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안길에서 만나는 4․3의 진실] (6)제주성안 이앗골의 조일구락부(제주극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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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안길에서 만나는 4․3의 진실] (6)제주성안 이앗골의 조일구락부(제주극장)터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7.0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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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 위원장
옛 조일구락부 터(제주극장터)

김일성을 명예의장으로 추대한 제주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4·3사건이 일어나기 전 제주도의 정치상황을 살펴보면 제주도에서는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무장해제를 위해서 진주할 때까지 제주도 경찰이나 일본군의 통치권 행사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이때 나타난 단체가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이다.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는 1945년 9월 10일 각 읍·면대표 100명 가까이 제주농업학교 강당에 모여 결성되어 위원장에 오대진이 선출되었다.

이 단체는 철저한 과거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인물들로 이루어진 좌익 일색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좌·우익 간에 분열이 생겨 1945년 10월 9일 안세훈, 오대진 등의 좌익계 인사에 의해 조일구락부(제주극장)에서 좌익 일색의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되었다.

1945년 9월 6일 서울에서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이 선언된 후 건준이 ‘인민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건준은 9월 7일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으며, 제주도에서도 9월 15일 제주향교에서 제주읍인민위원회를 결성하고, 9월 22일 제주농업학교에서 제주도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제주도인민위원회의 지도하에 각 읍·면의 보안대, 치안대, 기타 청년단체 등을 통합하여 9월 말 조선민주청년동맹(1945년 12월 10일 조일구락부에서 공산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위원장 문재진)가 결성되었다) 제주도위원회를 결성하고, 또한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조합 등을 결성해서 반미군정 내지 반미구국투쟁을 전개해 나간다. 특히 중학교의 좌익 학생들을 이용하여 동맹휴학, 시위 등의 형태로 나아갔다. 대표적인 것이 1946년 2월 10일에 성안길 무근성내 위치한 관덕정 광장에서 벌어진 반미·양과자 반대운동이다.

관덕정 광장
관덕정 광장

제주신보 1947년 2월 10일자(『제주신보』, 1947년 2월 10일자)

‘양과자 절대배격! / 1000여 학도 궐기 일대 시위 전개’ 제하에

“방금 노변에 혹은 점포 앞에 일석(一昔)을 회고케 하는 때아닌 양과자가 가경(可驚)할 고가로 번매(繁賣)되어 항간에 널어져 가는 현상에 감(鑑)하여 도내 중등학교 연맹에서는 10일 ‘조선의 식민지화는 양과자로부터 막자’라는 ‘슬로건’을 내걸어 동원된 제농(濟農), 오중(五中), 제중(濟中), 교양(敎養) 등 무려 천수백 명이 관덕정 광장에 집회 하에 ‘양과자 수입을 절대 반대하자’ 라는 아우성 천지를 울리게 외치며 일대 시위 행렬을 전개하였다.”라는 기사가 있었고

시위 학생들은 ‘양과자는 조선을 좀먹는 미제침략자들의 독약이다!’, ‘양담배를 비롯한 미제상품을 사지말고 팔지말라!’, ‘미제와 결탁하여 사리사복을 채우는 모리간상배(謀利奸商輩: 공익이나 상도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갖은 방법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는 사람. 또는 그런 무리)들을 일소하자!’, ‘학원의 자치에 대한 관권간섭 절대반대!’, ‘미제에 추종하는 친일친미반동을 단호히 배격하라!’ 등의 「프라카드」를 들고 제주도 미군정청(관덕정 광장)에서 시위를 전개하였다.(김봉현·김민주 공편, 『제주도인민들의 〈4·3〉무쟁투쟁사-자료집-』, 대판, 문우사, 1963. pp.30~31.)

이렇게 제주도민주청년동맹(위원장 김택수,후일에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위원장 강대석)을 개편된다)의 지원 하에 제농(濟農), 오중(五中), 제중(濟中), 교양(敎養) 등 중학생 1천수백여 명이 모여 ‘토롭프스’, ‘양담배’, 반대 시위 농성을 전개하여 미군정 반대와 미국(군) 반대 운동을 해나갔다.

1947년 2월 9일~1947년 2월 16일 (No. 75, 1947. 2. 20. 보고) 주한미육군사령부 기록에 보면

‘학생들 반미 시위’ 제하에

“1947년 2월 10일 오후 1시 - 학생 약 350명이 미군정부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자 미군정부대는 시위대를 해산하고 학생들을 제주(읍내)에서 내쫓았다. 나중에 학생들이 잔디에 불을 붙였으나, 불은 별 피해 없이 진화되었다.”(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 G-2 Weekly Summary(1945. 9. 9~1948. 11. 26)) 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면 공산청년동맹제주도위원회의 사주를 받은 좌익 학생들의 반미·양과자 반대운동이 심했음을 가히 짐작할 수가 있다.

조선인민공화국의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가 결성되는 가운데, 1945년 9월에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게 된다. 제주도에는 1945년 9월 중순경 공산청년제주도(島)위원회(위원장 문재진)가 결성된 후에 12월 9일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을 합쳐 남조선로동당으로 통합이 된다.

제주도에서는 1947년 2월 12일 무렵에 조선공산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는 남조선로동당전남도당제주도(島)위원회로 명칭과 간판이 칠성통에 내걸린다.

중앙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1946년 2월 15일, 16일 양 일간에 걸친 회의를 통하여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역사적 과업으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했다. 민전 결성의 성원심사에 있어서는 원칙은 아래 사항을 고수했다.(이재선, 『해방조선·Ⅰ』.(서울 : 과학과 사상, 1988, p.152.)

一.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적 정당 단체를 심사하여 그 대표 수는 비율제로 할 것

一. 친일파, 민족반역자 및 파쇼잔재를 재외할 것

一. 기성 정당의 법통고집에 개의치 아니할 것

一. 정당, 단체 외 무소속의 개인으로서 민중의 대표가 될 만한 인사

一. 각 지방의 대표

의장으로는 여운형, 허 헌, 박헌영, 김원봉, 백남운이 추대되었고 특이한 사항은 제주 출신으로 남로당제주도당 군사총책 김달삼의 장인 강문석, 여운형의 사위(여연구의 남편) 송성철, 제주도인민위원회 위원장 오대진 등이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391명 중에 끼여 있는 것이다.

제주에서는

“1946년 2월 17일 오후 5시 삼일기념행사준비회가 끝난 뒤를 이어 민주주의민족전선의 필요성에 대한 간담회를 개최하였는데, 안세훈을 비롯한 고창무, 김정로, 김용해 외 30여 명의 발기로 본도에 민주주주의민족전선을 불원간에 결성하기로 하였다 한다.”( 『제주신보』, 1947년 2월 18일자.) 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앗골 향사당
이앗골 향사당

2월 17일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를 결성한 후에 김두훈집의 간담회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을 논의한 것으로 보아진다.

대의원 500여 명이 참석하여 1947년 2월 23일 제주도립병원 서쪽 성안교회 앞길, 제주극장 가는 길인 이앗-골(이아-동, 貳衙洞, 제주중앙성당에서 인천문화당으로 이어지는 ‘이앗골’과 제주도립병원 서쪽 성안교회 앞 길, 옛날 제주극장으로 가는 길도 이앗골이란 설도 있다. 제주판관 집무실인 이아 관청으로 통하는 길을 중심으로 한 마을로, 원도심의 중심지로 2000년대 초까지 번성했던 곳이다. 이아는 수령의 지방행정을 보좌하는 일종의 지방자치단체 기관으로 판관의 집무공간인 찰미헌과 그 부속 건물군을 이른다.) 소재 조일구락부에서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자).

이앗골 조일구락부 가는 길

제주신보 1947년 2월 26일자

‘각종 사회단체 참가하고 ‘민전(民戰)’ 성대리 결성 / 의장단에 안세훈씨 외 2씨 추대‘

제하에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오랫동안 준비중이었던 제주도(濟州島)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결성대회는 지난 23일 상오 11시부터 도내 읍면 대의원, 각 사회단체 대표 등 315명, 방청객 200여 명의 참석으로 초만원인 가운데 이일선(李一鮮)( 친일승려 108인, 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 임혜봉 지음. 제2절 매스컴에 보도된 극성스러운 친일 승려들이라고 이일선을 기록하고 있다. 승려 이일선은 일본 창씨명은 미츠히코(孝井光彦)이다.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 선전동원부에서 활동하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3인 의장단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정광사에서 예비검속돼 산지포구에서 수장됐다.) 사회로 개막되어 묵념이 있은 다음 만뢰같은 박수리에 안세훈(安世勳)이 등단하여 ‘세계민주주의 체계에 입각한 모스크바 삼상의 결정은 민주과업을 진정하게 실천하게 되는 고(故)로 삼천만 동포의 한사람까지라도 민전 산하에서 최후까지 삼상회의 결정의 실천을 위하여 투쟁하여야 된다’는 개회사가 있어서 민전의 지향을 명시한 바 있었고, 임시집행부 선거로 들어가 의장단에 김시탁(金時鐸)(김시택과 김시탁은 동일인으로 일본으로 1949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1945년 9월10일 결성된 제주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 대표로 집행위원이 됐을 때의 이름을 김시택이고,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으로 있다가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으로 문도배와 함께 선출됐으나 12월 12일 개원식에 참석치 않고 사퇴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79쪽. 그의 딸 김세민은 북한에서 아나운서로 활약했고 김세철, 김세종 두 아들도 북한에 있고 이 중 한 명은 동구권 북한 대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김용해(金容海)(1945년 건국준비위원회 애월면 위원장, 1945년 9월 10일 제주농업학교에 모여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당시 산업부장), 고창무(高菖武) 3인과 의사진행계(議事進行係)에 김정노(金正魯)를 선출하였는데, 개회벽두에 긴급동의로 명예 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金元鳳), 유영준(劉英俊) 6인을 추대하고 김정노의 경과보고가 끝나자 긴급 동의로 광주시 남로당 결성대회에 격려의 메시지를 보낼 것, 박헌영 체포령 취소와 아울러 인민항쟁으로 말미암아 투옥된 열사를 즉시 무죄 석방하라는 항의문을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가결한 다음 김용해로부터 국내외 정세보고에 뒤이어 ‘우리 제주도에는 악질 경관이 적은 만큼 인민의 대중적인 분노와 증오심을 발휘할 조건이 많지 아니하였던 것은 다행이나 최근 악질 모리배의 도량과 이에 야합한 탐관오리로 인하여 인민의 분노와 증오심이 확대되고 있고 또한 중앙에서는 기독교의 원로 김창준(金昌俊)이 최근 민전에 참가하였다’는 구체적 설명이 있었다. 이어 내빈 축사에서 도지사 박경훈의 축사를 비롯하여 중앙문화협회 강창거(姜昌擧)의 격려사가 끝난 다음 김정노로부터 본 대회에 기여한 각 단체 메시지 낭독이 끝나자 긴급 동의로써 잠복 상태에 있는 제주도 남로당이 하루바삐 합법적 출현을 기하라는 희망을 피력한 바 있었고, 연달아 인민항쟁 당시에 무의식한 민중에 발포한 경관을 처벌하여 달라는 항의문을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하고, 인민항쟁에 쓰러진 투사들의 유가족 후원금과 눈앞에서 투쟁하는 현호경(玄好景) 강성렬(康星烈)에게 격려금과 의복 등을 보내기로 하여 성출된 금액이 3300여원에 달하였다. 다음 선언강령 피로(披露)가 있었고 위원선거가 있었다. 이어 토의사항으로 들어가 김정노가 조직 확대 강화에 대한 구체적 복안을 발표한 다음 친일파 민족 반역자 규정에 대하여 조몽구(趙夢九)로부터 본 도민에 있어는 일제시대의 주구들이 어느 정도 자백하고 있으나 신판 반역자가 출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악질 중 악질은 일제에 아부하던 자가 또 다시 일제시대와 같이 권세를 부려보려는 야욕 아래서 인민위원회에 가담함으로써 인민에 아부하려다가 탄압이 심함을 보니 슬그머니 빠져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기회주의자이다. 이러한 부류는 소위 명사란 자가 그러하다. 또다시 사실 무근한 폭동계획 운운의 모략적 밀고를 당국에 하고 더구나 모종 배경으로써 의식적으로 반동하고 또한 모리행위를 자행하여 동포를 착취하는 자 등을 지적한 바 있었고 악질통역에 언급하여 양심적인 행동을 희망한다는 요청의 의(意)를 표하였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반동하여 오던 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자기비판 아래 반성하는 자는 민전으로써 포옹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는 등 대략 여상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이어 5원칙 및 지방선거 행동강령에 대하여 긴급동의로써 민전 11개조 요구조건을 관철하여 달라는 진정서를 하지 중장에게 보내기로 하고 만일 11개 요구조건을 불승인하면 지방선거에 참가하지 않을 것을 결의하여 태도를 분명히 한 다음, 3․1절 기념행사에 대하여 안세훈으로부터 질서정연히 평화리에 행하여야 된다는 설명이 있었다. 긴급동의로써 도령(道令) 제5호를 철회하라는 항의문을 도 당국에 제출할 것을 가결한 다음 고창무로부터 민생문제에 대하여 의식주의 해결책을 역설, 일체의 배급기관을 인민의 손에 넘겨주는 것만이 양책(良策)이라는 점을 강조한 바 있어 하오 7시경에 드디어 폐막되었는데 선출역원은 여좌하다.”

의장단 : 안세훈(安世勳), 이일선(李一鮮), 현경호(玄景昊)

부의장단 : 김택수(金澤銖), 김상훈(金相勳),김용해(金容海), 오창흔(吳昶昕)

집행위원 김정노(金正魯)외 33명.

1946.02.08. 북조선민시위원회 성립 경축대회 대회(사진: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이 대회에서 명예 의장에 스타린 수상(소련), 박헌영 (당시 북한에 있었음, 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 조선공산당 총비서, 남조선 노동당의 실력자), 김일성(후에 조선민주주위 인민공화국 주석), 허헌(남로당 위원장, 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 인민회의 의장), 김원봉(민주주의 민족전선 공동의장), 유영준(여성동맹 위원장) 6명을 추대한 것을 보면 가히 어떤 형태의 모임인가 짐작할 수가 있다. 여기에 이승만, 김구는 없었다.

제주도(濟州島)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은 2월 24일 상임위원회를 개최하여 사무국장 김정노(金正魯), 차장 좌창림(左昌林), 조직부장 김정노(金正魯), 선전부장 좌창림(左昌林), 문화부장 김봉현(金奉鉉, 1947년 3월 10일 직장 총 파업 사건이 일어나 미군정 경찰은 주모자 색출에 나서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일본 조총련 오사카 지부 서열 제4위로 골수 공산주의자이다.), 조사부장 정상조(鄭相朝), 재정부장 김두훈(金斗壎)을 선정하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어떠한 정치 상황이 벌어졌을까? 북한 땅에서는 이미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이 단체는 사실상 단독정부였고 정부의 기능도 했다. 3월 5일 토지개혁령을 발표하여 무상몰수 형식의 토지개혁을 단행하였다. 더 나아가서 화폐개혁도 하였다.

조선은행권 100원. 1945.09.01. 발행

해방 당시 남과 북은 일제가 발행한 조선은행권의 동일 화폐를 사용하였다. 소련 정부의 결정에 따라 1947년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12월 13일부터 북한에서는 북조선중앙은행이 발행한 중앙은행권만이 화폐로 사용되었다.

조선은행권 1원

당시 남북한 밀무역이 성행하던 때인지라 성시백(김일성이 직접 남한에 파견한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의 책임자가 성시백이다)은 해주에서 인천으로 오는 배편을 이용, 북조선과 만주에서 쓰던 조선은행권 뭉치를 고리짝과 카바이드 드럼통에 감춰 빈번히 남한에 반입하였다. 그 엄청난 돈으로 성시백은 사로당(사회로동당)계를 흡수하고, 신문을 잇따라 창간한다.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 및 [광명일보] 대표적이다.

구 화폐인 조선은행권이 남한에 반입하여 경제적 교란과 공작금으로 쓰여졌으며 더불어 제주4·3사건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남로당 제주도당은 경찰관 순경 1만원, 경사급 1만 5천원, 경위급 이상은 2만원 보상금을 걸어 살해를 권장 유도하는 삐라(미군정 보고)를 뿌렸다)하였을 것이다.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지부의 결성을 전후해서 각 읍·면과 각 리에 민주청년동맹, 부녀동맹, 농민위원회 등 산하단체가 편성되었다. 조선공산당(남조선노동당)의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제주도민주청년동맹(위원장 김택수)이 1947년 1월 12일 제주읍 조일구락부에서 결성된 이후, 제주읍(위원장 이창욱)이 1월 16일에, 조천면(위원장 오달준)이 1월 25일에, 구좌면이 1월 30일, 서귀면(위원장 송태삼)과 2월 9일에, 남원면이 2월 16일에, 애월면(위원장 장제형)이 2월 22일에 각각 결성되었다. 이들 산하단체들은 특히 1947년 3월 1일 북국민학교에서 열린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관한 소위 3·1절기념행사의 전위조직으로서 대단한 역할을 하였고, 그 후의 각 직장 파업 기타 반미군정 활동의 선봉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민주청년동맹은 1947년 6월 5일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으로 개편되자, 제주도에서도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으로 재빨리 변신하여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1948년 4·3사건 폭동이 일어나자 남로당 마을자위대 ~ 인민유격대에 가담하거나 혹은 그 단체의 지원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제주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3·10 총 직장파업사태로 경찰의 검거선풍이 몰려오자 지하로 숨고 숨어들었다.

제주신보 1947년 7월 18일자 기사를 보면

도민전(島民戰) 강화! / 의장에 박경훈(朴景勳)씨 추대 제하에

“도민전(島民戰)에서는 활동을 개시한 후 그 내부를 보강하기 위하여 의장에 전 지사 박경훈(朴景勳)씨, 부의장에 김시범씨(金時範,조천면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1947년 3·1불법시위사건으로 미군정청에 구금되었다. 1948년 11월 25일 부인(신경보)과 같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여 현재 4·3사건희생자로 되어 있음.)씨를 추대하고 상무위원회도 결원 중인 사무국장에 고창무(高菖武, 1947년 5월 6일 제주3·1불법시위사건 미군정 공판에서 벌금 3000원을 언도받음)씨, 차장에 김창순(金昌淳)씨, 선전부장에 김행백(金行伯, 1947년 3월 5일 오전 김행백 집에서 3·1사건 대책 남로당 투쟁위원회가 열렸다)씨, 조직부장에 문경원(文景源)씨를 선정하여 전 부서 결정도 완료되어 민주 역량을 집결하고 임정수립의 전제인 미소공위에 적극적인 협력으로써 활발한 정치활동을 전개케 되었다는데 전지사 박경훈의 정계 등장은 의외의 일이었고 앞으로의 동씨의 활약은 자못 주목되는 바다.”

내용을 보면 민주주의민족전선 조직의 강화를 위해 전 제주지사 박경훈을 의장에 추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는 지하에서 잠복하다가 나와 다시 활동을 전개한 것을 알 수 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조직 형태로는 좌익단체들의 민주적 연합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움직였다.

아래 자료는 미군정청 사령부 경무부에서 보낸 보고서인데, 제목 <남조선 내 체제전복 활동 : 남조선 경찰과 충돌하는 적대적 힘을 다루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몇 가지 강경 조치를 제안하는 분석 보고서>로 그중 일부 ‘Ⅳ. 체제전복적 운동의 작용기제 : 발전 양상 및 위법성’을 발췌하였다. 아래 표에서 1947년경에는 모스크바 공산당⟶북조선공산당⟶남조선 공산당 순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실체를 입증하는 것이다.

수신 : 군정장관 미육군 소장 아처 러치(Archer L. Lerch)

경유 : 경무부 고문 W.H. 매글린(W.H. Maglin) 대령, 안재홍 민정장관

“이제 남조선에서 체제전복적 활동이 어떤 작용 기제로 수행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모스크바 공산당이 논지를 발표한다. 그러면 북조선 공산당이 남조선 공산당과 협의하여 그 논지를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반 계획을 세운다. 남조선 공산당은 북조선의 지령을 받은 후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에 따라 계획을 구체화하고 일종의 정치적 청산소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넘긴다. 계획을 넘겨받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민위원회, 인민당, 전평노동조합, 농민조합, 청년연맹, 여성연맹, 학생연맹 등 다양한 정치·사회적 산하 집단에 구체적인 지령을 내린다. 좌파 운동의 작용기제 진행 순서는 아래와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모스크바 공산당→북조선 공산당→남조선 공산당→민주주의민족전선→전평노동조합, 농민조합, 청년연맹, 여성연맹, 학생연맹, 인민위원회, 인민당, 문화협회 등

조병옥 부장 경무부(1947년 4월 14일)

1947년 2월 남조선중앙위원회 지시 제○○○○로 남로당제주도위원회가 제주 읍·면 남로당세포책에게 민전 선거강령 선전 ○○○○○에 대한 지시문에는

‘진정한 민주주의 원칙의 표현이며 인민의 요구와 지향을 완전히 반영한 『민전지방선거강령』 실천 만세!’ ‘『민전지방선거강령』실천은 모스크바삼상결정에 의하여 민주 정부 수립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적극 지지 실천하자!’, ‘민주 독립의 인민적 토대요 민주민족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 만세!’ (제주4·3연구소. 『제주항쟁』. (서울 : 실천문학사, 1991), pp.176~178.)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앞서 1946년 12월 16일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정치담당 부사령관 쉬띄꼬프 대장은 일기에

‘끄라프초프를 호출하다. 지방자치기관 선거와 관련한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행동 방침과 대회 소집 가능성 및 입법기관의 창설에 관한 지시 사항을 하달하라고 명하다(국사편찬위원회. 『쉬띄꼬프일기』. (서울 : 주식회사 천세, 2004), p.55.) 라는 기록이 있어

이는 남로당제주도당위원회가 제주 읍·면 남로당세포책에게 민전 선거강령 선전 ○○○○○에 대한 지시문에 쉬띄꼬프 지시가 반영된 것이다.

남로당제주도당위원회가 ‘민주주의민족전선 만세’를 부른 것은

1946년 9월 27일 여운형·로마넨코 회담록(상게서, p.180.)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은 공산당·인민당·신민당·민족혁명당·인민위원회 등을 통합시키고 전평·농민동맹·여성동맹·민주청년동맹 민주적 단체 등이 민전 지도 아래 가입해 있다.’ 고 여운형은 로마넨코(1945년 해방 후 평양 소련군정에서 소장 계급으로 민정 사령관을 지냈다)에게 이야기했다.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과 일치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하루빨리 실천에 옮겨 친일파를 숙청하고 인민위원회에 기초해 민주주의적 독립 국가를 세우자는 요구하는 사항에 대하여 동감했기 때문에 ’민주독립의 인민의 토대요, 민주민족전선인 민주주의민족전선 만세!를 1947년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린 3·1절기념식에 참여한 각 읍·면 인민위원회, 조선민주청년동맹, 조선부녀총동맹, 기타 각종 단체 및 직장 대표가 이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조일구락부 터는 또 1947년 11월 2일 서북청년회(해방 후 공산당을 반대하여 월남한 38선 이북 출신 청년으로서 서북지방 출신을 주축으로 조직된 청년단체.) 제주도본부(위원장 장동춘, 부위원장 박병준)가 여기에서 정식으로 발족식을 갖기도 했다.

조일구락부 옛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증․개축 과정을 거쳐 영화를 볼 수 있었던 제주극장에서 현대극장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이후에 생긴 현대 롤러스케이트장으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지금은 공터로 변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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