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학 제주4.3진실규명도민연대 사무총장 약력보고
- "그의 부하 채명신장군, '선 선무공작, 후 진압작전' 펼것 증언"
제주4.3사건 당시 공비토벌 임무를 수행하던 중 암살당한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제76주기 추모식이 18일 오전 10시 30분 서울국립현충원 54묘역에서 거행됐다.
추모식에는 고 박진경 대령의 유가족과 박진경대령유족회(금초회), 해군사관학교구국동지회,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제주4·3경찰유족회, 제주4·3사건진실규명을위한도민연대, 프리덤칼리지장학회,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전군구국동지연합회와 한국NGO연합, 사단법인 국군명예회복운동본부, 실향민중앙협의회 회원등 100여명이 참여했다.
추모식에서는 전군구국동지연합회 장낙승 회장의 추모사, 이승학 제주4·3사건진실규명도민연대 사무총장의 약력보고,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나종삼 고문의 인사말, 유족 대표 박철균의 인사, 이영란 성악가의 ‘기다리는 마음’ 추모 노래, 헌화·분향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이승학 제주4.3사건진실규명도민연대 사무총장은 약력보고를 통해 고 박진경 대령의 업적에 대해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고 박진경 대령은 1946년 1월 부산국방경비대 제5연대 창설시 사병으로 자진 입대하고, 동년 4월 25일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5연대 부관이 됐고, 동년 12월 중위, 1947년 3월 대위, 동년 6월 소령 진급하여 국방경비대총사령관 부관, 1947년 9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거쳐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제주 주둔 제9연대장으로 취임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 부임 25일 만인 6월 1일자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박진경 대령은 제주4.3사건 진압에서 ‘ 선 선무공작, 후 진압작전’을 전개해 각급 지휘관에게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선 안 된다’는 확고한 지시와 동시 그의 부하였던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이‘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해 단위 대대장들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
박진경 대령의 제주도 재임기간은 1개월 13일(43일)에 불과하고, 실제 부대를 장악하고 작전을 지휘한 기간은 이보다 더 짧다고 했다.
5월 10일(총선거일) 제주읍에서 남로당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남로당프락치 오일균 대대장 등 양측 5명이 비밀 회합하여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기로 합의한 것이 박진경 부임 4일만에 이뤄졌다.
1948년 6월 17일 저녁 제주읍내 고급 요리집 옥성정에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진급 축하연이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고, 자정 무렵 제11연대본부가 위치한 제주농업중학교 연대 집무실에 돌아와 야전침대에서 잠이 들자, 남로당 프락치 군인에 의해 암살됐다. 이때가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이다.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위생병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9명이 가담했고, 그가운데 손선호 하사가 M1소총으로 박진경 대령을 저격했다. 박진경 대령은 29살에 삶을 마감한다.
1948면 8월 11일자 국제신문, 현대일보, 남조선민보, 한성일보, 대한일보, 새한신보, 전라도 광주 호남신문 등이 ‘박진경 대령 암살은 김달삼의 지령’이라고 검찰관 기소문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특히 이승학 사무총장은 “숙군의 시초는 제주4.3사건 당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암살되면서 암살범 문상길 중위 일당을 체포하는 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이어서 여수 14연대 반란 등의 계기로 육군본부는 바로 남로당의 대대적인 숙군을 하게 되며, 이후 군 입대자에 대한 사상검열이 강화되었으며 좌익 혐의자에 대한 검거가 군 전체로 확산됐다“고 보고했다. 이승학 사무총장은 ”숙군의 결과 국군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국군 내의 좌익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6.25한국전쟁 시 국군은 전쟁 초기의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돼 승리로 이끌게 됐다“고 보고했다.
제11연대장 故 박진경 대령 (1918. 12. 22 ~ 1948. 06. 18) 약력 보고서(전문) 제11연대장 故 박진경 대령님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출신으로 진주고보를 졸업하시고 1942년 4월 7일 오늘의 일본 오사카외국어대학교 전신인 오사카외사전문학교 영어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성적이 줄곧 1등을 하여 1944년 9월에 수석으로 졸업하니 일본학도특별지원병에 강제로 징집되어 치바현 마쓰도공병예비사관학교 수료 후 공병 소위 임관 후 제주도에서 근무 요새 구축중 해방이 되자 귀향하여 1945년 10월 부산의 우파 사설군인단체인 군관학교가 발족하자 교관이 되었으며 부산 국방경비대 제5연대 창설 시 사병으로 1946년 1월 29일 군번 1,500,001로 자진 입대하자 주위 사람들이 놀라자 이때 사병 박진경은“나라가 해방되어 독립한 이 마당에 사병이면 어떻고 장교면 어떻냐”하면서 나라사랑의 마음을 나타내었습니다. 그 후 미군정으로부터 “일본통치하에서 습득한 공병기술을 신생 조국을 위해서 최대한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주위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군사영어학교를 거치지 않고 1946년 4월 25일부 현지에서 군번 10,091,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제5연대 부관으로 근무합니다. 군인 박진경은 사병때부터 연대 부관을 마칠 때까지 미군 야전 교범을 한글로 번역하여 전술 교육에 많이 기여하였으며, 대학에서 익힌 영어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미군과 수시 접촉하여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물려 받은 노후된 무기와 장비를 미군의 최신식무기로 바꾸어 전력증강에 기여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던 건군 초기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 후 꾸준한 노력으로 1946년 12월 중위, 1947년 3월 대위, 1947년 6월 소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총사령관 부관, 1947년 9월 중령으로 진급하여 국방경비대총사령부 초대 인사국장을 거쳐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 후임으로 제주 주둔 제9연대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 부임 25일 만에 6월 1일부로 중령에서 대령으로 진급하였습니다. 박진경 대령은 제주4·3사건을 슬기롭게 진압할 수 있는 유능한 장교였으며 선 선무공작, 후 진압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항시 작전에 돌입하기 직전 각급 지휘관에게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지시와 동시에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하여 단위 대대장들에게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라는 긍정적인 평가는 그의 부하들이 내리고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그 당시 박진경 제11연대장 밑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장군은 증언하였습니다. 박진경 대령이 제주도 재임기간은 1개월 13일(43일)에 불과합니다. 실제 부대를 장악하고 작전을 지휘한 기간은 이보다 더 짧습니다. 5월 10일(총선거일) 제주읍에서 남로당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남로당프락치 오일균 대대장 등 양측 5명이 비밀 회합하여 정보교환, 무기공급, 토벌작전 사보타주, 탈영병 적극 추진, 특히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하기로 합의, 이것이 박진경 부임 4일 만에 남로당 지령하에 암살계획을 결정한 것입니다.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1948년 6월 17일 저녁 제주읍내에 있었던 고급 요릿집 ‘옥성정’에서 그의 대령 진급 축하연은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 그리고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고 합니다. 박진경 대령은 술도 잘하지 못한 편이어서 자정 무렵 다른 참석자들보다 먼저 돌아와서 제11연대본부에 위치한 제주농업중학교 영내의 집무실에 마련된 야전침대에서 잠이 들자, 남로당 프락치 군인에 의해 암살되었는데,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위생병 손선호 하사 등 일당 8명이 침실 밖에서 일부가 경계를 하는 동안 일부는 창문을 열어 손전등을 비추고 취침중인 박진경 대령을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됐던 남로당 사병 프락치 손선호 하사는 M-1 소총으로 상관인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하였습니다. 잠시 후 위생병이 달려와 울면서 시체를 씻어냈는데 M-1총탄이 심장과 두개골을 정확히 관통하였습니다. 직접 총을 쏜 사병은 울면서 박진경 대령의 피를 씻어내던 부산 5연대 출신 위생병 손선호 하사였습니다. 젊은 고급장교로 유명을 달리한 박진경 대령의 그때 나이는 만 29세였습니다. 박진경 대령의 암살 사건을 주도한 이는 남로당 장교 프락치였던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인 문상길 중위였고, 암살 연루자들은 문상길 중위를 비롯해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모두 9명이었고, 관련자 중 이정우는 수사망이 좁혀오자 M-1총을 소지하고 남로당반란군측에 합류하였습니다. 1948년 8월 11일자 국제신문, 현대일보, 남조선민보, 한성일보, 대한일보, 새한신보, 특히 전라도 광주 호남신문 등에서도 박진경 대령 암살은 김달삼의 지령이라고 검찰관 기소문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문상길, 신상우, 손선호, 배경용 등 4명은 8월 14일 열린 군법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했으며, 양회천에게는 일체의 급료 몰수와 무기징역을, 강승규에게는 5년 징역을, 황주복·김정도 하사에게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선고를, 9월 23일 사형 집행 직전 신상우, 배경용은 특사에 의해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한 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됐습니다. 최근에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를 훼손하고 철창 감옥을 설치하는 등 제주 좌파들에 의해 박진경 대령님의 명예가 추락되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대한민국 정체성이 흔들리게 한 일이 또한 있었습니다.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2022년 11월 경기도 고양시 망월산 인근에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대한 진혼제가 있었고. 작년 9월 22일에는 전주형무소터에서 프락치 양회천 이등상사 진혼제를 한 것을 보면 아직도 제주4·3사건은 종료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숙군의 시초는 제주4․3사건 당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암살되면서, 암살범 문상길 중위 일당을 체포하는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여수 14연대 반란 등 계기로 육군본부는 바로 남로당의 대대적인 숙군을 하게 되며, 이후 군 입대자에 대한 사상검열이 강화되었으며, 좌익 혐의자에 대한 검거가 군 전체로 확산되었습니다. 비록 고 박진경 대령님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지만, 숙군의 결과 국군은 정치적으로 균일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숙군은 국군 내의 좌익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6․25 한국전쟁 시기 국군은 전쟁 초기의 부진함에도 불구하고 내부로부터 와해 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고 박진경 대령님의 죽음은 헛되지 아니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례식은 1948년 6월 22일 우리나라 국군 최초 육군장 제1호로 남산공원 광장에서 엄숙히 거행되었고, 1950년 12월 30일 6·25한국전쟁 때 나라에서는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1952년 11월 7일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주관으로 제주4·3폭동 사건을 단기간내에 평정한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의 빛나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추도비를 현재 전농로에 있는 옛 제주농업중학교 터, 11연대 본부가 있던 곳의 제주방송국 뜰에 세웠습니다. 이상으로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님 약력 보고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