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큰 별 세네갈 ](7)이영운, 까프린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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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큰 별 세네갈 ](7)이영운, 까프린 가는길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12.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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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선생님의 세네갈 해외교육봉사활동 체험기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까프린 가는 길

까프린(Kaffrine), 이름이 너무 아름답다. 오늘은 까프린으로 출장 간다. 중앙 세네갈 땅콩 분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고 아름다운 도시다. 아침 7시 반 택시를 타고 삐긴 가라지로 갔다. 수도 다카와 전국 교통망이 연결되는 종합 버스터미널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사용하는 차량은 쎗쁠라스(Sept Place)다. 불어로 직역하면 7개의 자리라는 뜻으로, 7인승 승합차를 버스처럼 사용하는 특이한 세네갈만의 교통수단이다. 운전기사를 제외하고 7명의 승객이 타면 출발한다. 거의 두 시간을 기다려 손님이 차자 출발했다. 나는 일찍 와서 맨 앞자리 조수석을 차지했다. 위험하지만 이 자리가 가장 편

유치원 교육 현장

한 자리다. 까프린까지는 6시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이 차량은 대개 푸조차다. 오래 전에 프랑스나 유럽에서 사용하던 차량을 이곳에 도입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대부분 몇 차례 폐차를 했어야 할 정도의 험악한 상태로 운행되고 있다. 우리 차는 어린아이가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10명이다. 중간에 휴식할 장소도 없고 화장실 갈 여유도 없다.

오후 4시경 도착해서 호텔로 갔다. 호텔은 방갈로식이다. 방안엔 모기장이 있고 변기는 깨져있다. 프론트와는 전화선도 없다. 비용은 꽤 비싼데, 그냥 최소한의 숙소였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온갖 벌레들이 문틈으로 기어들어 왔다. 10여 마리 이상을 잡고 모기장을 치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둘째 날은 전기도 안 들어왔고 무더위 속에 모기에 많이 물렸다. 프론트와 연결도 안 되고 온 사위가 암흑이니 밖으로 나가 누군가를 찾아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튿날 교육청에서 교육장과 장학사들을 만나 방문 목적과 현황을 알아보고, 내 친구이기도 한 마마두와 함께 유치원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한 가톨릭 재단 유치원은 이태리 출신 수녀님이 원장으로 일하고 계셨다. 비교적 쾌적한 시설에 유치원 운영도 원만해 보였다. 빈약한 수업 자료지만 나름 잘 활용되고 있어 보였다. 또 다른 공립유치원은 원주민 주택 형태의 건물인데, 교실이 한 칸밖에 없다. 한 교실을 세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3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수업하고 있었다. 자료도 공간도 교수방법도 교육과정도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떠나는 날 아침이다. 우선 인근의 큰 도시인 까올락까지 갔다. 차의 운전석엔 모든 전선이 그냥 드러나 있고, 심지어 두 전선을 이어 붙여 시동하고 출발했다. 모든 문은 끈으로 이어서 당겨서 열고 닫는다. 그냥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외관과는 달리 순조롭게 까올락에 도착했다.

그런데 다카까지 가는 차들은 진입하면 벌써 사람들이 이미 좋은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다. 너무 고통스러운 마지막 열 좌석밖에 없다. 결국 나도 뒷돈을 주고 편한 조수석을 얻어 탔다. 출발은 순조로웠으나 두 시간 쯤 가다 갑자기 차가 멈췄다. 엔진에 물을 쏟아 붙고 냉각수를 보충해서 출발했다. 20분쯤 가다 다시 멈춘다. 냉각수를 채우고 다시 떠난다. 여러 차례 이런 일을 반복하다 결국은 음브로라는 곳에서 영원히 멈춰버렸다. 다른 차로 겨우 갈아타고 다카에 도착했다.

최근에 나는 인터넷에서 까프린에서 있었던 슬픈 얘기를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무능함에 가슴이 미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불공평함을 원망하며 멈출 수 없는 눈물로 무릎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날,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2012년 7월의 어느 날, 세네갈 동쪽의 작은 시골 마을 카프린에서 코이카 소속 허성용 단원의 슬픈 탄식이 터져 나왔다. 봉사하던 마을에서 위급 상황에 처한 한 아이를 보게 된 것이다. 아이 이름은 ‘아다마 바’. 다섯 살 난 아이는 기형적으로 발이 부어 있었고, 다리는 앙상했다. 엉치뼈 부근에 큰 혹이 있었고, 피부염이 심한 엉덩이를 보고서 허 단원은 아이를 그냥 두면 안 되겠다 싶어 현지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의 병원에서 뾰족한 수가 나올 리 만무했고, 전문가에게 물어봐도 이미 오래 방치되어 손쓰기 힘든 상태라는 절망적인 답변만 들었다. 오랫동안 영양을 공급받지 못한 아이는 힘겹게 숨만 쉴 뿐 날아드는 파리 한 마리조차 쫓지 못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정서적으로 불안해졌고, 대인기피증까지 깊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아이 부모가 이 상황을 타개할 어떠한 능력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쎗뿔러스

 

허 단원은 결코 아이의 고통을 좌시하지 않았다. 절대자가 자신을 이곳에 보낸 이유가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생애 처음 불가능한 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휴가 때 쓰려고 모아둔 100만 세파(약 250만원) 전액을 아이를 위해 쓰기로 했다. 인터넷을 통해 긴박한 상황을 알리고, 주위에 관련 지식이 있는 이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우선 급한 대로 마사지와 발바닥 상처 치료, 비타민 시럽 공급, 근력 운동 보조와 정신건강 향상 등을 목표로 허 단원은 뛸 준비를 했다. 사람으로서 당연한 책임이자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진심은 통했다. 코이카 세네갈 사무소에서 적극 협력하기로 했다. 또한 아이의 병명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분 척추증과 욕창이었다. 허 단원은 일단 구급차를 이용해 아이를 수도 다카르에 있는 세네갈에서 가장 큰 알버트로이어 아동병원에 입원시키기로 했다. 치료 이후 아이를 돌볼 가족의 관리에 대한 제반 사항까지 체크하고, 치료를 위한 각종 서류 등을 준비했으며 본인이 기부한 금액이 치료비보다 현저히 적었을 때를 대비해 부탁할 후원 요청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아다마에 대한 소식이 알려진 지 만 7일째, 아이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근처 일본인 간호사와 미국인 선교사, 간호사인 코이카 단원까지 모두 나서서 아이를 도와주었다. 겨우 위기를 넘긴 아이는 치료를 위해 수도 다카르로 가려 했지만 구급차의 이유 없는 늑장 출동에 더 힘들어했다. 피가 마르는 우여곡절 끝에 병원에 당도했고, 다시 한 번 기적적으로 생명의 줄을 잡을 수 있었다.

교수학습자료가 거의 없는 수업현장

그러나 다음 날 새벽에 아이는 끝내 힘없이 세상과 작별했다.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만큼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아다마의 아버지는 아이를 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치료를 위해 동분서주하며 기적을 바랐건만 아이는 끝내 밝은 미소 한번 짓지 못하고 그렇게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끝없이 밀려오는 대답 없는 외침들에 괴로워하는 허 단원에게 아다마의 부모는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 “이것은 우리가 아니라 신이 하는 일이잖아요. 이제 이 아이를 신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을 주민들과 함께 아다마를 위해 기도했다.

까프린 너무 예쁜 이름이다. 그 곳에 사는 사람과 아이들도 너무도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한 끼 밖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변변한 일자리가 없으니 나무 그늘에서 떠오르고 지는 해를 지켜보면서 하루를 보내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현실에 너무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하다.

거대 먼지

“먼지 때문에 숨을 쉬지 못하겠어요? 이곳의 날씨는 항상 이런가요?”

“아니요. 유독 12월 1, 2월엔 모래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외출하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적응하면서 살아가야지요.”

몇 달 전에 새로 부임한 김 자문관은 만날 때마다 쉬지 않고 제게 질문한다. 하기는 아프리카라는 곳이 한국과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매일 매일의 삶이 녹록치 않고, 또 여러 가지 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걱정이 많을 것이다. 그는 서울 삼성병원 설립 팀장으로 삼성병원을 건립한 의료보건 분야의 권위자다.

오늘 역시 바람이 심하게 불고 또 날씨도 꽤 쌀쌀하다. 첫해엔 두 달 정도 전기장판을 사용했었다. 아프리카에서 왠 전기장판인가 하고 나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보급품 중에 전기장판이 있었고 그게 유용하게 사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온난화의 영향 때문인지 올해는 2월 중순까지 춥지 않아서 장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추워져 벌써 일주일째 사용 중이다.

김 자문관은 계속 묻는다. 왜 이렇게 모래가 많고 또 모래 먼지가 계속 바람에 날리느냐고. 세네갈엔 산이 없다. 기본적으로 전국이 모래다. 물론 흙도 있겠지만 보이는 것은 모두 모래고, 또 모래 알갱이는 밀가루처럼 아주 미세하다. 요즘 건축 경기가 좋아져서 인지 골목골목마다 몇 집 건너 모래와 자갈 더미가 쌓여있다. 그러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그 모래가 이리저리 흩어지고, 하늘로 치솟아 모래 바람이 정신 못 차리게 공격한다.

외출했다 돌아오면 신발, 옷, 머리 무두가 모래 더미 위에서 놀다 온 듯 모래투성이다. 처음엔 식사 때마다 입안이 사각거려, 살펴보니 입안에 모래 먼지가 쌓여 씹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밥도 모래가 너무 씹혀, 쌀을 채로 쳐 보니 엄청난 모래가 섞여 있었다. 이 곳 사람들에게는 별 문제가 안 되는 모래 밥이었다.

수도 다카에는 차량이 많다. 서부 아프리카의 중심도시이고 또 유엔 및 NGO 기관들이 많이 입주해 있다. 그러다 보니 아주 오래된 차량들이 많은 문제가 된다. 차들은 한국에서라면 서, 너 차례 폐차를 해야 할 심각한 차량들이 너무 많다. 택시를 타면 가다 멈추어 고쳐서 가야 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특히 버스 들은 그 매연의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수많은 굴뚝들이 함께 뭉쳐 줄지어 지나가는 것 같다.

우리 사무소에서도 이런 최악의 환경 때문에 마스크를 지급한다. 그러나 나는 사용해본 적도 없다. 왜냐하면 이 곳 사람들은 이 모래 바람의 거대 먼지나. 굴뚝같은 매연 속에서 장사도 하고 구걸도 하고 등교도 하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이방인이 되어 차마 마스크를 쓰고 출퇴근이나 외출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처럼 미세먼지 경보에 거의 미라 수준으로 포장하여 외출하는 사람들을 여기서는 한 사람도 볼 수 없다.

가끔씩 너무 모래 바람과 매연이 심한 날에는 오늘을 꼭 마스크를 쓰고 출근해야지 했다가도, 결국 그냥 거리로 나선다. 거대 먼지와 굴뚝같은 매연과 벗하며 지내는 것도 이곳의 생존 방식이라고 위안하면서.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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