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20) '제주문학' 2021(87집),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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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20) '제주문학' 2021(87집),여름호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1.09.23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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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문학' 2021(87집),여름호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재일작가 김길호선생

제주문학 2021, 여름호에는 타계한 정인수 시인의 특집에 대표작 5선이 게재되었었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중에서 2편과 회원들의 작품 중에 3편을 소개한다.

정인수 시인의 <삼다도>이다.

삼다도

1. 서

바람은

돌을 품고 입술을 깨무는 비바리의

치마폭에서 울고

돌맹이 바람 맞으며

비바릴 지키는데,

비바린 바람 마시며

돌처러 버텨 산다.

2. 바람

바람이 파도 끝에

파아란

기어올라,

소라 속

뒤틀린 세상

비비 틀어 올리다가,

얽어맨

노오란 띠지붕 감돌아

밀감잎에 스민다.

3. 돌맹이

포구로 돌아와 보면

고향은 언제나 타향인데,

반기는

어정쩡한 표정들 있어

아아, 굽어보면,

맨발로 짓무루던 유년

피어나는

미소들……,

4. 비바리

정일랑 돌틈에 묻고

돌아서면 시퍼런

작살

쌍돛대

하늘을 박차

태양을 밀어붙이며,

망사리 두둑한 무게만큼

부풀어 오르는

가슴.

 

제주를 압축한 바람, 돌, 여자를 각기 논하기 이전에 서장(序章)으로서 바람, 돌을 제시하는데, 비바리가 꼭 들어가 있다. 바람이 아무리 세고 날카롭다지만 비바리의 치마폭에서 울고 있다. 그 거친 바람의 거센 저항을 막기 위해 돌맹이는 비바리의 방파제가 된다.

그래도 비바리는 그 바람을 들이키고 돌처럼 굳건하게 버티고 살고 있다. 바람, 돌, 비바리, 삼다가 상부상조 속에 톱니바퀴처럼 얽힌 채 숙명처럼 살아가고 있다.

바람은 여기저기 휘몰아 치다가 소라 속까지 비비고 들어갔다가 아늑한 노오란 띠지붕 감돌다가 밀감잎에서 조용히 안주한다. 오래만에 귀향한 고향은 이제 고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심히 굽어본 돌맹이를 대하는 순간, 유년시절 바닷가 작지(돌맹이) 위를 누비며 캐고 잡던 보말들이나 게들에 대한 향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살을 잡은 비바리는 돌틈에 살며시 두고가는 정이 많고 수줍은 비바리가 아니고 전사(戰士)였다. 말의 뒷발질 보다도 강하게 하늘을 차고 잠수하는 비바리의 전리품은 비바리의 가슴을 한없이 부풀게 한다.

다음은 <서귀포 3제>이다.

 

서귀포3제

1. 천지연

폭포는

옥황상제의 목소리로 하늘을 가리고

몰래 온

꽃선녀들

흰 가슴 씻던 못물엔

그 때의 한숨만 남아

잔잔히 퍼져가는

파장・・・,

 

2. 밀감

한라산 치마폭에

볼 부비며 안긴 재롱둥이

밤에는 등불 꺼도

환히 밝힌 골목길을

지금도 눈빛 고운 처녀

부끄럼타는

볼.

 

3. 해녀

해녀는

물속에만 눈을 뜨고 입을 연다.

남몰래 옷을 벗어

모든 것을 내맡겨도

오히려 못 믿을 곳은

휘파람

너머

세상.

'서귀포 3제'는 '삼다도'의 축소판이다. 유토피아와 그리움의 서귀포를 그리고 있다. 옥황상제와 선녀가 등장하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계 속에서, 한라산 치마폭에 어린 아기처럼 재롱재롱 매달린 황금의 밀감은 캄캄한 한밤중도 훤하게 밝힌다. 그러나 그러한 서귀포만은 아니었다. 남 몰래 옷을 벋고 바다에 뛰어든 해녀는 물속에서만 눈을 뜨고 입을 연다. 못 믿을 곳은 위험한 바다 속보다 숨비소리 저 너머 세상이었다. 전편의 '비바리'와 '해녀'는 가슴찡한 해녀찬가이다.

다음은 문상금 시인의 <누름돌>이다.

누름돌

 

내 뛰는 가슴을

지그시 눌러줄

누름돌 하나 갖고 싶다

김치독이나 된장독 혹은

무장아찌를 가득 담은

투박한 항아리에

척 자리하고 앉아

그것들의 숨을 단숨에 죽여

맛깔나게 숙성되도록

한 몫하는 누름돌

열정이나 설렘

꿈이나 도전 같은 것

통째로 지그시 눌러줄

누름돌 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다

누름돌 밑에서

묵직하게 눌리며

더 아삭아삭해지는 김치처럼

물씬 발효된 진한 영혼으로

너에게로 익어가고 싶다

그저 묵묵히 제 자리만을 지킴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누름돌은 늘푸른 사철나무와도 같다. 나무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단 1미리도 안 움직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늘도 만들어 준다. 생의 다할 때까지 오직 처음 그 자리만을 지킨다.

누름돌은 김치독이나 된장독만이 아니고 뛰는 가슴까지도 억제해 준다. 물씬 발효된 진한 영혼으로 너에게로 익어가고 싶다고 독백까지 한다. 그런데 이것은 누름돌 자신이 아니고, 그가 빚은 행위로 일어난 결론적인 현상이다. 이러한 애절한 간절함이 있는가 하면, 그것들의 숨을 단숨에 죽여 맛깔나게 숙성되도록 한 몫하는 잔인함도 있다. 이 모순을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음은 박동일 시인의 <미풍>이다

 

미풍

옛날 사진첩 들쳐보던 아내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저 세상에 갈 때 딱 하나만 갖고 갈 수 있다면

뭘 갖고 가실래요

당신 사진이나 한 장 품고 가지 딴 게 있나

당신은

뻔한 걸 물어볼 게 있나요

아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내 입가엔 야릇한 미소가 번지네

우연히 부부가 나눈 일상적인 대화 속에 당연할 것 같은 삶의 한 모습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을 때 어떠한 대답들이 나올까 흥미스럽다기 보다는 걱정스럽고 은근히 두렵기까지 한다. 뭘 갖고 가실래요? 당신 사진 한장! 읽은 필자로서도 가슴 흠찔한 한 마디였다. 무심히 던진 한 마디에 깊은 감동이 순간적으로 주변에 퍼지고 있다.

다음은 성대림 시인의 <비문증(飛蚊症)>이다.

비문증(飛蚊症)

모기 한 마리

오른 쪽 안구에 날아 들어와

호박(琥珀)에 박힌 채 굳어져

눈을 좌우로 돌리면

같이 날아서 움직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벌레 한 마리 둥글게 말려있고

오래된 거울처럼

어두운 점들이 촘촘하게 깔려있다

일종의 노화현상이라

지니고 다녀야 할 노리개가

하나 더 늘었다

다행스럽게도

몸 상태가 좋아지면

곤충과 점들은 작아지고 밝아진다

박제된 모기는 그래서인지

오늘도 내 눈치

슬금슬금 살피고 있다

필자는 부끄럽지만 '비문증'이라는 단어와 병명(?)을 처음 알았다. 필자도 박제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이러한 모기를 갖고 있다. 정말 살아있는 모기로 착각해서 손뼉 치듯 두손으로 가끔 헛치기도 한다. 그 것을 지니고 다녀야 할 노리개로 인정하라고 한다. 무조건 배제, 배척, 제거의 논리가 아니라 공생의 길을 권유하고 있다. 인생의 노화현상이란 다른게 아니고 좀 불편하더라도 공존, 공생의 길을 찾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1949년 제주시 삼양출신. 1979년 <현대문학> 11월호 <오염지대> (이범선 추천) 초회추천. 1980년 <오사카문학학교> 1년 수료(본과52기). 1987년 <문학정신> 8월호 <영가>(김동리 추천)로 추천완료. 2006년 중편 <이쿠노아리랑>으로 제7회 해외문학상 수상(로스엔젤레스). 2006년 소설집 <이쿠노아리랑> 발간. 2007년 <이쿠노아리랑>으로 제16회 해외한국문학상 수상(한국문인협회). 1996년 일본중앙일간지 '산케이신문' 주최 <한국과 어떻게 사귈 것인가> 오피니언 1위 입상. 2018년 <해외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의> 대통령 표창장 수상. 2020년 <재일한국민단 오사카이쿠노 남지부>지단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제주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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