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안길에서 만나는 4․3의 진실] (4)제주도 인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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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안길에서 만나는 4․3의 진실] (4)제주도 인민위원회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2.0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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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학 제주4.3사건 재정립 시민연대 교육홍보위원장
-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제주도인민위원회 터였던 곳.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 결성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2일이 지난 8월 17일 여운형(여운형은 8·15해방전부터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있었다)은 재빠르게 조선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를 결성하였다. 8월 22일, 건준중앙위원회의 확충을 단행하고 11부 1국제를 채택하여 강력한 조직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개편된 조직명단에 서기국장에 제주 출신 고경흠[1910(융희4)~?, 고려공산청년회 및 조선공산주의자 협의회의 항일활동. 언론인. 한학자 고성집의 아들, 제주시 삼도리<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이름이 등장하고 9월 3일 건준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118명 발표에도 또다시 조사부장으로 고경흠이 나온다.

박헌영(왼쪽)과 여운형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8일 미군이 인천을 거쳐 서울에 진주할 때까지 통치 공백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사실상의 준중앙정부로서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는 아직 38선이라는 경계가 생기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북으로는 회령, 경성에서부터, 남으로는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각 도의 중요지역에 8월 31일까지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 성격을 지닌 단체가 145개(민주주의민족전선, 『해방조선·Ⅰ』, 서울 : 과학과 사상, 1988., p.87.)에 달하고 있었다.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9월 6일에는 허헌, 이강국 등의 공산계열이 주동(박헌영은 정면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이 되어 경기여고 강당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국호가 결정되고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 상정·통과되었으며, 건준 부위원장인 허헌은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선언문을 발표(민주주의민족전선, 전게서, p.94.)했다.

여운형[여운형의 차녀 여연구는 자기 부친을 암살한 사람들은 종파분자(박헌영계열)들이었다고 증언했다.]은 잠시 좌파중심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면서 새 정부의 부서를 정했는데 이들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했다.[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㉑ 해방 그날이 오면』, 서울 : ㈜ 도서출판 한길사, p.307.] 한편 송진우와 김성수 등을 중심으로 한 우파들은 9월 6일 뒤늦게 한국민주당을 발기하고 임시정부와 연합군의 환영준비를 서둘렀다.

이 조선인민공화국은 단순한 정당 또는 사회단체가 아니고 국가 또는 정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반도의 통치주체로 자처하려고 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의 구성과 병행하여 각 지방에서도 행정체계에 따라서 도에는 도인민위원회, 부·군에는 부·군인민위원회, 읍·면에는 읍·면인민위원회가 구성(기존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어, 1945년 10월까지에 남한 일대의 7개도, 12개부, 131개 군에 빠짐없이 조직되어, 치안을 유지하고 일부 지방에서는 행정권을 접수하여 직접 행정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 선언 이후 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꾼다.

광복 후 제주 공산주의 조직의 활동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0일 각 읍·면 대표 100명 가까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결성되어 위원장에 오대진이 선출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앞서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준비회가 동년 9월 7일 발족되었으며 대표는 제주야체이카 출신 오대진이 되었다. 동년 10월 9일에 제주향교에서 우익계인사들만이 별도의 우익계 중심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위원장에 홍순녕, 부위원장에 최남식이 피선되었으나, 3일 후 홍순영이 사퇴.)되었는데 이것은 제주도에서 건국준비위원회가 출범할 당시 분열되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좌익일색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제주농업학교에서 열린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결성식에서 집행위원에 표선면의 조몽구, 성산면의 현호경, 구좌면의 문도배 등 10여 명이 선출되었고, 상임 집행위원회에는 위원장 오대진(대정면), 부위원장 최남식(제주읍), 총무부장 김정로(제주읍), 치안부장 김한정(중문면), 산업부장 김용해(애월면)가 선출되었는데 이들 중 최남식을 빼면 모두는 철저한 과거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인물들로 이루어진 좌익일색이었다.

농업학교에서 결성된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도 시간이 흐르자 좌·우익 간에 분열이 생겨 10월 9일에 안세훈, 오대진 등의 좌익계 인사에 의해 제주극장(조일구락부)에서 좌익 일색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제주도에서도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 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해서 진주할 때까지 조선총독부의 제주도경찰이나 일본군의 통치권 행사가 거의 마비되어 통치 공백상태가 지속되며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가 사실상의 제주도의 준지방정부로서 치안기능을 담당(신상준, 『제주도4·3사건 Ⅰ』, 제주 : 도서출판 제주문화, 2010, p.473.)하고 있었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제주도미군정청 법무국장인 Emery J. Woodall 육군소령과 조선총독부의 제주도사 대리 千田專平 사무관, 제주경찰서장 및 일본군 제58군 사령관과 접촉하고 치안유지

권을 확보키 위해 ⓵ 치안유지와 건국 사업을 위한 정치 활동에 절대 간섭과 방해를 말 것, ⓶ 일군과 경찰관은 즉시 무장 해제할 것, ⓷ 행정은 건준이 도 및 읍·면의 결성과 함께 양도할 것 등의 3가지를 요구하였지만(김봉현·김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대판시 : 문우사, 1963., p.16.)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미군정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은 중산간 마을에서 치안유지 등의 행정 및 치안권을 행사하고자 하였으나 이 일로 인해 미군정과 잡음이 나와 제재를 받기도 하였다.

북제주 한림면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여기에 북제주 한림면 건국준비위원회 결성과정(제주4·3연구소엮음, 『제주항쟁』, 서울 : 실천문학사, 1991., p.226.)을 살펴보면 1945년 9월 10일 각 읍·면 대표 100명 가까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도내 읍·면건국준비위원회들은 거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일인 9월 10일 이전에 결성되지만, 한림면 건국준비위원회는 조금 늦은 9월 중순에 결성되었다 한다.

한림면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은 청년회, 자위대 등 기존의 자생적 조직을 기반으로 한림공립국민학교에 면내 마을 대표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200~3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면 관내 마을에서 거의 전부가 참석하였으며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참석하여 같이 도와주었다.

한림면 건국준비위원회 사무실은 일제강점기 면사무소 내에 있는 일본인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건물 1동을 사용하였다.

위원장에는 김현국(수원리 출신), 부위원장에는 좌두영(신창리 출신. 한림면인민위원회 부위원장. 4·3사건 전후 일본으로 도피.), 서기국장 김행돈(한림면 조선민주청년동맹위원장. 5·10총선거 전후 일본 도피), 선전부장 양병시(1948. 05. 14. 제1구 경찰서 한림지서를 공격하라는 ‘본때를 보이라’는 지령을 내림. 제2연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당시 36세로 남로당 제주도당 한림면 당수였고 최악질이라고 제주 주둔 제2연대 앨범에 기록되어 있다.), 산업부장 고종석(협재리 출신. 후에 대한독립촉성회 참여), 교육부장 양관표(한림리 출신. 1948년 9월 총살), 치안부장 박성관(옹포리 출신. )이 각각 선출되어 한림면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을 구성했다.

9월말까지 한림면 각 리에서는 건준이 결성되어 조직된 각 리 건준위원장에는 상명리 양성일, 금악리 박춘삼, 명월리 오승규, 상대리 한림리 김태안, 대림리 양성익, 수원리 김현국, 귀덕리 김두옥, 금릉리 양군백, 옹포리 장창구 등이 추대되었다.

이 한림면 건국준비위원회는 짧은 시기 동안 존재했던 조직으로 지역민의 요구를 제대로 수렴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기 전에 ‘인민위원회’로 개편이 된다.

제주읍인민위원회 – 제주도인민위원회 결성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이 선언된 후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건준은 9월 7일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으며, 제주도에서도 9월 15일 제주향교에서 제주읍인민위원회을 결성하고, 9월 22일에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인민위원회를 결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무실 옛터는 일제강점기 木村여관으로 사용되었던 2층 적산가옥으로, 알생짓골(알생깃골, 하교동, 범골, 병골, 부엉골이라고도 하고 웃생깃골의 아래(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향교가 있었던 일주도로, 지금의 원정로 북쪽을 이야기 한다. 옛 외환은행(현재 하나은행) 부근은 웃생깃골, 한국투자증권 부근은 알생깃골이라 불렸다. 알 생깃골에는 성안에서도 조금 산다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제주시 일도1동 1458-1 소재로 현 중앙로 교차로 동북쪽에 있었으며, 그 후 YMCA 사무실→ 영어·수학 학원 →최근까지 나사로병원이 있던 자리이다. [사진-5]

현재는 대형 빌딩이 들어서 있어 당시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제주도건준이 제주도인민위원회로 자동 개편되었는데 위원장과 부위원장에는 건준위원장, 부위원장이었던 오대진, 최남식이 각각 선출되었으며, 각 간부들은 건준 인사들이 거의 계속 맡았으며 리(里)단위까지 조직되어 리정을 관장하기도 했으며 가장 광범위하고 강력한 정치적 위치를 선점한다.

조천면 와흘리 인민위원회

제주도인민위원회 지도하에 각 읍·면의 보안대, 치안대, 기타 청년단체 등을 통합하여 9월 말에 조선민주청년동맹(그전에는 공산청년제주도위원회가 결성됨.)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한다. 이 청년동맹 제주도위원회(위원장 문재진)는 인민위원회와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인민위원회 활동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47년 6월 5일에는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으로 개편되어 1948년의 4·3폭동 반란 후에는 남로당 마을 자위대와 인민유격대에도 일부 가담하거나 또는 그의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의 정강정책이 사회민주주의(중도좌익) 내지 사회주의(극좌)이념에 기초하고 있었던 만큼, 이들 위원회의 활동 과정에서 빈곤에 시달리던 많은 주민들이 사회민주주의 내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막연히 이에 대한 호감으로 인하여 그들의 뇌리에 사회민주주의 내지 사회주의이념이 부식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신상준, 전게서, p.478.)이다.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10월 6일에 Airchibald V. Amold 군정장관이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여 조선인민공화국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면서 남한에서의 조선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은 감소되었다.

제주도에서도 군정 부대인 제59군정중대가 1945년 11월 9일에 도착하여 영토형 군정을 실시하게 되면서는 제주도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점차 감소되었다. 그러나 전라남도의 일부 지역과 제주도에서는 미군정이 실시된 이후에도 다른 지방에 비해서 인민위원회의 세력이 크고 이와 반비례하여 미군정 당국의 통치권 행사가 미약하여, 장기간에 걸쳐 이들 인민위원회가 지방행정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상게서, p.479.).

미군정 초기에 제주도에서 인민위원회가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제주도의 도 및 읍·면, 그리고 리단위까지의 조직망이 굳게 형성되어, 미군정당국이 이들 세력을 일격에 와해시킬 수 없었던데 원인이 있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 미군정 곡물수집정책 반대운동

제주도인민위원회에서는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에 대해 반대운동을 펼쳤다. 이에 도인민위원회의 지령으로 각 읍·면의 주민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하기에 이르렀다.

주한 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G-2 Periodic Report 1945. 9. 9.~1949. 6. 17.)의 곡물 수집 현황(1947. 1. 22.)을 보면

“1월 21일 발표된 1월 18일 현재까지의 곡물수집 현황은 다음과 같다.

할당량이 5000석인 제주도와 6만 석인 강원도는 한국에서 곡물이 가장 적게 생산되는 지역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므로 곡물 수집 계획의 성패가 이 두 지방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라북도 문제는 아주 심각하다. 이 지방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할당된 79만 8000석의 곡물수집 계획을 조직적으로 저지하기 위하여 선전과 반군정 활동에 주력해왔다. 최근 군정이 한층 책임감을 갖고 곡물을 수집하고 있지만, 여전히 강한 반발에 부딪치고 있다.” 라고 보고되어 여기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를 의미한다.

북제주 한림면에서도 면인민위원회는 물론이고 면사무소도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의 집행을 거부했다(제주4·3연구소엮음, 전게서, pp.235~236.)고 전한다.

제주도에서 인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것은 한라단(한라단은 1945년 8·15해방 후에 일본군에서 귀환한 제주읍내 청년들이 모여 친일파 응징과 치안유지의 명목으로 조직한 단체. 단장 김태륜, 부단장 김희석, 총무 김기오. 사무실은 향청골, 관덕정 남쪽에 있는 향사당,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절(寺)로 사용. 신성학원 유치원 장소이다.)사건을 통해서 알아볼 수 있다. 한라단원들이 인민위원회의 사무실(제주읍 칠성골에 있는 일제강점기 ‘木村旅館’으로 사용되었던 원정통의 2층 적산가옥(나사로병원 옆)에 제주도인민위원회와 산하 단체들은 사무실을 두었다.)을 급습하여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구타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는데, 이를 구실로 1945년 11월 5일 인민위원회 산하의 보안대원 175명이 한라단원들에게 폭행을 가하자, 미군헌병과 경찰은 주동 분자와 난동 분자 154명을 검거하고 모든 무기는 압수한 후, 1945년 9월 7일자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부 포고 제2호의 위반으로 벌금형을 과한 사건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라단 사건

주한미육군 제6보병사단 일일정보보고 1945년 11월 8일~1945년 11월 9일 (NO. 22, 1945. 11. 9. 보고 ) ‘한라단 사건’ 내용을 보면

“제주도 제주읍에서 보안대(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산하 치안대를 말한다.) 대원 154명이 붙잡혔다. 몽둥이를 소지한 20명의 다른 한국인도 붙잡혔다. 한 건물의 2층에 구금되어 있었던 한라단 단원 10명이 보안대 대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보안대에 대해 추가 조사 중이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

▣ 1945년 11월 6일~1945년 11월 7일 (No. 59, 1945. 11. 7. 보고) ‘민간인 소요 / 한라단원 폭행’ 내용에는

(전략)“11월 5일 밤 11시, 미군은 소요 사건을 조사하다 한 건물에서 한라단 단원 10명을 폭행하는 보안대원 약 175명을 발견했다. 이들 가운데 154명은 체포되었고, 25명은 도망했다. 모든 무기는 수거되었으며,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야간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질서는 곧 회복되었다.”

▣ 1945년 11월 8일~1945년 11월 9일 (No. 61, 1945. 11. 10. 보고)

‘민간인 소요 / 보안대원에 벌금형’ 내용에는

(전략)“지난 11월 5일 한라단 단원 10명을 폭행한 보안대원 152명에 대한 재판이 민간 법정에서 열렸다. 재판 결과 152명 모두에게 50엔, 또는 그 이상의 벌금형이 부과됐다.”

이 한라단 사건은 미군이 진주한 상태 하에서도 인민위원회 보안대가 치안 유지 기능을 행사하고 있음을 잘 알려주고 있으며 이 사건은 미군과 인민위원회 산하 조직인 보안대(치안대)가 충돌한 첫 사건이라 한다.

북제주 한림면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인민위원회로 바뀌어졌다. 당시 인민위원회 결성 집회는 10월경 공립한림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위원장으로는 고운선을 추대하고 각 부서의 간부진은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들이 그대로 임명되었고 청년부, 부녀부, 농민부를 새로 만들어 각 대상별로 조직체계를 세분화하였다.

한림면인민위원회 위원장은 고운선, 부위원장 좌두영, 서기국장 김행돈, 총무부 김태안, 조직부 김행돈, 문교부 양관표, 산업부 고종석, 선전부 양병시, 치안부 박성관, 청년부 김태안, 부녀부 오매춘(명월리 출신. 남로당 한림면 여맹위원장. 1948. 12. 18. 가족들과 함께 총살됨.), 농민부 박성선(금악리 출신. 1948년 목포형무소 형을 마친 후 임창현 살해 혐의로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사망. )으로 구성되었다.

제주도인민위원회를 주도하고 있었던 오대진(도인민위원회 위원장), 김한정(도인민위원회 치안부장), 문도배(도인민위원회 집 행위원) 등은 한림면 인민위원회 간부 고운선, 김태안 등과 함께 1932년 재건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공산주의의 세포 조직)사건에 연루되었던 인연들이 있었다.

한림면인민위원회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던 대중단체로는 청년동맹(위원장 김행돈), 부녀동맹(위원장 오매춘), 농민위원회(위원장 박성선)는 각 리단위 조직까지 구성하여 활동을 했다.

한림면인민위원회 치안대(보안대, 자위대라고도 불렸다.)는 흰광목에 검은 글씨로 ‘치안대’라고 쓰인 완장을 끼고 돌아다녔다.

한림면의 적산가옥으로는 옹포리의 竹中(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을 비롯하여 전분공장인 동아물산, 감태를 원료로 요드팅크를 만드는 植村(쇼구무라)제약소, 얼음공장 등 굵직한 공장들이 있었다. 8·15해방이 되자 한림면 건준·인민위원회가 결성된 후에는 인민위원회가 접수하여 관리하였다. 미군정청 재산관리과가 생긴 이후 한림면에까지 미군정의 행정력이 미치면서 모든 적산을 회수하고 관리인 선정을 하니 인민위원회에서는 자기들의 재산이라며 1946년에는 적산관리를 위해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竹中 통조림 공장으로 옮겨 간판을 걸었다.(제주4·3연구소엮음, 전게서, p.232)

제주도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제주도위원회 관계

조선인민공화국의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는 가운데, 1945년 9월에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게 된다. 이에 앞서 ‘장안파 공산당’(일명 15일당) 결성하게 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는 날 서울 종로구 장안빌딩에서 서울청년회 이영, 경성제대그룹 최용달, 화요계 이승엽, 상해파 고려공산당계 서중석 등이 모여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이영을 책임 비서로, 이승엽을 제2비서로 정하고 8월 18일에는 산하조직으로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이, 23일에는 조선학병동맹이 조직되어 외곽조직까지 갖추고 남북한을 통틀어 최초의 정당이라 볼 수 있다.

1945년 8월 18일 박헌영은 경성콤그룹과 화요계 일부가 모여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약치 조공재건위) 결성을 결의한다. 그리고 8월 20일 종로구 명륜동 김해균의 집에서 조공재건위를 결성한다. 이것은 장안파 공산당을 와해 흡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서 경성콤그룹은 1925년 지하당으로 조직된 조선공산당이 일제 탄압으로 4차례나 해체와 재건을 거듭하다가 1928년 국제공산당의 지시로 해산되자 이를 재건하려고 노력해온 지하조직이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장악한 공산주의자들은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소집해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따라서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으며 이때 여운형 측은 국호에 대해서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표현이 과격하니 조선민주공화국으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제주도 출신 김응빈의 직계 노조 대표들이 들고 일어나 여운형 측 주장은 좌절되고 말았다고 한다.

조선인민공화국은 12월 12일 하지 장군에 의해 최종적으로 불법화된다.

1945년 9월 11일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는 조선공산당으로 정식 창당되고 박헌영은 중앙위원 겸 총비서로서 최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김일성을 정치국 서열 2위로 추대된다.

‘조선공산당은 마침내 통일 재건되었다’는 14일 자 선언문이 9월 19일 자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에 보도되었다.

좌익세력의 중앙지도부는 미군정청의 ‘인민공화국’ 거부 조치로 ‘인민공화국’이 정부 기능을 사실상 잃어버리자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으로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으로 각자 독자적인 조직 활동을 강화시켜나갔다.(홍인숙,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 『해방전후사의 인식 2』, 서울 : 한길사, 1985, pp.57~103.)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쳐 남조선로동당으로 통합이 된다. 위원장은 허헌, 부위원장은 박헌영·이기석·김삼룡으로 정하고 중앙위원은 45명으로 했다. 이미 박헌영은 월북하여 김일성의 식객으로 기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서울에 남아있는 허헌을 위원장으로 세우고 박헌영은 부위원장이 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세력이 총망라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좌우 세력의 갈등관계가 잠재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나 인민위원회로 재편되면서 점차 좌우의 갈등관계는 표면화되고 결국 인민위원회에서는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인민위원회는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정당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제주4·3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 『제주4·3연구』, 서울 : 역사비평사, 1999, p.61.)

해방 후 제주도에서 공산당이 결성된 시기 문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먼저 1945년 9월 중순경 공산청년제주도(島)위원회(위원장 문재진)가 결성된 후에

1945년 10월 초 제주읍 민가에 20여 명이 모여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가 결성( 회의는 김정로가 주도하여 도당 서기로 선임.)되었다는 의견과

1945년 12월 9일 ‘조선공산당 제주지부 역원들은 조천 김유환( 8·15 이후 제주도 남로당위원장, 제주읍인민위원회 대표. 아들과 딸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에서 사망. 부인은 조천에서 고통 속에서 지내다가 사망.)의 집에서 긴급회의를 갖고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가 결성(위원장은 안세훈)되었다’는 의견 등이 있다.

조선공산당 제주도당의 주요 인물로는 안세훈, 김유환, 문도배, 조몽구, 오대진, 김한정, 이신호, 이운방, 김용해, 김정로, 문재진, 부병훈, 송태삼, 이도백 등을 들 수 있다.

조선공산당제주도당이 결성된 이후부터는 인민위원회에 프락치를 파견하는 형식으로 당의 지도력을 관철하며 인민위원회 활동을 주도(제주4·3연구소엮음. 전게서. p. 65.)해 나가면서 조선공산당 제주도당 조직원들은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조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 (G-2 Periodic Report 1947년 8월 31일~1947년 9월 7일. No. 104, 1947. 9. 11. 보고)에 의하면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위원회’

“다음 정보는 방첩대가 한국의 인민위원회와 관련한 13개 항의 특별질문에 대한 답으로 준비한 것이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다.

1. 지하 인민위원회(공산주의자) 정부는 존재하는가?

그렇다. 지하 인민위원회 정부는 한국 내 특정 지역에 존재하고 있다. 그와 같은 정부나 지하조직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제주도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춘천, 수원, 삼척, 주문진과 대부분의 도청 소재지 등 고립된 도시나 지역에도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45년 12월 12일까지 인민위원회는 공개된 행정조직으로 존재했다. 현재 인민위원회는 사령관(주한미국육군사령관 : 역주)의 명령에 따라 해체됐으며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지하로 숨어들었다. 시골의 군과 면에서는 인민위원회가 1946년 1월 중순까지 행정조직을 계속 장악했다.

한국 전역의 인민위원회 지도자와 소속원들의 명단이 있다. 이 명단의 대부분은 인민위원회가 해체되기 직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몇몇 명단은 그 이후에 마련된 것으로 보아 조직이 불법단체로 전락한 뒤에도 같은 지도 아래 여전히 존속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다음은 제주도 각 읍·면 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역원 명단( 제주4·3연구소, 『4·3長征』, p.17.)이다.

 

*제주도 각 읍·면 건국준비위원회 및 인민위원회 역원 명단*

* 안세훈은 1945년 조천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했고 그 후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으로 1947년 3·1불법시위 사건을 주도하여 미군정청 포고령 제2회 및 법령 제9호 위반으로 구금된 바 있었다. 1947년 남로당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안세훈은 당의 기존방침에 따라 3·1기념을 빙자한 대대적 시위 획책을 꾀하기 위해 3·1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7년 2월 19일 13:00 안세훈은 3·1절 당일 군중집회를 계기로 남로당 강령과 당세 확장을 목표로 긴급동의로서 선동책과 일대 시위를 감행할 것을 결정하여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각 읍·면·직장 인민위원회 세포에게 지령을 내렸다. 남로당제주도위원회가 하달한 3·1불법시위 관련 투쟁방침의 내용은

3·1운동 기념 투쟁의 방침 (남로당제주도위원회 1947. 2. 16)(김영중, 『남로당제주도당지령서분석』, 서울: 퍼플, 2023, p.21.)

1. 각 읍‧면에서는 인위, 민청, 부동(婦同) 기타 각종 단체 및 직장 대표자로 3‧1기념 준비위원회를 즉시 조직할 것. 준비위원회에는 동원부, 선전선동부, 준비부를 둘 것. 각 부락 및 각 직장에서도 이에 준하여 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 단 학교에서는 교직원과 학생 대표로 조직할 것.

2. 24일까지 3‧1운동의 원인, 경과, 의의, 결과를 10월 인민항쟁과 현 정세에 결부시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의 방향에로 전 인민의 진로를 밝힐 것. 각 부락 및 직장에서의 선전 선동사업 및 동원 예상을 반드시 각 읍‧면 준비위원회에 보고케 하고 즉시 각 준비위원회에서는 도준비위원회에 종합보고를 할 것.

3. 25일부터 28일까지 각 읍‧부락 및 직장대회를 소집하여 3‧1 시위운동에 전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반(班) 및 직장 단위로 동원 조직하여 지휘자 및 자위대(2, 3인)를 선정하여 부락 준비위원회에 보고할 것.

4. 당일에 지휘자 및 자위대는 반 및 직장별로 동원시켜 시위 행렬로 부락 준비위원회가 지정한 장소와 시간에 집합할 것.

5. 각 읍‧면 준비위원회가 지정한 시간, 장소에 각 부락 준비위원회는 동원된 전원을 시위적 행렬로 집합할 것. 단체기 및 표기기(標記旗) 특히 인위기(人委旗,인민위원회기)를 들 것.

안세훈은 1948년 8월 21일 ~ 8월 26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읍 화북포구에서 월북하여 이때 최고인민회의대의원(국회의원격) 제1기 대의원이 되었다.

[안세훈은]

안세훈은 제주도 출신으로 북한에 가서 가장 대접을 받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6·25한국전쟁 이전까지 안세훈은 함경남도 원산시장(인민위원회위원장)을 했다고 한다. 이들이 주동이 되어서 일어난 제주현대사의 비극 4·3사건이 남로당중앙당과 무관하다는 말인가?

1950년 6·25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남로당제주도 조직을 재건하라는 엄명을 받고 남하하여, 제주도에 가지 않고 자기가 젊었을 때 한학을 배웠던 친척의 집이 있는 전남 광산군 하남면 장덕리 1번지 부해 안병택의 손자댁에 은신, 2년 가까이 지하 생활로 숨어 살다가 1953년 4월 15일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강규찬은]

* 강규찬은 제주읍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후에 남로당 제주읍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월북하여 해주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48년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뽑혔다. 역시 부인 고진희도 남편과 같이 월북하여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뽑히기도 했다.

강규찬은 6·25한국전쟁 때 남파되어 전남광양 백운산 빨치산 병참기지 사령관으로 활동하다 1951년 2월 6일 11사단 9연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백운산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여한 애월면 고내리 출신 강희수 증언에 의하면 1951년 음력 정월 초하루에 연대 단위의 백운산 토벌 합동작전 전개 중에 강규찬이가 사살되었으며 강규찬의 허리에는 고급 회중시계를 차고 있었으며 수첩에서 그가 빨치산의 병참기지인 백운산의 사령관인 강규찬으로 확인되었다.

연대본부에 강규찬을 사살했다는 보고를 하자, 강규찬의 목을 잘라 오도록 했다. 그의 목은 권총과 수첩과 함께 마대에 담아졌다. 강규찬이 머물고 있던 곳을 가보니 빨치산들은 민간인에게서 약탈한 떡을 구워 먹고 있었던 중이었다. 불 주위에 놓여있던 마대를 보고 나중에 온 군인이 그 마대를 깔고 앉아 불을 쬐다가 마대에 강규찬의 목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래 넋이 나갔다.

빨치산 포로들에게 그 마대를 주고 ‘노루 머리’라고 하여 운반토록 했다. 이 포로들은 몰래 노루 머리를 구워 먹으려다 그것이 그들의 사령관임을 알고는 크게 놀라며 그때서야 나무를 대고 운반, 연대본부로 보내졌다.

강규찬의 두 번째 부인 고진희는 제주읍 삼도리 진성동 태생으로 1946년 조선공산당 제주도당 부녀회장을 지내고 남로당으로 개편되면서 승계되었다. 제주도부녀동맹간부로서 1946년 제주도 3ㆍ1절 시위 사건으로 체포되어 미군정 포고령 제2호 및 19호 4조 위반으로 1947년 5월 미군정 재판에 의해 징역 5월형에 벌금 2000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8년 2월까지 남로당제주도부녀부장을 맡기도 했다.

부인 고진희는 남편과 같이 월북하여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으나 6·25한국전쟁 후 남파되어 빨치산 활동 중 강규찬이 국군토벌대에게 사살되자 도피 중에 광주헌병대장 백치규 부인(제주출신)의 신고로 체포되어 광주교도소 수감 중에 남로당 조직 비밀 유지를 위해 화장실에 빠져 자살하였다. 자살한 까닭은 심문 중에 비밀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택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들 부부는 6·25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 인민군이 점령한 남한지역에서 노동당 재건 및 토지개혁 실시 등 정치공작대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다.

김일성은 월북한 남로당원들을 6·25한국전쟁 대남 적화통일 혁명 전선에 내몰았고, 스티코프가 김일성 독재체제 구축 과업에 월북 남로당세력이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서 의도적 계획에 따라 사지로 내몰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들의 두 아들 강희진과 강석진은 북한에 살아 강석진은 북한 선박공업부 선박무역공사의 과장으로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김일성은 이들의 공적을 특별히 높이 평가해 공화국 영웅 칭호를 부여하고 북한의 국립묘지격인 애국열사릉에 안장하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지금도 북한은 강규찬ㆍ고진희 부부를 지리산 유격대 총사령관이었던 이현상이나 거물급 공작원 성시백 등과 동급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양군옥은]

* 양군옥[출처 : 자유일보(https://www.jayupress.com)]은 애월면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다 6.25 전쟁 때 월북하여 중앙당 학교를 졸업하고 지방 인민위원회 간부를 역임하다 1950년대 중반 공작원으로 선발된 양군옥은 공작교육 및 훈련을 받고 1956년 가을 제주도 내에 지하당 조직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받고 경기도 화성 해안으로 침투했다.

국내에 침투한 양군옥은 제주도까지 들어가 구남로당 관계자들 가운데 정체가 노출되지 않은 김행백, 장재섭 등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양군옥과 함께 북한에 들어간 장재섭 등은 2년간 공작교육을 받고 1959년 초 다시 양군옥과 함께 국내에 침투한 뒤 양군옥은 목포에 잠복하고, 장재섭 등은 제주도에 잠입했다. 그 후 양군옥은 1959년 말에 북한으로 복귀했다. 국내에 혼자 남은 장재섭은 제주도와 광주, 서울 등지를 돌아다니며 공작 활동을 하다가 1963년 여름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 695정치대학에서 2년간 공작 관련 교육을 받고 1965년 봄 전남·북 지방에 통혁당 조직을 건설하라는 임무를 받고 재침투했다. 장재섭은 공작 활동 과정에 포섭한 구남로당 관계자 류낙진을 대동하고 1966년 8월 말 다시 입북했다.

류낙진과 함께 재입북한 장재섭은 통혁당 호남지역 지도부 구성과 시ㆍ군 단위 지도부 구성 등의 공작 임부를 받고 공작금과 무전기 등 통신 연락 수단을 받아 가지고 국내에 다시 침투했다. 이후 장재섭과 류낙진은 기세문ㆍ김행백 등을 포섭해 통혁당 호남지역 지도부 구축을 위한 공작을 추진하다 1971년 5월 14일 일당 11명이 모두 적발 검거되었다.

남로당 全羅南道위원회의 남로당 濟州島위원회

1946년 11월 23일 조선공산당 등 3당이 남로당으로 통합되면서 1947년 2월 12일 북제주 애월면에서 조선공산당제주도위원회에서 남조선로동당제주도위원회로 개칭 결성(박서동, 『우리들의 영원한 아픔 4·3』, 제주 : 월간관광제주, 1990, p.163.)되었다.

1946년 7월 31일 24시를 기해서 濟州島가 행정적으로 ‘濟州道’로 승격되었는데도 ‘남조선노동당 濟州道위원회’로 하지 않고 ‘남조선노동당 濟州島위원회’로 하여 남조선노동당 전라남도위원회의 산하에 두었다.

위원장은 안세훈, 부위원장 이신우, 총무부장 김영홍, 조직부장 조몽구, 재정부장 이창욱, 선전부장 김용해, 부녀부장 좌창림, 청년부장 김은환, 업무부장 김용관이었다.

남로당제주도당은 제주도에서는 최초 유일 정당으로서 선제적 위치를 점하여 세력 확장과 정치활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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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hjhs 2024-02-11 10:37:24
제주4.3사건은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제주도당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고 반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