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05)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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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05)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11.13 02: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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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12년 전,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은 사망, 행방불명자 약 2만 2000명의 피해를 입은 일본 최대급 지진이었다. 이 지진의 참상 속에서 일본인들이 보여 준 질서 의식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족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당사자들의 인내력과 질서 의식, 일본 사회의 대응은 극한상황 속의 모범적 모습이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이 100년 전,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는 어떠했을까, 지바현의 '후쿠다무라 사건'(福田村事件. 현재 노다시: 野田市) 영화는 그것을 묻고 있었다.

11월 5일 '마이니치신문' 조간 1면 톱기사로 실린 영화 '후쿠다무라사건'의 감독 모리 다쓰야 인터뷰 기사.

"2001년 당시 TV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신문에 게재된 작은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노다시에서 위령비를 건립한다는 기사였습니다. 무엇 때문의 위령비인지 잘 모르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대로 흥미를 갖고 위령비를 건립하는 절에 가보기도 하고 향토 자료관이나 도서관에 가서 조사해도 잘 몰랐습니다."

"지역 주민들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지만 몇 차례 방문하는 동안 이 사건의 개요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계기로 보도 방송을 만들고 싶어서 기획서를 작성하고 TV국의 프로듀서들에게 가지고 갔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자저(自著)에 후쿠다무라 사건을 쓰고 마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촬영하고 싶었을 때, 후쿠다무라 사건을 생각했지만 자료가 빈약해서 극영화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획서를 작성해서 영화회사를 찾아갔지만 역시 거절당해서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에 제가 만든 자작 영화, <i-신문기자 다큐멘터리>가 기네마구보 베스트 텐에서 문화영화 1위에 선정되었습니다."

"그 수상식에서 일본 영화 1위를 수상한 영화감독이며, 각본가인 아라이 하루히코(荒井晴彦. 76) 씨로부터 "후쿠다무라 사건을 영화화하고 싶은가" 하고 물으면서 자기들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11월 5일, 마이니치신문 조간 1면 톱기사와 3면에서 모리다쓰야(森達也. 67) 감독이 인터뷰에서, 후쿠다무라 사건이 영화화되기까지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미디어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마이니치신문이 9월 1일 개봉 후, 2개월이 지난 후에 1면 톱기사로 저널리스트의 이케가미 아키라(池上彰. 73)의 <이것 들어도 좋습니까?>를 게재한 것은 이례적인 일로서, 후쿠다무라 사건 영화의 무게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일본 우익 단체만이 아니라 보편적인 일본인들로부터의 항의까지 각오하면서 제작한 후쿠다무라 사건 영화는 예기치 않았던 오산으로 일본열도의 주목을 받았다. 개봉 전, 8월에 NHK TV는 아침 7시 뉴스에서 특집 방송으로 자세히 보도했으며, 다른 미디어들도 앞을 다투어 보도하기 시작했다.

필자도 개봉 당시 바로 보고 싶은 영화였지만, 2개월이 지난 지금도 상영 중이어서 11월 7일 관람했다. 내용은 후쿠다 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었지만 배경에는 노골적인 민족 차별이 이 작은 마을에서도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모리 감독은 어디까지나 100프로 픽션이라지만 사실에 입각한 작품으로서 후쿠다무라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작은 마을의 '후쿠다무라 사건'이라는 영화 제목부터가 수식어 없는 직설적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으로서의 영향이 많이 작용했을는지 모른다.

1923년 9월 시코쿠 가가와현에서 약을 파는 행상인 중에 임산부까지 포함한 남녀노소 15명이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도쿄의 이웃, 지바현 후쿠다 마을에 들렀다.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재산을 약탈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어서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던 시기였다.

각 지역마다 자경단이 조직되었고 이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9월 6일 그들의 귀향길에서 마을 사람과 사소한 말다툼 끝에 들어 보지 않았던 그들이 사투리를 듣고 조선인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어 신사 앞에 자경단이 모였다. 한사코 부정하는 그들의 신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은 임산부까지 모두 9영을 살해한다.

"조선인이라면 죽여도 좋단 말인가!?" 조선인인 줄 알고 살해당한 인솔 책임자, 남성의 마지막 한 마디가 가슴을 찌른다. 모리 감독은 이 대사는 "극장의 관객들을 향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 장면에서 많은 관객들은, 일본인이라면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어느 사이엔가 들었을 것입니다." 감독이 이 영화에서 가장 호소하고 싶었던 이율배반적인 부조리가 낳은 극치의 장면이라고 필자는 느꼈다.

영화는 여기에서 조금 더 진행되다가 막을 내리지만, 역사 자료에는 약 200명의 공격 인원수 (이웃 마을 다나카무라 자경단도 포함) 앞에서 살해당하는데 직접 관여한 8명이 살인죄로 구속되었다. 피고인들은 "향토를 조선인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우리들의 행동은 우국지사이며, 국가가 자경단을 만들라고 명령을 했기 때문에, 그 결과 오해 속에 죽였을 뿐이다"라고 진술했다.

8명 중 1명은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2심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7명은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서 10년까지 실형이 선고되었다. 확정판결 후, 2년 5개월 후에 쇼와 천황의 즉위에 의해 전원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출연 배우진을 정할 때에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출연 의뢰를 했을 때에 승낙해 줄 것인가에 대한 망설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꺼냈을 때 모두 흔쾌히 참가해 주셔서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배우들은 승낙하지만 소속 회사가 어떨까 하는 조바심이 있었습니다."

"자금 면에서도 꽤 고생을 했지만 약 1억엔이 들었지만, 일반인들로부터 기부금 모집을 해서 약 3000만엔을 모았고, 일본문화진흥기금에서 1000만엔, 배급사 등에서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예상 이외로 힛트쳤습니다. 영화 제목을 '후쿠다무라 사건'이라 한 것도 무척 망설였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다 후쿠다무라에서 일어났지만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학살은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사건이므로 지명을 타이틀로 한 것을 망설였지만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학살이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을 희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진실성이 엿보여서 더욱 신뢰할 수 있었다. 제목만 해도 그렇다. 필자가 느꼈던 것처럼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그의 고뇌를 알 수 있었다.

영화는 보편적인 일반 히트가 아니고 대박이었다. 관동대지진에 대해서는 극우 정치가였던 고(故) 이시하라 신타로가 도쿄도지사일 때도 관동대지진 때, 민간 단체의 조선인 희생자 위령식에 해마다 추도문을 보냈었다. 그런데 고이케 노리코 현 도쿄도지사는 올해도 추도문을 보내지 않아서 항의 소동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조선인 학살 희생자가 없었다는 그녀의 부정적 신념이 낳은 소산이지만 왜곡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정부 내에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라면서 새롭게 조사하지 않겠다는 자세라면서 "학살은 없었다"고 말을 못하니까 "자료가 없다"면서 빠지고 있다고 인터뷰어인 아케가미 씨는 덧붙였다.

"저는 계몽가도 아니고 저널리스트도 아닙니다. 이 나라를 바꾸려고 영화를 만든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영화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 "이 나라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쩌면 이 나라는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리 감독의 끝맺음이었다.

"부끄럽지만 이 사건의 존재를 몰랐습니다. 차별하는 측도 어딘가 망설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보복할는지 모른다’ 라고 두려움을 갖는다. 그것이 비극을 낳는다. 유럽에서 가끔 일어난 유대인 학살도 그러한 구조였습니다. 보통 때, 차별받았던 사람들이 무엇인가 일어났을 때에는 더욱 지독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평화스럽게 생활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살인자가 돼버린다. 이 무서움을 우리들은 평화스러운 시절 때부터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통감했다. 정치가야말로 봐야 할 영화입니다." 이케가미 씨의 인터뷰 후의 감상이었다.

100년 전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모티브로 배타적인 차별에 의해 식민지 종주국에서, 피식민지인이 당했던 역사적 사실을 영화 '후쿠다무라 사건'은 우회적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혐오스러운 과거를 되돌아보기 위해 ‘후쿠다무라 사건'을 상영 중인 영화관을 찾았다.

100년 전의 관동대지진과 12년 전의 동일본대지진과는 본질적으로 상황이 다르지만 이때에도 외국인 절도단이 피해지에서 가재 등을 훔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모리 감독은 지적했다. 배타성이 강한 일본인의 특성일는지 모른다고 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났을 때, 자기주장이 약한 일본인들은 한 색깔로 물들기 쉽다는 일본인의 무서움을 실감했다는 모리 감독의 말에 공감할 수 있는 영화였다. '후쿠다무라 사건'은, 2023년 10월 개최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아시아영화 경쟁부문 최우수작)을 수상했다. 고국에 있는 한국인에게도 권하고 싶은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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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im 2023-11-26 22:37:24
후쿠다무라사건 영화 꼭보고싶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