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 달 유감… 돌볼이 없는 추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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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유감… 돌볼이 없는 추도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6.30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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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학(제주4.3사건 재정립 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이승학 4.3사건재정립시민연대교육정립위원장

명예를 더럽히기 위해 추도비에 철창감옥을 설치하고, 추도비를 이곳저곳으로 옮기며, 이젠 아예 충혼묘지나 호국원 등에서 쫓겨나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여지는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올해 6월 현충일에도 찾는 이 하나 없고, 덤벙한 도로변 풀섶 속에 묻혀 나라를 위해 몸바친 국가유공자의 종말을 더욱 씁쓸하게 한다.

2024년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보내며 느끼는 나만의 아픔인가?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제주4ㆍ3사건 당시 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으로 1948년6월 1일자로 대령으로 진급하자, 그동안 미루어 왔던 진급축하연을 1948년 6월 17일 저녁 제주읍내의 ‘옥성정’에서 제주도지사 주관으로 열었다. 미군 장교와 11연대 참모, 그리고 통위부에서 파견된 장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철창에 갇혔던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

박진경 대령은 술도 잘하지 못한 편이어서 자정 무렵 다른 참석자들보다 먼저 돌아와서 제11연대본부에 위치한 제주농업중학교 영내의 집무실에 마련된 야전침대에서 잠이 들자, 남로당 프락치 군인에 의해 암살되었다.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를 받은 위생병 손선호 하사 등 일당 8명이 침실 밖에서 일부가 경계를 하는 동안 일부는 창문을 열어 손전등을 비추고 취침중인 박진경 대령을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됐던 남로당 사병 프락치 손선호 하사는 M-1 소총으로 상관인 박진경 연대장을 저격하였다.

박진경 대령은 예하 지휘관들에게 "100명의 폭도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양민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지시와 함께 주민들의 민심을 돌리기 위해 선무공작을 강조하였다. 박 대령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주 남로당 군사총책 김달삼과 국방경비대 남로당 프락치 오일균 대대장 등은 야합하여 '반동의 거두 박진경 연대장 암살'을 합의하였고, 이들의 사주를 받은 모슬포대대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의 지시에 따라 손선호 하사 등 일당 8명이 6월 18일 새벽 3시 15분경 M1 소총으로 박 진경대령을 저격하여 향년 29세에 순직하게 되었다. 암살 연루자들은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배경용 하사, 양회천 이등상사, 이정우 하사, 신상우 하사, 강승규 하사, 황주복 하사, 김정도 하사 등 모두 9명이었고 이 중 이정우 하사는 남로당반란군 측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그 후 암살을 주도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9월 23일 경기도 수색의 한 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故 박진경 대령의 추도비가 훼손당하고 철장 감옥을 설치하는 등 박 대령의 명예가 추락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2022년 11월 경기도 고양시 망월산 인근에서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에 대한 진혼제가 열리는 등 국군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 있어 크게 우려되고 있다.

6월 22일 국방경비대사령부에서 부대장으로 엄숙히 거행되고, 1950년 10월 18일 대통령령 제385호로 을지무공훈장 수훈을 한다.

제주도에서는 1952년 11월 7일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주관으로 제주4·3폭동 사건을 단기간 내에 평정한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의 빛나는 공훈을 기리기 위해 현재 전농로에 있는 옛 제주농업중학교 터, 11연대 본부가 있던 곳인 제주방송국 뜰에 추도비를 세웠다. 지금의 교보생명 빌딩 근처이다.

이후 추도비는 제주시 사라봉 충혼묘지가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또 일주도로 확장으로 어승생악 지경(제주시 노형동)의 제주충혼묘지로 옮겼다가 2021년 12월 제주호국원 신설로 인하여 현재 제주시 연동 132-1번지 자리에 옮겨졌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는 4회에 걸쳐 이곳으로 옮겨졌고, 최근에는 제주 도내 일부 단체들이 추도비에 ‘철창감옥’을 씌웠다가 철거하는 일이 있었다.

1948년 4·3사건이 발발하기 전후 사회상에 대해 잠시 살펴봄으로써 제주4.3사건이 어떤 성격의 사건인지를 가름할수 있을 것이다.
4.3사건이 발발하기 1년여 전인 1947년 3월 1일 3만여 관중이 참여하는 무허가 집회인 삼일절 기념식이 제주북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다. 기념식 후 행사 참가자들이 대오를 이뤄 시내 가두 행진에 나서며 관덕정에서 질서유지를 하던 기마경찰대 발포사건으로 6명 사망, 6명 중상 사건이 발생한다. 좌파는 반경찰, 반우익 운동으로 확산, 남로당은 1947년 3월 5일 ‘3·1사건투쟁위원회(위원장 김용관 하귀교교장)’를 결성한 데 이어 읍면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3월 10일을 기해 전도 총파업 지령을 내렸다.

제주도 남로당이 3.1발포사건을 빌미로 야기한 1947년 3월 10일 제주도 총파업은 북제주군청을 제외한 제주도청, 군, 읍, 면사무소 등 23개 기관을 비롯해 통신기관, 은행(식산은행 등 8곳), 운송업체, 공장 근로자, 학교(제주농업학교 등 중학교 13개교, 제주북교 등 초등학교 92개교),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 등 166개 단체 4만 12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파업이다.

또한 남조선노동당은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선거(5.10총선)를 방해하기 위해 2·7투쟁을 전국적으로 일으키고, 제주도를 5·10 선거 반대 운동의 핵심지역으로 선택했다. 5·10총선거에서 총유권자 813만 2517명 가운데 96.4%가 선거인 명부에 등재되고 등록자 가운데 95.5%가 투표에 참가했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북제주갑선거구와 을선거구에서는 투표율 미달로 선거가 무효화되고, 남제주선거구에서 오용국이 제헌의원에 당선됐다.

제주4·3사건을 전후한 제주도의 사회상은 어수선한 사회분위기였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은 나라를 위해 헌신 봉사한 자들에 대해 국가와 국민이 최대한 예우를 다하는 시기다. 호국원과 충혼 묘지를 찾아 산화한 국가유공자들에 존경의 예를 표한다. 보훈기관은 물론 각급 기관과 유관 단체는 크고 작은 기념행사를 열어 남아있는 유족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는 위로와 격려를 보내고, 선양함으로써 국민들에 대해서 애국의 길이 숭고함을 보여주는 일들을 한다.

제주4·3사건을 진압하여 을지무공훈장을 수상한 국가유공자 고 박진경 대령 추도비를 바라보며, 국기 확립과 관련해 도대체 보훈기관이 하는 일을 생각해 본다.

제주4·3사건에 대한 접근이 시대를 달리하며 달라져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곱씹어봐야 할 것이다.

분명 대한민국은 현재 남과 북이 분단돼 있음을 간과하여선 안 된다.

『四三眞相』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박진경 연대장 피살 이후 7월로 들어서며 제주도민은 밤낮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다. 밤이면 폭도가 두려워 울담 밑이나 돼지막 같은 데서 숨어지내다가 새벽에야 집에 들어오면 경찰서에 호출될까 봐 집안에 앉아 있을수도 없고, 그렇다고 들녘에 나가자니 공비의 납치가 무서워 안절부절못하다가 쥐 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四三眞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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