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36) 강중훈 시인, 시집 '젖은 우산 속 비는 내리고'
상태바
[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36) 강중훈 시인, 시집 '젖은 우산 속 비는 내리고'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9.02 04:3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소걸음처럼 느릿느릿 늦장을 부리면서 일본 국민들을 애태우고 있다. 최대급에 속하는 태풍 '산산'이 일본 규슈에서 일본열도를 종단하면서 많은 피해를 입히고 지금 북상 중에 있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태풍을 다른 명칭으로 일컫는데 일본에서는 숫자로 표시한다. 산산은 태풍 10호이다. 그래서 올해분 태풍은 10번째라고 알기 쉽다. 일본열도가 태풍으로 비상이 걸린 틈새로 비행기가 제주 성산포 오조리에 사는 강중훈 시인의 시집 '젖은 우산 속 비는 내리고'를 싣고 왔다.

도서출판 다층에서 5월에 낸 시집이었다. 모두 4부로 나누고 103편의 시가 게재되었다.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에서 시원한 청량음료수처럼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작품 중에서 3편을 소개한다. 다른 작품보다 뛰어나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필자가 읽고 마음에 닿는 작품이니까 객관성을 떠나서 어디까지나 한 사람의 독자로서 읽은 감상이다.

첫 작품은 <말몰레기>이다.

 

말몰레기

 

제주 사람들은 언어장애인을 말몰레기라고 부릅니다

 

말몰레기는 울 줄조차 모른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말몰레기는

저주와 적개심과 증오와 원한을 먹고 사는 긍정의

철밥통이라고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되다만

원통한 축복이라고

 

유성기에 매달아 놓은

끈질긴 주제라고

그러므로 솔직히 아름답게 슬프다고

슬퍼서 그립다고

 

그래서 말몰레기는 시인이 되고 말았다는

결론을 내린 적은 있습니다

말몰레기라는 제주 방언으로 이어진 이 시를 읽었을 때, 제주 사람들은 그 의미를 거의 알고 있다. 제주 4.3사건을 무자년이라고 빙돌아서 사용하는 은유적 표현처럼 돌고 있다. 직설적이 아니어서 더욱 애잔하다. 말몰레기가 갖고 있는 비애는 병적인 트라우마를 빙자한 혼자 삭이기이다. 말몰레기는 울 줄조차 모른다고 들은 적이 없는데 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말몰레기는 저주와 적개심과 증오와 원한을 먹고 사는 긍정의 철밥통이라지만, 또 한편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되다만 원통한 축복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자아 속에서 방황한다. 그래서 말몰레기는 시인이 되고 말았다는 결론을 내린 적은 있습니다라고 남의 일인양 자신의 아픔을 응시하고 있다.

다음은 <시비(詩碑)가 있는 공원>이다.

 

시비가 있는 공원

 

그 곁에 함께 박힌 돌덩이

그 생각이 아프다

그냥 둬도 아픈데 빗물에 씻겨 돋보이는 성가심이 더 아프다

또 어디에선가 끌에 찔려 아픈 사연으로 울까

비문을 새기며 칼을 댄 가슴이 아프다

비석에 새겨진 사연이 아프다

비석이 있는 바위산 골짜기 지날 때마다 나는 아프다

새겨진 글자를 씻어 내리는 빗물의 심정이

선지자의 이름들 사이로 흐르는 피의 글씨가

쇠칼 촉에 찔린 형제들의 피가 아프다

시비(詩碑)가 있는 공원 근처 호숫가 하늘도 속이 탄다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이 아프다

어디론가 실려 가는 사연이 아프다

어지러운 것들끼리 시비를 건다

일렁이는 물결에 비친 구름이 어지러워 더욱 아프다

 

시비에 새겨진 시 구절만이 펄펄 살아서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시비에 새긴 시 한편으로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아픔을 자아내고 있다. 어느 산허리에 있었던 원석(原石)이 캐어져 시비로 변하는데 이것도 새로운 아픔이 된다. 새겨지는 글자 하나 하나의 비문이 예리한 칼에 의해 피의 글씨가 되어 그 아픔을 더욱 아프게 한다. 선지자의 이름 속에는 그 형제들의 아픔까지 되살아난다. 마음을 울리는 시의 아픔은 이렇게 확산돼 가지만, 그 매개체의 대상인 시비의 또 다른 아픔은 어떻게 해야할까. 그 시를 기리기 위한 시가 갖고 있는 아픔의 부조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다음은 <산>이다.

 

 

가랑비처럼 울다가

검은 리본 달고

구름이 내려와 산이란 산들을 감싸고 돈다

 

눈물 속에 조용조용히 숨겨두려 한다

뉘 집 묫(墓)자리

두꺼운 장막(帳幕)에 가려 있는 그리움

두려움을 감싸고

무엇을 숨기려 하는 걸까

 

저기,

안개 자욱한 산

안개처럼 품에 품다가

어둠을 감싸고

외로움과 슬픔까지 감싸 안아

장대비처럼 목 놓아 울던 소리마저 감싸 안는다

 

어느 시골 마을에서(시골 마을이 아니라도 괜찮다.) 안개 낀 먼산을 바라보는 한폭의 움직이는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되어 본다는 의미이다. 가랑비처럼 울다가 시커먼 리본 같은 먹구름이 비가 되어 산이란 산들을 감싸버린다. 모든 산들을 감싸고 그 산허리의 묘까지 감싼다. 두꺼운 장막에 가려 있는 그리움과 두려움, 외로움과 슬픔, 그리고 장대비처럼 목 놓아 울던 소리마저 감싸 안는다. 앞에서 소개한 시 '말몰레기'처럼 은유의 기법으로서 여러 아픔을 승화 시키고 있다. 결코 대립이 아닌 표용력으로서 감싸 안고 있다.

끝으로 시인의 말을 소개한다.

 

시인의 말

 

시골 버스 지나는

고향 논밭 길

 

첫 번 스치는 밭에는 무꽃 피고

다음 밭은 보리꽃 피고

또 다음 보이는 먼 산

 

그 곁에

잎 진 가시낭 밭

고갯길

 

걸음 무거운 노파의 지팡이에 핀

겨울바람 쌩쌩

신나게 매달린 휘파람

혹은 詩

강중훈 시인은 오사카 출생(1941). 부모님 고향 성산포 오조리 귀향(1944). 제주대학원 졸업. 1993년 박재삼 추천, <한겨레문학>으로 등단. 제주도문인협회회장, 국제PEN제주지역위원장 역임. 시집으로는 <오조리, 오조리, 땀꽃마을 오조리야> <작디 작은 섬에서의 몽상> <동굴에서 만난 사람> <아직도 괄호에 갇혀 있다> 등 다수. 제주문학상, 서귀포문학상, 제주특별자치도예술인상 등을 수상했다.

<끝>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wskim 2024-09-07 10:26:38
시를 읽으며 조금....다시 천천히 읽으며 조금 더. 김길호 해설을 읽으며 아!!! 이해가 가면서 다시 읽게됩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