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에데(楓)갤러리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압도당했다. 벽 전부가 누드 작품으로 벽지(壁紙)로 착각할 정도였다. 갤러리 모든 벽이 누드 작품으로 빽빽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놀란 것은 금방이라도 그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생생한 박력감이었다. 작품이 살아 있어서 동물원 우리에 갇혀 사는 동물들을 연상시켰다.
키는 여성의 평균적인 키보다는 훌쩍 크지만,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인 김영숙 화가는 섬세하고 자상한 여성상과 풍경들을 그리는 이미지로서 필자에게는 각인되었었다. 그 부드러웠던 이미지가 깨어짐과 동시에 뜨거운 용암처럼 분출하는 에너지의 누드 작품군에 필자는 새로운 김영숙 화가를 발견했다. 아
니, 발견이라기보다는 이렇게 여러 장르의 작품을 자신 있게 구사하고 있는 김영숙 화가의 다양성을 필자가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화가로서의 출발점은 바로 하나의 선으로... 그로부터 38년간이 지나서 이번에 누드 드로잉의 개인전을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채화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때에 따라서는 조각이나 판화, 수채화 제작에도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그 기초가 되는 것은 누드 드로잉이었습니다. 인물을 모티브로서 그릴 때가 많은 저입니다만 누드 드로잉은 창작상 중요한 탐구의 세계입니다. 앞으로도 계속될 화업(畵業)의 나날 속에서, 다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선을 추구하면서 나아 가겠습니다."
위의 문장은 김영숙 개인전 안내 전단에 <나에게 있어서의 누드 드로잉>이라는 화가의 말로서 게재하고 있는 내용을 전문 소개하고 있다. "소품의 누드 작품인 경우 3,4분에 마쳐야 합니다. 그 작품이 하나의 선으로 시작해서 완성될 때까지 그 선은 계속 이어집니다. 도중에 수정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치 시발점에서 종점까지 도중에 있는 역들에 정차 않고 달리는 초 쾌속 급행열차나 다름없었다.
하나의 선이 한순간에 작품(인간)으로 승화되어 인어처럼 유영(遊泳: 움직임)하면서 자신을 주시하는 관객들에게 어필한다. 일본어에서 잘 사용하는 관용어에 "하다카노 스키아이: 裸の付き合い" 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로 직역한다면 "알몸으로의 사귐"이 되겠다. 저속적이고 성적인 의미가 아니고, 치렁치렁한 옷 같은 사회적인 모든 위상을 벗어버리고 태어났을 때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툭 터놓고 얘기도 나누고 사귀자는 의미이다.
누드의 본질적인 요소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누드의 유영은 모두가 자신에게 알맞는 움직임을 보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없다. 그 통일성이 없는 제각기의 모습, 그것은 자신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 유영이야말로 그림이라는 작품 속에서는 음성을 발하는 작품이 존재할 수 없으니, 유영이 곧 자신만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외침의 표현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즉 모든 그림 작품이 그렇겠지만 특히 누드는 소리 없는 외침의 대표격이라고 생각한다.
"작품은 모두 120점입니다. 그 동안 그려 왔던 작품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나부(裸婦)들의 시간’이라는 부제(副題)로 10월 1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열리는 과정에서 120점의 작품 속에 수많은 압권의 나신들은 관객들에게 인간 쓰나미처럼 엄습하면서 무엇인가 호소하게 될 것이다. 숙취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다가 순간적으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숙취(宿醉) 다음 날에 이 전시회를 보면 많이 치유될 것 같았다. 숙취 후에 잔뜩 흐린 날의 날씨처럼 무거운 우울의 심연과 회한들, 이러한 자신의 자화상을 많은 누드 작품들은 그 고뇌들을 유영을 통해서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그 객관적 사실의 부조리들을 직접 직시하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정화될는지 모른다.
"여기 이 정원에도 작품들이 있습니다." 김영숙 화가의 말에 전시회장을 나오고 정원으로 갔다. 빨랫줄처럼 이어진 끈에 엽서 크기의 누드 작품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고층 빌딩의 맨션 건물들이 들어선 주위 속에 카에데 갤러리는, 일본 전통 옛집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곳이었다. 밤 7시 가까운 시간 속에 주위의 전등 불빛과 음력 13일의 달빛이 나무와 작품들이 어우러져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김영숙 화가는 1967년 오사카 출생으로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1986년 고려미술연구소에서 누드 드로잉과 유채화를 배워서 1988년부터 현재까지 도톤보리크로키연구소에서 연수. 1988년-2019년 전간사이미술전 출품. 1989년-2009년 여류화가협회전 출품. 2007년 2008년 도구(渡歐: 이탈리아). 2010년 도호출판사에서 화문집(畵文集) <어느 날의 이탈리아 로마> 간행.
2018년, 코리아디아스포라 특별초대전(한국 경기도미술관). 2018년 세계한민족미술대축전 초대작품(한국예술의 전당미술관). 2019년, 국제아트페스티벌초대출품(한국 서울 인사동). 2022년, 한일미술20주년 기념전(오사카한국문화원. 한국 안산시). 2023년, 한국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개안전 개최. 2024년 한국 원주시 극단 Nottle공연 <이방인의 물고기> 작품 포스터 사용. 개인전 개최 25회(오사카, 토쿄, 한국, 이탈리아) 전람회 출품 다수(이다미갤러리미술대상전 가작상, 싱와미술전 그랑프리외 수상 다수. 현재 아틀리에 KIM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