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22) 어머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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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22) 어머니(2)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5.1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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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122) 어머니(2)

나는 어머니께 효도를 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 생전에 일본살이 50년 가깝게 했었지만 어머니 혼자 사시는 고향 제주를 찾아 가도 어머니와 마주하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 술을 마시고 꼭두 새벽이 되어서 귀가하곤 했었다.

바둑판처럼 마을 길을 새로 만들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집 근처까지 가도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운전 기사 아저씨한테 집 전화를 알려주고 어머니가 길 밖에 나와서 기다리게 했었다. 언제나 한,두시를 넘고 있었다.

"지금이 몇시인 줄 아느냐!? 자동차 소리만 들려도 아들인가 해서 밖을 나가 보면 차는 그대로 지나쳐버리고 얼마나 애를 태우며 기다린 줄 아느냐! 당장 일본으로 떠나라. "집 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서 혼자 마루로 들어가면서 마루 바닥까지 치면서 무섭게 호통을 치셨다. 마신 술이 확 깨버린다. "네. 잘 알았습니다. 당장 나가겠습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죽겠습니다. 라면이라도 끓여 주십시오."  "그래. 지금까지 술을 마시면서 밥 한끼 못 얻어 먹었단 말이냐."

못 얻어 먹은게 아니고, 진수성찬이었지만 내가 안 먹은 것 뿐이었다. "나를 만나러 왔다는 핑계로 친구들을 만나면서 밥 한끼 제대로 못 얻어 먹었다니 그런 친구 버려라."  어머니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부엌방으로 데리고 갔다. 밥상에는 여러 반찬이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가슴이 울컥했다. 방금까지 호통치던 어머니의 모습은 사라지고 자상한 어머니로 돌아와서 이것 저것 먹으라고 내 앞으로 반찬들을 내민다.                                       

밝아 오는 새벽녘에 나누는 모자간의 옛 이야기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구수했다.

어머니 사시는 집은 제주시 삼양 해변가여서 걸어서 십분도 채 안되는 곳에 해수사우나가 있다. 나는 아침이면 어머니가 주시는 사우나 티켓을 가지고 사우나를 갔다 오면 어머니는 아침 밥상을 차리고 기다리시곤 했다. 하루는 사우나에서 목욕을 마치고 도중에 있는 작은 슈퍼에 들러서 쥬스를 샀다. "글쎄 이런 일도 있습니까. 나이 백살이 다되어서 유모차를 이끌며 다니는 동네 할머니가 아침부터 맥주를 사러 왔습니다. 손님이 와서 맥주를 사러 왔다니까 마시고 싶으면 직접 와서 사가지 꼬부랑 할머니가 사러 오다니 참 기가 찼습니다."  나는 참 못된 손님이라고 맞장구를 치고 집으로 왔다.

아침을 먹으려는데 어머니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오셨다. "아니 무슨 맥주입니까.?" "아들아, 느가 사우나 갔을 때 슈퍼 가서 사왔다. 마시거라. 나에게 맥주 사러 보낸 못된 손님이라고 그런 손님 상대하지 말라는 말을 슈퍼 주인한테 들었지만 그 못된 손님이 아들이라고 안했다."  어머니가 싱글거리면서 말했다. 형제들에게 자랑처럼 이 말을 했을 때, 집중 포화적인 비난을 들었다. 그때에 마주친 어머니 눈은 깜빡거리면서 살짝 미소를 띠우고 계셨다.

그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저것 보렴. 다시 술 마시는 것." 70대 중반에 들어 선 큰 누님이 다시 빈정거리는 한 마디였다. 제주대학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마치고 어머니 유해를 실은 영구차는 제주시에 있는 형님 집 근처에 세웠다. 가족 묘지가 있는 장지로 가기 전에 언제나 드나들던 아들 집에 마지막으로 이별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누이동생이 영정을 들고 집안을 돌아볼 때, 형님은 뒤를 따르면서 소주를 들고 여기저기 뿌렸다. 집 밖을 나올 때 나는 술을 전부 뿌리지 말고 달라고 해서 남은 술을 병째로 마셨다. 이 모습을 보고 놀란 큰 누님의 한 마디였다.  "음복주이니까 마시고 있습니다." 나도 짜증스럽게 말했다. 갑작스런 이 상황에 주위는 진눈깨비 날씨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나는 마시고 싶어서 마신 술이 아니고 음복주라는 의미에서 마셨는데 큰 누님에게는 술을 좋아 해서 다시 마시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아니, 오해가 아니고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마시는 술꾼으로 나는 낙인 찍히고 말았다. 7년 전 2월, 어머니는 백 두살 때 고향 제주시에서 돌아가셨다. 오사카에 살고 있는 나는 아내와 누이동생 부부와 돌아가신 다음 날 제주에 갔다.

친척과 문상객 중에는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많은 분들을 만났다. 그 중에는 몇 십년만에 만난 사람도 있었다. 백 두살까지 아주 오래 사셨으니 모두 납득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슬픈 장례식과는 달리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도 있었다. 여러 말을 나누면서  술도 같이 마셨다. 그러한 나를 보고 상주가 어머니 젯상은 지키지 않고 조문객들과 술만 마신다고 누님과 형제들에게 계속 핀잔을 들었다.

"누님들이나 형님들은 고향에 살고 있으니까 언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오늘 만나서 일본에 가버리면  언제 다시 만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분들과 얘기 나누는데 그게 니쁩니까. 어머니도 나 옆에만 앉지 말고 그 문상객들에게 고맙다고 잘 모시라고 할 것입니다." 사실이다. 나는 어머니 상을 모신 제단 옆에 계속 있는 것보다 찾아온 문상객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다른 형제들도 있으니 번갈아 가면서 상은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유해가 제단 밑에 안치되었다고 믿고 있었는데 따로 영안실에 안치되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일본인들과 마찬가지로 동포들도 어떤 장례식이든 유해는 제단 밑에 안치되어서, 오쓰야(발인 전 날 밤,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스님, 아니면 목사의 독경과 설교 후, 영정에 분향을 함. 제주의 일포와 비슷함) 때는 관의 유리문을 열고 돌아가신 분과 마지막 이별을 권하기도 한다. 나는 그때마다 마지막 유리문 안을 보면서 이별을 했다. 

유해는 영안실에 안치하고 치르는 우리 장례 예법도 모른다면서 누이동생에게 잔소리도 들었지만, 이러한 관계로 마음 한 구석에는 어머니 제단에 대한 애착심이 크지  않았던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장례식을 전부 책임 맡고 준비하신 형님이 기독교 신자여서 모든 예식은 기독교식 예배 속에 진행되었으며, 제단에는 과일을 비롯해 음식물 하나 없는 것도 못내 섭섭했었다.    

이런 가운데 치러진 4일장 속에 나는 형제들로부터 문상객을 들먹거리면서, 술을 좋아 하니까 핑계로 마시고 있다는 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면서 나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모를 문상객들과 나의 의사를 굽히지 않고 마주앉아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장례식 날, 형님 집 앞에서 다시 큰 누님한테서 꾸중을 들었다. 

장지는 해변가에서 약 3,40분 산으로 올라간 가족 묘지였다. 진눈깨비로 아주 궂은 날씨였는데 하관 예배가 가까울 때는 햇볕까지 나면서 날이 풀리기 시작했다. "목사님. 저는 넷째 상주인데 찬송가는 아니지만 조가를 부르고 싶습니다. 천상병의 '귀천'을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세요. 네. 잘 알았습니다." 안장될 묘지로 가면서 나는 목사님께 부탁했다. 4일간 계속 마셔서 그렇지 않아도 목이 쉬었는데 노래를 부른다고는 했지만 걱정이 되었다. 나는 가사를 얼른 메모지에다 적어 두었다.

"다음은 넷째 상주님께서 어머니를 위해서 조가 '귀천'을 부르시겠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하관 예배를 마치고 마지막에 소개할 줄 알았는데 예배 도중에 넣어 주셨다. 나 자신의 놀라움도 컸지만 주위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노래 실력도 없는 내가 노래를 부른다고 하니 형제들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가슴 조이는 불안감의 놀라움이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같이 간 누이동생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 장례식 때 내가 좋아 하는 천상병의 '귀천'을 부르고 싶다고 해서 장사익이 부른 CD를 준 적이 있었다.

나는 숨을 길게 한번 쉬고 나서 '귀천'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가사는 후렴처럼 일부러 두번 넣었다. 무사히 노래를 마쳐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형님, 정말 놀랐습니다. 우선 상주 입장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조가를 부르다니 그 용기에 놀랐습니다. 음정의 옳고 그름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교회도 다니면서 성가대 조가도 듣곤 합니다만 오늘 형님의 조가는 최고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참석하신 모든 분들은 형님 노래를 들은 것만으로도 만족해 할 것입니다." 플루트를 전공으로 연주하고 지휘자로 활약하는 동생 우신의 음악가 평에 누구 한 사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는 나의 노래를 듣고 눈물이 나오더라고 했다. 음치이지만 목소리가 커서 불렀을 뿐이었지만 형제들의 핀잔을 누그러뜨리고 감동을 주게되어서 다행이었다.

한국의 '어버이 날'은 5월 8일이지만, 일본의 '어머니 날'은 5월 두번째 일요일이어서 오는 12일이다. 어머니한테는 청개구리 같은 자식이었지만,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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