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97) 일본 마이니치신문 양향자 의원 대서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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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97) 일본 마이니치신문 양향자 의원 대서특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8.3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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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일본 마이니치신문 양향자 의원 대서특필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8월 20일(일), 일본 마이니치신문 조간을 펼쳐 보고 깜짝 놀랐다. 양향자 의원이 사진과 함께 1면 톱기사로 게재되어 끝에는 <3면에 계속>이라고 씌어 있었다. 지금까지 외국인은 물론 일본인 정치가도 개인 혼자 기사로 1면 톱기사로 게재하는 예는 거의 없었는데 양향자 의원이 게재되었으니 말이다. 한국 기사를 인터넷으로 날마다 보고 있기 때문에, 양 의원에 대한 비리 기사도 없었는데 일본 중앙지에 대서특필로 게재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서 3면 기사까지 전부 읽고 나니 안도감이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기사는 양향자 의원이 입지전을 자세히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신문 큰 제목은 <한국 반도체 육성에 분주>라고 쓰고 작은 제목으로 <논란 기필코 극복>과 또 작은 제목으로 <삼성 전 상무 양향자 의원>이었다.

이 기사는 아직도 비난의 여운이 식지 않은 채 진행 중인 일본 국회의원과 지방 의원들 여성 38명의 기사 내용과는 전혀 달라서 돋보이고 신선했다. (프랑스 연수를 갔던 에펠탑 앞에서 찍은 사진과 고급 프랑스 요리를 자랑처럼 자신들의 SNS에 게재하여 국민적 비판을 받은 의원 인솔 책임자, 동경대학 출신인 마쓰가와 루이 의원은 자민당 여성 국장을 인책 사임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 8월 20일자 조간 1면에 게재된 양향자 국회의원 기사. 

"한국의 패권을 30년간 지탱해 온 반도체 산업이 정치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지난 6월 26일 열린 신당 <한국의희망> 발기인 대회에서 양 의원은 연단에서 힘있게 말했다. 보혁이 격렬하게 대립하는 한국 정계에서 안전 보장이나 북한 문제가 아니고 반도체 산업의 진흥과 과학 기술을 활용한 정권 운영을 간판 비전으로 거는 것은 전대미문이었다.

2016년, 문재인 대통령 영입으로 더불어민주당으로 국회의원에 나와서 두 번 선거에서 당선한 후, 반도체 산업 육성 때문에 뛰어다녔다. 2021년에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여, 이번에는 윤석열 정부의 여당 국민의힘 반도체 육성 경쟁력 강화 특별위원장으로서 활동했다. 국가 전략 산업을 키우기 위해 세제(稅制)를 초당파로서 협의를 하고 합의를 보았다. 여야당에서 반도체 관련 운영회를 닦아 온 기반에서 이뤄진 결과였다.

"한국인은 빠른 개발과 의사 결정에 뛰어나고, 일본인은 세부를 세밀화하는 과정이 뛰어납니다. 협력하면 상호 효과 작용이 나옵니다." 한국과 일본의 반도체 관련 산업은 서로 보완하면서 분업 체제에서 서로 성장해 왔다. 그러나 정치가들은 그 구조를 거꾸로 이용하여 한일 관계가 최악일 때는 인질로 삼아 왔다. 이것에 대해 묻는 기자에게 양 의원은 "미래 지향의 협력 관계 필요성"이었다.

"뼈 아픈 과거 역사는 바꿀 수 없습니다.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미래를 담당할 젊은 세대를 위해서 한일이 협력해야 합니다. 서로가 <자국 우선주의>가 돼버린 지금이야말로 정치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도체 개발을 할 때부터 급료 때문에 일하는 것보다 인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해왔습니다. 지금도 (자신의) 한국 재산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보수, 진보는 관계 없습니다." 서울에서 5월에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반도체 메커와 일본 소재(素材), 부품 기업이 견고한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강화하는데 일치를 보았다.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삼성전자의 상무까지 역임한 양 의원에 대해서도 신문기사는 자세히 기술하고 있었다. 유리 천정을 깨트려도 한 장만이 아니고 몇 장 깨트린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이러한 기사 속에 3면의 기사 제목인 <일본에는 "제2의 양친">이라는 기사가 눈을 끌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삼성의 VIP 손님으로서 일본인 부부를 개회식에 초청했다. 당시 일본 NTT그룹의 기술 이전 관련 기업의 전무였던 하마다 씨 부부(浜田成高,98. 浜田芳枝,96)였다. NTT의 전신인 일본전신전화공사의 연구소에서 반도체를 연구했던 하마다 씨는 삼성전자에 기술 이전을 담당하고 있어서 초대했다. 부부의 통역을 상사는 양향자 씨에게 지시했다.

고등학교 때와 입사 후, 사원 대상으로 일본어 공부를 했던 양 씨는 처음으로 일본인을 대했지만 성의를 다했다. 아침이면 부인의 손을 잡고 맛있는 음식점으로 안내했다. "향자는 통역원이 아니고 안내역이었다. 친밀하고 친절했었다."

얼마 후, 일본 하마다 씨로부터 회사에 초대장이 왔다. 양향자 씨 앞으로였다. 회사에서도 이해를 하고 연수 명목으로 휴가를 허락했다. 1989년 4박 5일 일정으로 일본에 와서 하마다 씨 집에 머물렀다. 양향자 씨의 첫 해외 여행이었다.

양 씨는 결혼 후에도 자식이 없는 하마다 씨 부부와 계속 교류를 하면서 35년 동안 나눈 편지만 해도 1000통을 넘었다. 하마다 씨 부부에게는 딸과 다름없었다. "인연을 맺는 그런 관계는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오고 가는 관계 속에 지금은 가족이 되었다" 하마다 씨의 술회였다. 양향자 씨는 상무 승진 다음 해인 2014년에 회사 신년회를 결석하여 일본에 와서, 제2의 부모인 하마다 씨 부부에게 보고하여 해맞이를 했다.

"일본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2의 부모가 있는 나라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비지네스 관계의 교류 속에 동시 진행으로 축적된 인연이 승화되어서, <제2의 부모>라는 또 다른 차원의 "유리 천정"을 깨트린 따뜻한 기사였다.

이 기사는 "다가 서다"라는 의미의 일본어 "세마루:迫る"의 특집 기사로서, 2018년부터 한국 특파원으로 부임한 마이니치신문 시부에 지하루(渋江 千春)기자가 쓴 기사에서 발췌하여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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