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안길에서 만나는 4․3의 진실] (5) 제주읍의 옥성정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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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안길에서 만나는 4․3의 진실] (5) 제주읍의 옥성정 요정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6.1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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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학 제주4·3사건 재정립시민연대 교육홍보위원장
고 박진경 대령 승진 축하연이 벌어졌던 구 옥성정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승진 축하연이 열렸던 옥성정

1948년 6월 13일부터 6월 17일까지 5일간 한라산 백록담을 중심으로 포위 토벌하는 제11연대(연대장 박진경)의 남로당인민유격대(군사총책 김달삼)에 대한 제4차 진압·토벌작전이 끝나게 되자 그동안 미루어 왔던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승진 축하연이 제주읍내 최고 요릿집(요정, 탐라여관 간판달린 건물)인 옥성정에서 당시 도지사인 임관호 주최로 열리게 되었다. 

고 박진경 대령과 옆 모습
고 박진경의 마쓰모도공병예비사관학교 수료후 견습사관 시절. 고 박진경 대령 옆 모습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출신으로 오사카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를 1944년 9월에 졸업하자마자 일본학도특별지원병에 강제로 징집되어 치바현 마쓰도공병예비사관학교 수료 후 일본군 공병 소위 임관 후 제주도에서 근무 요새 구축으로 근무한 바 있다.

해방이 되자 귀향하여 1945년 10월 부산의 우파 사설군인단체인 군관학교가 발족하자 교관이 되었다.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창설 시 사병으로 1946년 1월 29일 ‘군번 1500001’로 자진 입대한 후 이등상사 때 미 고문관 측의 권고로 군사영어학교를 거치지 않고 1946년 4월 25일부 현지에서 ‘군번 10091’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5연대 부관으로 근무하게 된다.

1947년 6월 소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부관, 1947년 9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거쳐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제9연대장으로 취임한다.

박진경 중령은 제주 부임 한 달 만인 6월 1일부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한다.

박진경 대령은 제주4·3사건을 슬기롭게 진압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교였으며 선 선무공작, 후 진압 작전을 전개하였다.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각급 지휘관에게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지시와 동시에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단위 대대장들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라는 평가는 그 당시 박진경 제11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주월 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증언한 바 있다.

승진 축하연을 주최한 임관호는 제3대 도지사로 1948년 5월 28일 취임하였다. 1947년 3·1 불법 시위사건으로 남로당 지령을 받은 제주도내 각 직장은 총 파업을 단행하였다. 임관호 도지사는 당시 제주도청 산업국장으로서 도청 파업투쟁 위원장을 맡았다가 구속까지 되었던 특이한 전력을 가진 도지사였다.

임관호 도지사는 1948년 6월 17일 밤에 제주기관장과 미 군정요인 및 제11연대 참모 및 대대급 지휘관들을 초청하여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진급 축하연을 최고급의 요릿집인 옥성정(요정)에서 성대히 열었다.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일부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했으나 남로당 인민유격대 진압과 토벌 작전으로 인하여 축하연은 뒤로 미루어 왔었다.

제11연대 지휘관 참모들로 작전회의 종료 후 기념 촬영. 연대본부인 제주농업중학교 본관 건물로 뒷면에 검은 천막들이 보인다. 왼쪽부터 뒷줄 최갑중 대위(인사과장), 임부택 대위, 박진경 제11연대장, 김종면 중령(정보과장), 백선진 소령(군수과장), ○○○. 앞줄은 대대장 요원으로 보인다.
제11연대 지휘관 참모들로 작전회의 종료 후 기념 촬영. 연대본부인 제주농업중학교 본관 건물로 뒷면에 검은 천막들이 보인다. 왼쪽부터 뒷줄 최갑중 대위(인사과장), 임부택 대위, 박진경 제11연대장, 김종면 중령(정보과장), 백선진 소령(군수과장), ○○○. 앞줄은 대대장 요원으로 보인다.

박진경 대령 진급은 4개 전투대대(제11연대는 3개대대로서 제1대대는 4월 20일에 제5연대에서 제주도에 파견된 오일균 대대이고, 제2대대(3연대 1개중대, 4연대 1개중대, 제6연대 2개중대로 편성)는 김도영 소령이 지휘하였으며, 제3대대(2연대 2개중대, 3연대 1개중대, 4연대 1개중대로 편성)는 대대장이 공석이었고, 제9연대 1대대도 작전상 합편하였다.)를 지휘함으로서 여단장급으로 격상된 데 따른 직위 진급 성격의 조치였다.(나종삼, 『제주4·3사건의 진상』,서울 : 아성사, 2013, p.194.)

당시 제11연대 본부 보급과 급양계 요원으로 이날 파티의 부식을 직접 준비했던 김두표[제민일보4·3취재반. 4·3은 말한다 ⓷. (서울 : 도서출판 전예원. 1995). p.196.]는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6월 17일 대령 승진 축하연의 요리 장만에는 연대본부 취사병뿐만 아니라 읍내 전문 요리사들까지도 동원됐다. 그날 파티는 관덕정 북쪽의 2층 요릿집에서 있었는데 나는 급양계 요원으로 직접 부식을 준비했고 요리도 했어요. 본부 요원뿐만 아니라 읍내 요리사들도 차출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린 졸병이어서 파티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음식만 장만한 뒤 부대로 돌아왔지요.”

6월 17일 승진 축하연이 벌어진 옥성정 요릿집에는 제주읍 기관장과 미군 장교, 제11연대 일선 지휘 간부 임부택을 비롯하여 모두 참석했고 통위부 파견 장교들인 김종면, 백선진, 최갑중 등이 참석하여 아주 여러 차례 독한 고소리 술잔이 돌았고 한껏 거나하게 취해들 있었다.

박진경 대령은 평소에 술을 잘 마시지를 못해 자정까지 못 미친 시간에 다른 참석자들보다 먼저 제11연대 연대 작전 본부가 있는 제주농업중학교 숙소로 돌아왔다.

박진경 연대장은 유서가 깊었던 제주농업중학교를 제11연대 본부로 사용하였다.

박진경 대령의 주량에 대하여 그와 같이 해방과 동시에 부산에 설치된 사설 군사단체인 ‘군관학교’를 위시하여 부산 제5연대에 병사로 같이 자원 입대하여 3년을 같이한 예비역 대령 출신인 김청기, 김구영, 서갑성씨들은 이구동성으로 “박진경 연대장은 술은 거의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술 마시는 것을 못봤다. 절대로 안 마셨다”라고 증언하였다.

이에 앞서 남로당 제주도당은 5월 10일 제헌의원 선출 총선거일 날 제주읍에서 군책 김달삼, 조직책 김양근과 제9연대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나희필, 제9연대 정보주임 이윤락 소위 등이 모여 남로당 아지트에서 밀담하였다. 이 밀담자리에서 박진경 연대장 이하 남로당에 반동 장교들을 숙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암살모의를 한 적이 있었다. 이는 박진경 연대장 부임 4일 만의 일이다.

김달삼의 레포(연락원)(제11연대 배경용 하사이다.)를 통해 박진경 대령 암살 지시를 받은 문상길 중위는 암살을 준비하기 위해서 남로당 인민유격대 진압·토벌 작전의 제3~4차 공격작전에 빠지고 또 꾀병을 부려 위생병 손선호를 대동하여 제주도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문상길 중위는 남로당 세포인 정보계 양회천 이등상사를 불렀다. 「17일 저녁 축하연에 참석한 후 연대 사무실에 돌아오는 시간을 잘 포착하여 반동의 거두 박진경을 사살하라. 국방경비대가 우리 인민 해방군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은 김달삼 동무의 지령이다.」라고 지시를 내렸다.

양회천 상사는 그 즉시 손선호(22세) 하사, 배경용(19세) 하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20세) 하사, 강자규(22세)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을 은밀히 만나 17일 밤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다는 의논을 하였다.

옥성정에서 축하연이 있는 6월 17일 연대본부 주번 사령은 제1중대장 정○○ 대위이고, 주번 부관은 정보과 선임하사관 최○○ 상사였다. 남로당 세포 양회천 상사는 세포원들을 신상우 하사의 거처로 은밀히 불러 각자에게 주어진 임무를 부여하고 모든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라고 하고 헤어졌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암살시 사용한 같은 종류의 M-1 소총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암살시 사용한 같은 종류의 M-1 소총

지시를 받은 남로당 세포 사병들은 17일 밤 9시가 지나면서 초조해 나갔으며 사살 담당을 맡은 손선호 하사( 경북 경주 출신으로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대구폭동에 가담하였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국방경비대 대구 제6연대 3기생을 입대하여 남로당 프락치 활동을 하다가 1948년 3월 부산 주둔 제5연대에 하사관학교에 위장 입교하였다. 1948년 4월 20일 제주4·3사건 진압 토벌 파견군 명령으로 제주에 주둔한 일명 오일균대대 요원이었다.)는 M-1소총에 8발의 실탄을 장전 하면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제주시 중앙로 28길. 제11연대 본부 정문이 있던 자리이다.

오전 3시가 되자 배경용은 손전등을 들고 M1소총을 소지한 손선호와 같이 사무실에서 살금살금 기어나와 연대장실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머지는 잠든 연대장실의 보초병과 당번병을 대신하여 연대장실 밖에서 보초를 섰다. 연대장 사무실 유리창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배경용은 손전등으로 연대장 상반신을 비추니 연대장은 세상 모르게 깊은 잠이 들어 자고 있었다.

손선호는 안전핀을 풀고 M1 소총의 총구를 연대장의 상반신을 겨누고 방아쇠를 서서히 당겼다.

「팡!」소리 하나로 만 29세 나이에 대령으로 승진한 지 몇 날 안 되어 젊은 아내를 서울에 두고 유언도 없이 비명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은 18일 새벽 3시 15분, 남조선에서 가장 유능하다는 훌륭한 장교 한 명이 창군 이래 제일 먼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하에 남로당 군인 프락치에 의해 암살당했다.

즉각 부대에 비상이 걸렸다. 군 내부의 소행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대하여 당국에서는 30만원 2계급 승진의 현상금을 내걸고 범인 체포에 불철주야 노력을 하였다.(서울신문. 1948년 7월 20일)

암살사건 수사에는 헌병대, 경찰 이외에도 미군 CIC(방첩대), CID(범죄수사대) 요원들이 투입되었다.(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자료집8[미국자료편⓶]. (서울: 금성문화사, 2003) p.151.)

당시 제11연대 인사참모 최갑중(육사 1기. 전 예비역 육군 준장 최갑중, 경남김해·39사단장·경남지사 역임) 대위의 회상을 본다.

무공훈장증

‘나는 연대 인사참모로서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이라는 급변을 당하여 며칠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지쳐 쓰러지다시피 책상에 엎드려 잠에 취해 자다가 우연스럽게 내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편지는 바로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을 지목한 투서였다.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인 최 상사를 조사해 보시오.’라는 내용이었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암살범으로 연행된 사람은 문상길 중위를 시작으로 암살 사건 연루자들[국제신문 1948년 8월 10일. 박(朴) 대령 살해범 / 고등군법회의 개정]은 11연대 소속의 신상우(중사. 20세) 손선호(하사. 22) 배경용(하사. 19) 양회천(2등상사), 이정우(하사. 미체포) 강자규(하사), 황주복(하사), 김정도(하사) 등 모두 9명이었고 이들중 이정우[문창송편.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제주: 대림인쇄사, 1995), p.82.]는 M-1소총 1정을 가지고 탈영하여 한라산에 있는 남로당 인민유격대에 들어갔다. 문상길의 약혼녀 고양숙도 연행되었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의 장례식이 6월 22일 오후 2시 서울 남산동에 있는 통위부 사령부(현재 서울시 퇴계로26길 36)에서 통위부장을 비롯한 부대 관계자와 유가족,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등 각계인사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부대장(部隊葬)으로 치러졌다.(경향신문, 1948년 6월 23일) 이는 후일, 박진경 대령의 부대장은 건군 사상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6·25 한국전쟁이 한창인 1950년 12월 30일 고 박진경 대령에게 ‘을지무공훈장(대통령령 제385호 무공훈장령 1950. 10. 18 공포)’을 수여하였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유해는 1969년 12월 23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교 54묘역 4묘판 묘비번호 2140)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한편 제주도에서는 1952년 11월 7일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주관으로 제주 4·3폭동 사건을 단기간 내에 평정한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의 빛나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추도비를 현재 전농로에 있는 옛 제주농업중학교 터, 11연대 본부가 있던 곳인 제주방송국 뜰에 세웠다. 지금의 교보생명 빌딩 근처이다.

1952년 10월 8일 제주신보 기사는 ‘박(朴)대령 기념비 오늘 건위(建委) 결성’ 제하에

“금(今) 8일 하오 1시 본사 사무실에서 각계인사를 초청하고 기보(旣報)한 군원회(軍援會) 본도지부 주최로 추진 중인 4․3사건 수습공로자 박진경(朴珍景) 대령의 기념비 건립준비위원회를 결성한다.”

(왼쪽 추도비)첫번째 장소인 현재 전농로에 있는 옛 제주농업중학교 터, 제11연대 본부가 있던 곳인 제주방송국 뜰에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추도비가 세워졌었다. (오른쪽 추도비) 두번째 추도비 장소인 사라봉.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 원형 모습으로 제주시 사라봉충혼묘지에 있었던 추도비.  

1952년 10월 24일자 제주신보 기사는 ‘불멸의 공훈을 추념 / 고(故) 박대령 추도비 내(來) 7일 제막식’ 제하에

“내(來) 11월 7일 고 박진경(朴珍景)대령 추도비 제막식이 거행된다. 4․3사건 발발 당시 11연대장으로서 공비 토벌과 민심 선무에 많은 공훈을 남긴 고 박진경 대령을 추도하여 앞서 도내 각 기관장과 유지들이 회합, 총장 9척의 자연석비를 건립키로 결정하였음은 기보(旣報)한 바이거니와 그간 군경원호회를 비롯한 각계의 진력으로 공사는 예정보다 급속한 진척을 보아 석비 조각을 완료, 수일 내에 제주방송국 내에 건립될 것이다. 이 건립 장소는 고(故) 박(朴)대령이 전사한 장소인 것이다.”

(왼쪽) 3번째 장소인 제주시 충혼묘지 추도비. (오른쪽) 4번
째 추도비 이전 장소인 제주시 연동 산 132-1번지의 추도비.

1953년 6월 30일자 제주신보 기사는 ‘고(故) 박진경(朴珍景) 추도비 환경 정리에 장병들 땀’ 제하에

“29일 당지 병사 구사령부 508특무대 육군헌병대 장병들이 제주방송국 경내에 건립되어 있는 고 박진경(朴珍景) 대령 추도비 환경을 아담하게 정리하였다. 고 박진경 대령은 4․3사건 당시 본도에서 제11연대장으로 있으면서 공비 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다가 순직한 호국의 신이며 추도비 주위가 정리되어 있지 않음을 느낀 당지 주둔 육군부대 장병들이 땀의 봉사로써 고 박대령의 전공을 추념하게 된 것이다.”

이 추도비는 원래 KBS방송국 안 제11연대본부 자리에 1952년에 세워졌다. 그 후 제주시 사라봉 충혼묘지가 조성되면서 옮겨가서 있었는데 일주도로 확장으로 또 어승생악 지경의 제주 충혼묘지로 옮겨졌다가 2021년 12월 제주호국원 신설로 인하여 현재 제주시 연동 132-2번지 자리에 최종 옮겨졌다. 총 4회에 걸쳐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는 이동하게 되었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산 19-2 제주 충혼묘지에 있었던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로 제주시 사라봉 충혼묘지에 있었던 추도비를 노형동의 제주시 충혼묘지로 옮겨와 1985년 6월 다시 세웠다고 하며, 원비는 추도비 앞에 묻었다고 전한다.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의 수난 모습.

2021년 12월 8일 제주시충혼묘지 부지가 제주호국원의 부지로 들어가자 고 박진경대령추도비는 또 다시 제주시 연동 132-2로 옮겼와 있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를 제주시 연동산 132-2로 옮겼더니 추도비가 파손되는 현상이 일어났고 심지어 철창 감옥이 설치되는 등 수난이 많았다.

2022년 3월 11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추도비에 철장 감옥을 설치한 단체들은 제주민예총(이사장 김동현), 제주주민자치연대, 제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노동자역사한내제주위원회, 제주다크투어, 제주통일청년회, 제주4·3연구소(대표 허영선), 제주아이쿱소비자생활협동조합, 제주여민회, 무명천진아영할머니삶터보존회, 제주참여환경연대, 서귀포시민연대, 제주문화예술공동체, 노무현재단 제주위원회, 민주노총 제주본부,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등 도내 16개 단체가 참여했다.  2022년 3월 10일 추도비에 철창을 설치했다가 현재는 제거된 상태다.

16개 단체가 2022년 3월 10일 설치했던 박진경 대령 추도비 철창, 지금은 제거돼 있다. 

끝으로 4·3특집 『암살 1948』KBS제주(2021. 04. 02) 저녁에 방송한 내용을 보면 박 모모는 “문상길 중위는 당시 국방경비대 내부의 일개 군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한라산 무장대를 향해서 전단도 뿌리고 평화협상을 시도하는 그 과정에서 문상길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게 아닌가? 그렇게 보입니다.” 이야기를 했고, 김 모모는 “문상길의 행동에는 적어도 자기 확신이 있는 확신에 찬 확신범이었다. 자기 목숨을 내놓고 상관을 암살했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 했다. 이렇게 볼 수가 있는 것이죠. 바로 그 점이 문상길을 단순하게 상관을 암살한 암살범이 아니라 동족, 특히 제주도민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던 사람으로서 역사의 법정에서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라고 이야기 했다.

박진경 대령은 미군정(제6사단 브라운 대령)의 지시대로 제주도 치안 질서 도민들의 생활 안정화를 위한 진압·토벌 작전을 전개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문상길이 확신범이고 자신만만했다면 왜 박진경 대령 암살 즉시 나타나지 않았을까?

문상길은 서귀포에 있는 약혼녀 고양숙 집에서 몸이 불편해 땀을 흘리며 부적을 붙이고 누워서 신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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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악전투 2024-06-15 20:45:01
1948년 8월 11일 호남신문기사를 보면 "검사측으로부터 제시된 기소 이유 및 범죄사실과 증인들의 진술에 의하면 제9연대(제주도) 중위 문상길은 모슬포 산중에서 산사람 사령관 김달삼과 만나 朴대령을 살해할 것을 지령받았으며 직접 취침중의 朴대령을 6월 18일밤 중 미군보병총으로 죽인 것은 韓善鎬, 조敬用 2명으로 되어있다."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