난 1984년 8월에는 새마을운동 북제주군 이영춘 지부장께서 새마을문고에 조금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장을 받은 일이 있으나 이것은 새마을 정신에 비춰보면 너무나 작은 기여라고 생각하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고향에 돌아온 후 우선 주민의 소득 증대에 도움되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고 고윤호 이장님이 계획하고 추진했던 감귤선과장 150평을 마을에 만들어 감귤 농가의 편익을 도모하고자 했는데 이런 사실은 사료 공장을 운영하는 윤태현 의원의 정신적 물적 지원을 받았고 북제주군의 특별한 지원을 받아서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마을지도자 교육을 받고 돌아온 후 나의 행동은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옛날에는 나의 사업 계획이나 동네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자신감을 가지고 매사를 강력하게, 소신있게 추진하는 경향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남의 눈치 보고 다른 사람들의 반대 의견을 듣고 이 의견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식견이 생겼다고 할까요. 그래서 상대를 설득시키는 힘이 부쩍 늘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최종 판단과 결단은 자신의 주장을 과감히 포기하거나 상대방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하는 것이 전체를 포용하는 데 큰 무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리더십은 새마을연수원에서 습득한 여러 교수님들의 가르침 덕분이기도 했지만 제가 먼저 우리 앞에 던져진 과제에 대한 다양한 애로나 문제점, 사업성, 장래성, 타당성을 미리 파악해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는 것과 모든 것을 국민 소득 향상과 국가 발전 목표에 접근시킬 수 있어야 주민 동의를 쉽게 얻어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새마을 사업은 주민 소득 향상과 분배 경제 발전과 국가 발전이 전제된 상태에서 국가의 강력한 지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짧은 시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산업사회가 되고 경제개발계획이 모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믿기 때문에 나는 이제 새마을을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나라가 힘차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잠자는 국민들을 깨워 자신있게 전진하는 근면한 풍토를 만들어준데서부터 개발도상국가로 발전할 수 있게 됐다고 믿고 박대통령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우리나라 역사에 많이 출현해줄 것을 기원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새마을운동’에 참여한 기회를 주신 관계 지도자님들께 저는 진심 고마운 말씀을 드립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된 것이 있지요. 저는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많은 사람이 말을 해도 그게 무슨 기적인줄도 모르고 있다가 독일이 짧은 기간에 강국으로 발전한 것을 두고 한 말이 우리나라 「한강의 기적」으로 자연스레 비유되어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참으로 내가 아는 것이 너무도 없구나 하고 스스로 반성하기도 하고 부끄럽게 느끼기도 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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