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운, 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5)첫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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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5)첫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10.31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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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비(初雨)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오늘은 왜 이렇게 늦었어요?”

“보시다시피 비가 내리잖아요. 이리저리 홍수를 피해 오느라 겨우 겨우 도착했어요.” 사무실에 들어서면서 여장학관과 마주쳤다.

오늘은 올해 들어 두 번째 비가 내렸다. 이틀 전에 첫 비가 내렸다. 일곱 달만의 비였다. 작년부터 치면 거의 열 달만의 비였다. 저녁 때 천둥 번개가 치더니 이윽고 빗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리였던가. 읽던 책을 옆으로 밀치고 창문을 열었다. 반시간은 빗소리에 빠져들었다. 잿빛 하늘 끝자락에서 쏟아지는 가

교육부 고위직원 장학관들과
교육부 고위직원 장학관들과

늘고 긴 빗줄기는 긴 생명의 물길이었다. 멀리서 온 님인양 벗인양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빗속을 걷고 싶었다. 비에 흠뻑 젖으면 어떠랴. 걸어서 20분 거리의 성당으로 향했다. 저녁 미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돌아오는 길 역시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빗소리는 모짜르트의 천상적 음률 같았고, 비에 젖은 땅과 흙과 모래는 황톳빛 장미향을 내뿜고 있었다. 두텁고 짙은 흙냄새, 정겨운 고향 냄새였다. 비의 감촉은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친구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따뜻하고 선선했다.

이곳에 와서 한 해가 지났지만 우산을 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쏟아지는 폭우에도 우산을 쓴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일 년에 두어 차례 내리는 비 때문에 그들은 우산을 준비하지 않는다. 나도 지금까지는 그들처럼 비 맞으며 살았다.

오늘은 출근하려는데 바로 비가 쏟아졌다. 큰 비여서 그런지 길은 온통 물바다였다. 흙탕물이 온 시내를 휘감고 있었다. 가다가 돌아서서 다른 길로 우회하기를 대여섯 차례 하고서야 사무실 500미터 앞까지 접근했다. 그런데 더 큰 물바다가 길을 가로막았다. 하수 시설이 거의 없으니 작은 비에도 온통 모래와 돌과 쓰레기와 각종 축산 분비물과 오폐수가 혼합되어 지독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오물과 쓰레기가 뒤엉켜 있으니 감히 물속에 발을 담구고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출근을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오던 길을 되돌아서 다시 처음부터 먼 길을 돌아 겨우겨우 사무실에 도착했다.

두세 명의 직원만 출근해 있었다. 20분 걸리던 출근길은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나는 공직 생활을 40년 가까이 하면서 결근한 적이 없었다. 총각 시절 지독한 독감에 하루 쉰 적은 있었다. 출근은 나의 생활에 신앙과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그 정신이 아직 이 아프리카에서도 남아 있었던 것일까?

유아교육국장(오른쪽에서 세번째)및 직원들과
유아교육국장(오른쪽에서 세번째)및 직원들과

어려움과 장애가 있더라도 자주 자주 비를 보고 듣고 만지고 싶다. 말없이 뜨거운 태양보다, 살랑거리면서 신비한 미소를 흩날리며 내리는 비야, 하루걸러 내리면 어떠랴! 자주 내려다오. 이 육사 시인의 청포도처럼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니 온 몸을 듬뿍 적시면 어떠랴!

우리는 첫 눈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많다. 첫 눈 내리는 날의 약속과 만남이 그러하리라. 세네갈에선 유사 이래 눈 내린 적이 없으니, 내년엔 첫 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져보면 어떨까!

생일 이야기

“존 듀우프! 회의실로 잠깐 오세요!”

“무슨 일이예요?”

“별일 아니예요. 와 보면 알아요.” 국장 비서인 마담 자이가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존 듀우프는 나의 세네갈 이름이다. 듀우프는 국장의 성이고 존은 한국에서는 요한으로 나의 세례명이다. 이 곳 이름으로 아주 적절해 보여서 그렇게 정했고 직원들은 그들로서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 영운 대신 존 듀우프라고 부른다.

회의실에 들어서자 전 직원이 모여 있었고, 케익과 음료수와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어서 ‘해피 버스데이’ 축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뜻밖에 우리 유아교육국 직원 모두가 모여서 생일을 축하해준 것이다. 놀랍고 감격스러웠다. 이런 생일 행사를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직원들의 아주 특별한 배려였다. 나는 선물 받은 전통 문양이 들어간 남방셔츠를 입고 케익과 음료수를 나눴다.

나는 지금까지 이십 여명 되는 모든 직원의 생일에 축하 카드를 쓰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아주 작은 선물인 기능성 치약을 예쁘게 포장하여 축하해 주고 있었다.

나는 한국에서 학교 경영자로 근무할 때 선생님들의 생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부임하면 우선 선생님들의 생일을 양력으로 파악한다. 작은 학교일 땐 쉬웠으나, 교직원이 백 명 가까이 되는 학교에 근무할 때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체국에 분기별로 가서 경조카드 예매하다 보니 우체국 창구 직원과 친해지기도 했다. 물론 비용은 개인 부담이다. 처음에는 배우자에게도 보냈으나 조금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어, 나중에는 선생님과 직원 본인만 축하했다. 또 제주외국어고등학교에 근무할 때는 모두가 기숙사 생활을 하기 때문에 전 학생에게 개인별 생일 축하 손 편지와 선물을 특별히 마련하여 한 달에 한번 있는 생일 축하 일에 일일이 전달하곤 했었다.

정년퇴임하는 마마두(   )및 고위 장학관들과
정년퇴임하는 마마두(왼쪽에서 두 번째 )및 고위 장학관들과

저녁 때는 마마두 부부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지난 12월 31일 38년의 교직을 마치고 정년퇴임했다. 초등학교 교장을 오래하다 장학관으로 교육부에서 일을 해왔었다. 성격이 너그럽고 상냥해서 나와 호흡이 잘 맞는 친구였다. 그런데 퇴임하는 날 너무나 썰렁했다. 아무런 의식도 행사도 없었다. 내가 점심을 대접한 것이 전부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교육국장과 아주 간단한 퇴임 인사를 나누었다고 했다.

나는 그와 오래전부터 퇴임축하 부부 초청 식사를 약속했었다. 150세파, 우리나라 돈으로 300원쯤 하는 초만원 버스를 타고 산다가에 도착했다. 산다가는 수도 다카르의 가장 번화한 지역이다. 한 30분쯤 기다리자 그가 나타났다. 부인과 함께 한국 식당 ‘아리랑’으로 갔다. 두 분에게는 고급 식단인 불고기 정식을 대접했다. 젓가락 사용법을 보여주고 김치, 김, 멸치 등 한국 고유 반찬을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나마 그의 퇴임을 축하해 주게 되어서, 텅 빈 마음을 조금 매울 수 있었다.

그는 부인이 두 명인데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결혼하여 독립한 자녀는 한 명뿐이어서 퇴직 후의 생활에 대해서 몹시 걱정하고 있다. 3개월 정도 쉬다가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 했다. 나도 한국의 사정을 설명하면서 한국에서도 퇴직 후 경비원 같은 일자리를 많이 한다고 설명했다. 부부는 전통 샌들을 나에게 생일 선물했다. 가죽제품으로 튼튼해 보였다.

생일, 선진국에서는 ‘자기 축하일’로 개인 공휴일로 지정한 곳들도 있다. 알고 보면 생일은 축하받아야 할 날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불편하고, 건너뛰고 싶은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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