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75) 재일동포 왕수영 시인 시집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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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75) 재일동포 왕수영 시인 시집 ‘귀향’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1.1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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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재일동포 왕수영 시인 시집 ‘귀향’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일본에서 유일하게 한국어로 시를 쓰는(조총련계 시인 제외) 왕수영 시인이 지난 해에 시집 ‘귀향’을 발간했다.

“요즘은 한국도 일본도 난해한 시가 많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어서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가 싶다. 시는 언어를 조립하는 작업이 아니고 느낌을 전달하는 최상의 수단이라고 한다. 가슴에 스미어 마음을 떨리게 하지 않는 시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데 과연 내 시는 독자에게 감동을 주게되는가 걱정이다.”

“메마른 단어를 머리로만 엮어서 나열하여 현대시라고 하는데 난해시와 현대시를 착각해서는 안된다고 원로 시인의 말을 듣고 동감했다. 내 경우는 일본어로 시를 쓸 때는 머리로 쓰고 한국어로 쓸 때는 가슴으로쓴다. 일본어로 쓸 때에 머리로 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국어인 일본어를 일단 두뇌에서 선택하여 시를 쓸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쓸 때에는 그야말로 가슴에서 바로 나오는 한글로 쓰기 때문에 자유롭다. 마지막이 될 나의 시집을 세종출판사에서 간행하게 되어 기쁘다.” 팔순을 훨씬 넘은 자신이 원로 시인인 왕수영 ‘시인의 말’이다.

42편의 시에서 8편을 소개한다. 첫 번째로 <마흔의 꿈>이다.

 

마흔의 꿈

 

어제까지 마흔이었는데

오늘 아침 깨어나니

여든이 되어있어

 

평생 이토록

놀란 일이 있는가

 

남의 나라에서

매맞듯이 몰아치는

여든이 전신의 세포를

부정맥으로 난타한다

 

마흔에 떠나온

내 나라의 노을은

아직도 고운데

 

오늘 아침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여든이 너무나도

생소하고 기막혀

 

마흔이 찾아오는

꿈을 꾸려고 오늘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잠을 잔다

 

고국을 떠나기 전의 마흔을 그리려고 자다가 깨어나면 다시 여든이 되어 있다. 더부살이라는 애매모호한 이국 생활 속에 흘러버린 무심한 연륜의 뒤안길이 경련처럼 일어난다.

다음은 <비>이다.

 

 

비가 내린다

청명한 날에 비가 내린다

 

낙엽 쌓인 벤치에

부산의 비가 내린다

 

좌천동에서 수정동

학교까지 비속을 걸으며

사색하던 소녀시절

 

그 부산의 비가

내가 사는 이국땅

일본 동네에 비가 내린다

 

그리운 사투리의

비소리 따뜻한 옛날이

찾아와 주는 그리운

 

타국살이 외로울 때

언제나 내리는

부산의 비

 

팔순을 훨씬 넘었지만 소녀시절의 부산의 비가 한없이 그립기만 하다. 젊은 세대는 미래를 꿈꾸지만 노인은 과거를 꿈꾼다.

다음은 <바람>이다.

 

바람

 

걸어오는 바람은

나와 산보를 하는데

달려오는 바람은

나를 밀치고 달아난다

 

변덕스런 바람은

나를 닮아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 슬픔을

나는 안다

 

낯선 하늘과

계곡을 돌다가

돌아와서 울고 있는 걸

나는 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내 처지 같아서 그 절망을

나는 잘 안다

 

그러나

바람도 늙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 바람을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

 

바람에도 많은 바람이 있다. 봄, 가을, 겨울바람(여름바람은 이상하게 없다) 속에서 소슬바람, 높바람, 하늬

바람, 샛바람, 마파람, 순풍, 역풍 등등 속에 태풍이 있다. 삶에도 그러한 바람들이 있고 그 바람들은 서로 어우러져서 삶을 엮어 나간다.

다음은 <차별의 극치>이다.

 

차별의 극치

 

일본땅에 살면서 절친한

일본친구가 있다는 건

다행한 일이다

 

말 수가 적은 그녀는

흐르는 구름처럼

부드러운 강물처럼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한반도 사람에게는

집을 빌려주지 않는 난감한

처지에 보증을 서준

고마운 친구

 

처음 겪는

지진의 공포에 가족처럼

감싸주고 철따라 이어지는

꽃놀이나 축제에 함께해주어

 

일본의 문화를 알게해준

다정한 친구

 

어느덧 세월이

석양으로 물들고

우리는 백발이 섞인

우정으로 마주앉아

지난날의 추억을

되새기었다

 

감격에 목이 메인

그녀는 내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좋아해요

그래서 단 한번도 당신을

한국사람이라고 여긴 적이 없어요

언제나 일본사람이라고 여기었어요

그만큼 당신을 나는 좋아합니다

 

다정했던 일본인 친구는 한국인 친구를 일본인으로 만들어서 오랜 세월을 사귀어 왔다. 감지덕지 좋아 했

던 한국인 친구는 인생의 뒤안길에서, 독백처럼 쏟아낸 일본인 친구의 비수 같은 한 마디에 말을 잃는다.

다음은 <기침>이다.

 

기침

 

일본에서 들은

기침소리

재일동포 할아버지의

목쉰 소리

 

어린시절

부산 뒷골목에 살던

할아버지의 기침은

권위가 있었다

 

오사카

재일동포 마을에서

들려오는 찌든 기침소리

 

부산에서

제주도에서

거센 파도 헤치고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할아버지의 기침은

 

피를 토하며 일본땅

골목으로 살아진다

 

기침에도 감정과 감성이 있다. 부산 뒷골목의 할아버시 기침에는 위엄이 넘쳐흐르지만, 재일동포 마을에서

들려오는 할아버지의 찌든 기침에는 많은 연민이 서려 있다.

다음은 <엇박자>이다.

 

엇박자

 

지구를 방황하다가

도달한 일본땅

긴 세월이 흘렀다

 

왜 일본땅에

당도했냐고 묻는

일본사람에게

 

웃음을

산산히 찢어

허공에 날렸다

 

재일동포와

재일일본인이

엇박자로 살아가는

게임

 

하염없이 되풀이하는

잿빛일상을 서로

모른체하며

비켜다닌다

 

‘재일일본인’이라는 신선한 단어가 돋보인다. 같은 재일 속에 살아가면서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그게 제대로 안되서 자꾸만 엇박자로 빗나간다.

다음은 <벗어버리다>이다.

 

벗어버리다

 

젊었을 때는

한겨울에도

봄을 입었다

 

슬픔도 외로운도

핑크색으로 물드려

핸드백에 넣고 다녔다

 

바람도 따뜻해서

누군가의 가십도

넣고와서 즐겼다

 

지금은 일상을

벗어버리고

 

빛바랜 봄을

벗어버리고

 

현실이 된

슬픔도 외로움도

벗어버리고

 

누군가의 가십도

흥미를 잃어 성가시고

 

풍만한 가슴도

도려내고 나니

 

전신이 헌 옷처럼

너덜거리고

 

무엇이든 입고 다니던

근육도 녹아나서

 

마지막 남은

나의 가난한 감성만이

추상화처럼 가느다란

선을 긋는다

 

가슴 속에, 머리 속에, 핸드백 속에, 주먹 속에, 새기고 넣고 꼭 쥐고 지내던 나날들을 이제는 하나 하나 풀

어 주니 마지믹 남은 가난한 감성만이 추상화처럼 가느다란 선만 남았다지만, 그건 인생의 달관이고 관조였다.

다음은 <정상수치>이다.

 

정상수치

 

생일검진 결과를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일본의사가 하는 말

 

-정성수치입니다

-정상수치라니요?

 

흘깃 나를 쳐다보고나서

의사는 미소지었다

 

-지난번에 검사한 결과의

수치가 아주 정상입니다

 

-그건 컴퓨터가 추산해낸

결과이지요?

-지금은 모든 결과를 컴퓨터가

알려줍니다 그러니 정확하지요

 

혈압 심전도 간기능 중성지방

당뇨 호흡기능 등등 컴퓨터의

결과를 의사는 자신이 알아낸 듯

으시댄다

 

내 몸이 나에게 알려주는

수치는 비정상이라고 아우성이다

 

어지럼증 불쾌감

불가사의한 현실들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눈으로만 깜빡 인사하고

지나치는 비정상의 나날이

매정하게 흘러가는데

 

일본의사는

내 생명의 수치가

아주 정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내 몸을 나도 모르는데

기계가 계산해서 정상이라니

 

나는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고 죽을 일도

나 대신 컴퓨터가 처리할 것이니

 

이제 나는

비정상의 나날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난감할 뿐이다

 

자신을 모르는 자신과 모두가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일상을 살아간다.

설령 안다고 해도 자신도 모르는 또 하나의 자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이 부조리 속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

가고 있다.

왕수영 시인은 부산 출생. 연세대 졸업. <현대문학>으로 등단. 상화시인상, 월탄문학상, 한국문협 해외문학

상, 한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한국펜클럽 번역문학상, 일본에서 이시카와타쿠보보쿠상(石川啄木賞)을 수

상했다. 저서로는 한국어시집 10권, 수필집 2권, 장편소설 8권, 번역서 20권, 일본어시집 6권, 수필집 3권, 소설 1권이 있다. 왕수영 시인은 현재 도쿄도 죠후시(調布市)에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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