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36) 이시하라 신타로 극우 정치가, 작가의 생애
상태바
[김길호의 일본아리랑](36) 이시하라 신타로 극우 정치가, 작가의 생애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2.07 08: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이시하라 신타로 극우 정치가, 작가의 생애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18년만에 국회에 돌아왔습니다. '폭주노인(暴走老人)' 이시하라입니다. 나는 이 명칭이 아주 마음에 듭니다. 모처럼 작명(作名)해준 다나카 마키코 씨가 낙선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노파의 휴일'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참 안됐습니다. 이제부터의 질문은 이 나이(80세)가 되어서 국민 여러분께 유언과 같습니다."

2013년 2월 12일 국회 중의원예산위원회에서 '일본유신의 회'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慎太郎) 공동대표가 질문에 앞서 인사하여 장내에 폭소를 자아냈다.

[폭주노인이라고 야유한 다나카 마키코(田中 真紀子。당시 69세) 씨는 문부과학대신이었는데 2012년 12월 선거에서 낙선하고, 문부과학대신 자리를 인수인계할 때 '노인의 휴일'을 즐기겠다고 발언해서 주목을 끌었다. 전 다나카 수상의 장녀로서 외무대신도 역임했는데 한 마디로 인물평을 하는 데는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서 인기를 끌었었다.]

일본 극우파 대표로 알려진 이시하라 신타로 정치가이며 작가가 2월 1일 오전 췌장암으로 도쿄 자택에서 사망했다. 89세다. 이날 저녁 7시부터 일본 축구 대표팀은 사우디아라비와 월드컵 예선전을 일본에서 치르고 2대0으로 이겼다.

아사히TV가 생중계를 했었는데 밤 9시 54분부터 시작하는 아사히 간판 뉴스 '보도 스테이션' 방송을 시합이 끝난 9시 15분부터 시작했다. 축구 결과를 간단히 보도하고 나서 바로 이시하라 신타로 사망 특집방송을 약 10여분에 걸쳐서 방영했다.

필자는 깜짝 놀랐다. 특별한 이유 없이 뉴스를 앞당겨서 방영한 것도 그렇지만 이시하라 신타로가 오늘 사거(死去)했다면서 10여분에 걸쳐서 보도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TV가 극우 정치가로 알려진 그의 생애를 비판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과격 발언 등도 보도) 방영했지만, 긍정적 측면이 엿보이는 추도 내용이었다.

이시하라 씨의 사망에 대해서 오쓰바기 유코(大椿 裕子. 48) 사민당 부당수가 2월 1일 "금후 추도방송이 방영될지 모르겠으나 그가 뿌린 인종차별, 성차별, 장애자 차별 등에 대해서도 없었던 걸로 하지 않기 바란다."라는 비판적인 트윗에 이념은 달라도 최저의 애도 표시는 있어야 한다고 찬반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1956년 1월 히도쓰바시(一橋)대학 재학 중에 '태양의 계절'로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하여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이시하라 씨는 그 해에 '돌아버린 과실(果實)'을 발표했다. 두 작품이 영화화 될 때에 두 살 밑인 이시하라 유지로(石原 裕次浪: 1987년 간암으로 사망. 52세)를 주연 배우로 데뷔 시켜서, 배우와 가수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1968년 7월 자민당 전국구 참의원의원으로 출마하여 1위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72년 중의원의원으로 전신하여, 환경청장관, 운수대신을 역임했으며, 1995년 의원직 25년 기념표창장을 받은 후 사직했다.

1999년 4월 도쿄도지사에 출마하여 2012년 임기 4기 도중에 사임하여 동년 11월에 '태양의 당'을 창당 후, '일본 유신의 회'와 합류하여 공동대표(오사카 전 시장 하시모토 도오루와 공동대표: 橋下 徹)를 맡고, 동년 12월 중의원비례로 국정에 복귀했다. 그후 '일본 유신의 회'와 분당을 하고 2014년 8월 '차세대당'을 창당하고 최고 고문직에 취임하여, 동년 12월 중의원선거에서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작가로서는 '화석의 숲' '암살의 벽화' '생환' 동생 유지로를 모델로 쓴 '제(弟)' '신・추락론' 다나카 전 수상을 모델로 쓴 '천재' 등이 있고, 공저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있다.

쇼와, 헤세이(平成), 레이와(令和) 현역 정치가로서 존재감을 나타낸 그는 4남을 두었다. 장남은 중의원의원으로 자민당 간사장까지 역임했지만 2021년 선거에서 낙선했고, 차남은 탤런트, 3남은 중의원의원, 4남은 화가이다.

2월 2일 조간신문은 1면, 사회면, 국내정치면에 이시하라 씨의 사망 기사를 게재했는데 추도기사 일색이었다. 그의 극우적인 차별 발언도 '이시하라 어록'의 한 부분으로 애교적인 뉘앙스를 물씬 풍기게 했다.

이런 와중에 마이니치신문은 2월 3일 조간에 미국에 거주하는 이이쓰카 마키코(飯塚 真紀子) 저널리스트의 기사를 게재한 것이 돋보였다. <이시하라 신타로 씨의 사거를 미국의 유력지는 어떻게 보도했는가. 일본 미디어가 보도하지 않는 성차별, 인종차별, 남경사건 부정'이라는 긴 제목 속의 기사였다.

일본의 보도를 보면 거의 모든 미디어가 동씨를 위대한 정치가였다는 것처럼 찬미하는데 그치고 있다. 이것은 사자(死者)에게 채찍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배려인지 아니면 촌탁(忖度:손타쿠)인지, 혹은 일본의 보도 자유가 낮아서일까. 한편 미국의 유력지는 가차 없이 이시하라 씨의 부(負)의 측면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서두 속에, 워싱톤포스트지, 뉴욕타임스지, 월스트리트 저널지, 로이터 통신사 등이 이시하라 씨에 대한 평가를 극우의 선동적 정치가로 세계에 알려졌다면서, 재일동포 등을 경시하는 제3국인이라든가, 성차별, 인종차별, 남경대학살 사건의 부정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의 망언제조기, 중국의 비난들과 거의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일본인을 평가할 때 '혼네와 다테마에'(本音と建前)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속 마음과 겉 마음이 다르다는 의미이다. 애매모호한 일본인들의 혼네와 다테마에를 이시하라 씨는 절제 없는 과격적인 표현으로 혼네(속 마음)를 서슴치 않고 내뱉는다. 왜곡된 우월적이고 국수적인 일본인 찬가이다.

모두가 그렇지 않지만 어쩌면 일본인들 마음 한 구석에 잠재해 있는 이 혼네를 마음껏 발설하는 이시하라 씨의 발언에 공감하고, 청량음료수처럼 카다르시스를 느껴서 그를 지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87세 때 이시하라 씨는 자신의 인생관에 대해서 "내세 따위는 믿지 않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없다. 부처님도 석가님도 그런 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인간은 죽으면 의식이 없어지는 것인데 죽으면 그것 뿐. 전부, 허무. 전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깔끔하고 좋지 않습니까."

"몇 살 때 죽을는지 모르지만 얼마 없어서 죽겠지요. 죽을 때까지 정말 하고 싶은 말 하고, 하고 싶은 일 해서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으면서 죽고 싶습니다." 7년 전 이시하라 씨의 어록이다.

2월 5일 이시하라 신타로 씨의 고별식을 자택에서 가족장으로 치르고 추도회는 별도로 갖는다고 했다. 일본 국내에서 화려한 일족으로 불리웠던 이시하라가(石原家)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