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66 )『제주PEN엔솔러지 19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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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66 )『제주PEN엔솔러지 19집』
  • 김동훈 기자
  • 승인 2022.11.03 2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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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제주PEN엔솔러지 19집』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제주에서 오는 우편물이 코로나 때문에 40여일 걸리던 것이 지금은 항공편 사정이 약간 나

아져서 20여 일만에 오고 있다. 국제PEN 한국본부 제주지역위원회(회장 강방영)가 발행한

『제주PEN엔솔러지19집』이 며칠 전에 배달되었다.

특집으로 ‘베트남 문인협회와 제주PEN의 문학 교류’로 베트남 시인 10명의 작품 18편과

제주 시인 10명의 작품 10편이 한국어와 베트남어로 각각 번역된 작품이 게재되었다.

그리고 제주 회원 시인 30명의 작품 시, 시조, 동시 57편과 수필 9명의 작품 9편, 동화 3명

의 작품 3편, 소설 2명의 작품 2편, 번역과 희곡이 각각 1명으로 1편씩 게재되었다.

다른 때와 다름없이 시 작품만을 소개하기 위하여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5편을 발췌하여 이 글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이태원 압사 사고가 10월 29일 일어나서 156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약 173명이 발생했다.

일본에서도 일본인 사망자 2명을 포함한 이 사고를 시간마다 각종 미디어들이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방영한 ‘이태원클라쓰’ 드라마가 일본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모아서 리메이크로 한일공동 프로젝트로 일본에서 ‘롯뽕기클라쓰’로 방영되었다.

지난 7월 7일부터 9월 29일까지 매주 목요일 밤 9시부터 아사히TV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도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그 여운이 채 사라지기 전에 일어난 이태원 압사 사고는 일본의 할로윈 축제와 맞물려서 연일 긴장감 속에서 보도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은 11월 3일 새벽 3시 10분을 넘고 있다. 발췌한 시 5편에 대한 필자 나름대로 그 감상을 쓰려는데 그 의욕보다도 무력감이 앞서고 있다. 고국의 이태원 참사가 머리 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갑자기 엄습하는 상실감 속에 그 감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이다.

외국에 살고 있는 필자의 ‘마음의 공동화(空洞化)’도 이렇게 순간마다 찾아오는데 고국의 국민들 마음은 더욱 쓰라리고 아플 것이다. 필자가 근무하는 가까운 곳에 일본의 지조상이 있다. 한국의 성황당 비슷한 곳이다. 필자는 그곳에서 촛불을 켜서 향을 피우면서 이태원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손을 모아 명복을 빌고 있다. 오늘도 빌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은 구원과 기도의 대상이 왜 하필이면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있는 곳이냐고 비난하고 반문할는지 모른다. 필자의 고향 제주도에는 만 팔천의 신들이 존재하고 있어서 ‘신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필자에게 있어서 지조상은 그 연장선의 하나이다. 그래서 두손 모으고 빌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 5편에 대한 자세한 감상론은 생략하고 게재 순으로 간단하게 소개하고 싶다.

김병택 시인의 <달>이다.

 

높이 떠 있으면서 속속들이

사람들의 그리움을 품은 뒤

구름과 함께 돌아다니는

내 일상의 구석까지 스며든다

 

애써 곰곰이 과거를 되살리면

수평선을 넘으려던 내 꿈을

막은 이유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밤에는

고향 마을의 숲을 가로지르며

새들과 함께 부르던 옛 노래가

긴 음파에 실려 내 귀에 들러온다

 

사방이 둥글게, 크게 흔들려도

휘황하게 뜬 밤 하늘에서는

어두운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쉼 없이 하루 내내 별빛을 덮어

먼 곳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론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까지 달이라면 쳐다보다라든가 우러러보다의 의미에서 객체화 시키는 작품이 대부분인데 이 작품에서는 달이 내려다본다는 주체화와 객체화의 조화 속에서 쓰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은 김순이 시인의 <화나게 하는 여자>이다.

 

화나게 하는 여자

산사 대웅전 앞에 고급승용차를 세워놓고

기도하는 여자는

나를 화나게 한다

음악회에서 우는 젖먹이를 달래며

앉아 있는 여자는 나를 화나게 한다

비련의 영화를 보는 동안

계속해서 껌을 씹는 여자는

나를 화나게 한다

선물을 받자마자

얼마짜리냐고 묻는 여자는

나를 화나게 한다

약속을 어겨놓고 미안하다는 말보다 먼저

변명부터 늘어놓는 여자는

나를 화나게 한다

머리카락을 노랗게 염색하고서

자연스러운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여자는

나를 화나게 한다

아이 앞에서 실은 이 아이는

낳고 싶지 않았었다고 말하는 여자는

나를 너무너무 화나게 한다

 

화나게 하는 것은 여자만이 아니고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화나게 하는 것은 슬프게 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다.

다음은 김용길 시인의 <늙음에 대하여(2)>이다.

 

늙음에 대하여(2)

 

맑은 여름 날 오후

창 앞에 누워

먼 하늘 우러른다

나잇살 헤다말고

혼자 중얼거린다

저 하늘 오르려면

얼마큼 더 나이를 먹어야 할까

 

뒤척거리는 기억의 꿈

하나씩 버리고 이제 남은

뼈다귀 같은 아집(我執)

마음은 뜬 구름에 실려 보낸다

 

저 하늘 오르려면 얼마큼 더 나이를 먹어야 할까에 대한 감상은 지금 더욱 금기어가 되어야 하겠다.

다음은 김창화 시인의 <늙은 병사의 노래>이다.

 

늙은 병사의 노래

 

오늘처럼 눈 오는 날

앳된 얼굴의 군인들을 보면

충성구호를 소리 높여 외치던

나의 병영시절이 생각난다

 

동절기 훈련 눈 쌓인 고지,

교통호 따라 번지는

병사들의 고달픈 외침

전우의 발그레한 얼굴에선

부딪친 함박눈이 녹아내렸고

 

냉기 꽉 찬 OP벙커

곱은 손으로 작전명령의 지도를 펴며

추위 녹이려 수통 속

막걸리를 나눠 마시던

훈련소부터 동기

경상도 사투리 그 전우,

그도 나처럼 백발이 되어

어디선가

병영의 추억을 노래하고 있겠지

 

나이 칠십을 넘은 필자는 오사카 이쿠노에서 외국 생활을 하면서도 반세기 전, 이십대의 아련한 군대시절을 독백처럼 반추하고 있다.

다음은 양전형 시인의 <서귀포 입동 귤밭>이다.

 

서귀포 입동 귤밭

 

귤나무 굽은 등허리에

하늘이 추운 듯 오도카니 앉아 있다

상심한 햇살은

할쑥한 얼굴로 귤밭을 어슬렁거린다

 

방풍 숲에선 이따금

팽나무 이파리 늙은 가을

새앙쥐처럼 이리저리 고개 내밀고

열매의 마지막 숙성을 위하여

하늬바람은 밤낮으로 설레발을 떤다

 

고독할수록 더 반짝이는 그리움 하나

귤향 따라 밀려들고

누군가 내 안에서

회억 속을 한없이 발서슴하는데

하나 남았던 멧비둘기마저 떠난다

떠나는 것들이 많구나 입동 날은 쓸쓸하다

 

빈 농약병 속으로

바람이 잇달아 기어 들어간다

빈 병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듯

부웅부웅 뱃고동 소리를 내는데

밭 구석에 피어 싱그럽게 웃고 있는

때늦은 들국만 고독에 강하구나

 

입동이면 귤들이 노랗게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계절이다. 정성 다한 일년의 수확기를 바라는 기쁨과 즐거움보다 떠나버리는 것에 대한 연민의 정을 품고 관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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