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0)재일2세 김예곤씨 '한국어강좌'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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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0)재일2세 김예곤씨 '한국어강좌'발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06.25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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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2세 김예곤씨 이색적인 '한국어강좌' 발간
김길호 재일작가.
김길호 재일작가.

이색적이었다. 재일 2세로서 만 87세이신 노학자 김예곤(金禮坤) 씨가 한국어강좌 책을 발간한 것도 그렇지만, 책 사이에 끼어 있는 별지도 그렇다. 별지에는 이 책이 발간된 동기가 간단히 써 있고 다음 항목만이라도 읽어 주시면 고맙겠다고 A4 사이즈 한장이 들어있었다. 읽어 달라는 내용은 <첫머리>, <후기>, <한글에 대해서 알아둘 일>, <용어색인>이었다.

한류붐을 타서 한국어강좌 책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알기 쉬운 한국어' '간단한 한국어' 등의 선전 유혹으로 한류붐을 이용한 한국어강좌가 아니고 정공법으로 한국어의 본질을 파헤친 내용이었다.

재일2세 김예곤 저 '한국어 강좌 표지'.
재일2세 김예곤 저 '한국어 강좌 표지'.

한글 구성체인 모음과 자음의 설명만으로도 무려 38페지에 이르고 있었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만을 위한 입문서가 아니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가볍게 나온 한국어강좌와는 질적으로 달라서 한일 양국어를 알고 전문적으로 한국어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에게까지 필요한 지침서였다.

"놀라움과 기쁨을 금할 수 없다. 반세기 이전의 저작(著作)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살아났으니까. 잡지에 연재하고 있었던 강좌가 끝나면 한권의 책으로 묶을려고 했던 것이 이루어졌다. 생각해 보면 당시는 활판 인쇄의 시대였다. 히라가나도, 카다가나도, 한자도, 로마자도, 한글도, 발음기호도 모두 하나의 활자였다."

"원고를 쓰는 나도 편집하는 사람도 활자를 조립하는 사람도 인쇄하는 사람들도 문자 하나 하나에 모두 정성을 들인 강좌였다. 반세기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한국어는 지금도 빛나고 있다. 이 입문서로 인하여 새로운 만남이 일어난다면 무척 즐거운 일이다."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는 젊은 재일동포 모든 분들에게 모국어와 함께 위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월조남지(越鳥南枝)>라는 말이 있다. (필자 주: 철새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못 잊어서 머나먼 고국의 방향으로 뻗은 나무가지에 보금자리를 만든다고 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한 마음을 안고 나래 펴는 새가 되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일본인 여러분들도 한국어를 배우는 가운데 인생의 소중함이 보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어=조선어라는 언어의 세계.

한글이라는 문자의 세계.

문자를 보면 음을 알 수 있다.

음을 들으면 문자를 알 수 있다.

여러 생각을 해봐도 이것은 재미있지 않는가

같이 배워 주시면 기쁘겠다."

이것이 '첫머리'의 전문이다. 반세기 이전에 연재 강좌를 했던 것을 하나로 묶은 책이었다. 다음은 '후기'이다.

"본서는 청년을 대상으로 월간지 조선청년사 발행의 <새로운 세대>에 1961년1월호부터 1962년 10월호까지 연재되었던 '국어강좌'의 일부를 개고(改稿)한 것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서법(正書法)에 의해 쓴 동강좌를 이번 개고에서 대한민국의 정서법으로 고쳤다."

"발음기호는 현재 한국어 교육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 국제 음성기호를 따랐다. 지금과 맞지 않는 일부의 예문은 변경했지만 당시의 교육, 학습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초급 학습에는 그리 나오지 않는 문법 형식은 일부를 남겨놓았다. 쉬운 것만 배우는 입문서보다 문법의 전체성의 기본을 제시한 것으로서, 깊게 파고 들어서 배우고 싶은 분들의 요구에도 응했다.

조선대학교에서 유벽(柳碧) 선생한테서 배운 조선어 문법을 중심으로, 오쿠다 야스오(奧田 晴雄: 일본어 언어학자)의 언어학을 넣은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재의 많은 입문서와는 다르다. "

한국어는 일본어와 어순(語順)도 같으며, 같은 한자어를 가진 언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배우고 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좀 더 공부를 한 사람이면 그것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다고 할 것인가. 어렵다고 내팽개칠 것인가. 거기서 부터가 한국어 학습의 제대로운 스타트이다. 본서에는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는 어디에서부터라도 들어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많이 활용하여 오래 학습을 지속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본서의 출판에 있어서 협력해 준 우에노 미야코(上野 都) 씨, 하시모토 카나(橋本 佳奈) 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후기에 저자 자신이 북한의 정서법으로 쓴 동강좌를 현재의 한국 정서법으로 개고했다고 하는데, 남북한의 한글 체계는 문법만이 아니라 표기 글자까지 크게 다르다. 이것은 개고가 아니라 또 하나의 한국어강좌 책을 발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90을 바라보는 노학자 김예곤 씨의 정열에는 놀랄 따름이다.

김예곤 씨는 본적지가 부산이며, 1933년 타카라쓰카(宝塚)시에서 태어나서 1955년 중앙조선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56년 토쿄에 있는 조선대학에 입학해서 1기생으로서 졸업했다. 그후 동학교 연구생으로서 재적, 일본어학회 연구회에 참가하면서 규슈, 홋카이도, 토쿄지역에 민족학교 설립을 위해 활동했다. 1963년 토쿄 조선중고급학교 교사 역임 후, 1967년 조선대학교 교수 동대학 문학부 조선어학좌장을 1970년까지 역임했다.

부친과 형님이 경영하던 사업이 형님이 돌아가셔서 부친과 채석(採石)사업을 같이 하기 위해 타카라쓰카시에 돌아온 김예곤 씨는 1984년부터 수년간 토쿄외국어대학 조선어 비상근강사로 역임했으며, 1980년에는 조선대학교 전국동창회 설립준비위원장을 맡고 1985년에는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타카라쓰카시에서는 1998년 '타카라쓰카시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를 창설하여 동회장에 취임, 타카라쓰카시와 타카라쓰카시국제교류협회 공동개최로 이문화(異文化:多文化)이해사업을 개시하여 현재도 활동 중이며, 2014년 타카라쓰카시로부터 국제교류공로상을 수상했다.

1995년 코베지진(한신아외지대진재) 때는 경영하는 채석사업(기업명:우미야마광산)으로 붕괴된 건물들의 잔해를 재활용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한 분쇄사업에 이바지를 해서, 한국 대구시가 종전의 경기장을 해체하고 월드컵 경기장을지을 때는 자문을 받기도 했다.

위령비 '월조남지'
위령비 '월조남지'

2020년 3월에는 일제시대에 효고현(兵庫縣) 후쿠지야마선(福知山線) 철도공사와 코베 수도공사를 하다가 돌아가신 다섯 분을 위해서 <위령비건립위원회>을 만들고 추진하다가 무코가와(武庫川) 하천변 쉼터에 김예곤 씨가 사재로 구입한 한국산 석재로 건립했다. 필자도 건립위원회의 한 사람으로서 그 분들의 유족을 찾기 위해 한국 보훈처와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에 조회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일본 국내에 일제시대에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하여 세워진 위령비들이 일본 우익 단체와 정치가들이 왜곡된 역사인식 속에서 철거가 계속 일어나는 환경 속에 새롭게 위령비가 세워진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타카라쓰카시 나카가와 도모코(中川 智子) 시장은 위령비 뒤에 새길 한자 도(悼)자를 직접 써 주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이러한 일본인들도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김예곤 씨의 이러한 학자만으로서의 활동이 아니고 재일동포사회의 권익과 문화 발전을 위하여 지역 행정 당국과의 교류와 사업가로서의 기여를, 필자는 십여년 전에 <타카라쓰카 우미야마:宝塚海山>라는 단펀소설을 쓰기도 했다.

김예곤 씨의 저서로는 1961년, <국어강좌>, 1965년, <조선어대화>, 2007년, <포켓트 한일사전> 등이 있고 2021년에 제28집이 나온 연구지 <대조(對照언어학연구> 및 일본어문법의 저작을 <우미야마(海山)문화연구소> 대표로서 다수 간행했다.         <재일작가 김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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