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7)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1대대 집단 탈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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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7)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1대대 집단 탈영 사건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2.06.1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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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7)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1대대 집단 탈영 사건 (남로당 중앙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 중위 지시)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이 북제주 제주읍에서 제11연대 정비에 힘쓸 때인 1948년 5월 20일 밤 남제주 대정면 모슬포 주둔 제9연대 제1대대 병사들의 집단 탈영하는 사건이 생각지도 않게 벌어졌다.

남제주군 대정면 모슾포 주둔 제9연대 배치도
남제주군 대정면 모슾포 주둔 제9연대 배치도

5월 20일 모슬포 주둔 제9연대 1대대에서 통신대의 최모 상사 인솔하에 하사관 11명과 병사 30명 등 41명이 개인 병기와 장비, 그리고 실탄 5600발, 경비대 트럭을 갖고 탈영했다[제주4 3사건자료 《미국자료편 ①》 7권. p. 68. 주한미육군사령부 “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1948년 5월 22일∼24일 (No. 842, 1948. 5. 24. 보고) 경비대원 탈주].  탈영병들은 대부분 제주토박이었다.
  5월 21일 새벽 4시 탈주병 30명이 대정지서를 공격하여 경찰 3명과 사환 1명을 살해하고, 지서장에 부상을 입혀 납치해갔다.(방첩대 정기보고 제122호, B-2)(상게서, p.68.)
<그림2>
이것은 한달 전인 4월 20일경 남로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중위가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총책 김달삼과의 회합에서 국방경비대 병사들을 남로당제주도당인민유격대에 합류시키기로 협의한 적이 있었다(문창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제주도인민유격투쟁보고서,  제주 대림인쇄사, pp.78 ~ 80.)
  이 탈영 사건은 전적으로 문상길 중위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5월 20일 밤 11시 ~ 12시 쯤 완전 무장을 한 41명의 탈영군인들은 부대 인근인 대정면 보성리에 있는 대정지서(대정골 보성향사에 설치되어 있었다) 밖에 트럭을 세우고 열을 지어 도보로 지휘관의 구령에 맞춰 열을 지은 상태에서 당당하게 대정지서 입구에 진입하였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③’, 서울 : 전예원, 1995, p.115.). 이때 다른 경찰 지서와 연결된 통신선은 모두 절단하였다. 11시 30분경에 육군 가짜 소위 계급장을 단 지휘관이 안창호 대정지서 주임에게 ‘산쪽에서 대정지서를 습격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돼 상부의 명령으로 응원나왔다.
  대정지서 내에서 가장 취약한 장소가 어디냐 하면서 이제 곧 국방경비대 병력을 배치할 테니 안심하고 안내하라고 하였다.

4.3사건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정지서 표지석.
4.3사건 당시 상황을 기록한 대정지서 표지석.

4·3사건 이후 이미 대정지서에는 7개소의 초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9연대 탈영병들이 대정지서에 들어가  7개소의 초소마다 경찰관 1명과 제9연대 탈영병 4~5명이 배치되었다. 그 후 2~3분이 지나자마자 호각소리와 함께 탈영한 국방경비대원들은 일제히 대정지서 경찰관들에게 총질을 한 것이다(상게서, p.118..).
  대정지서를 습격한 국방경비대 탈영병들은 안덕지서, 중문지서, 제2구 경찰서를 차례로 습격하려 했으나 시간에 쫓겨 그냥 지나면서 통신망인 전선만 절단하고 곧바로 서귀포로 갔다.
제2구 경찰서에 도착한 이들은 숙직 감독인 경찰관 경위에게 ‘우리는 공기가 험악해 상부 지시로 응원 나왔다’ 고 하면서  ‘우리는 두 군데로 토벌을 가야 하는데 차량이 한 대밖에 없으니 차량 1대를 지원해 달라’고 하여 차량 1대를 빌려 타고는 아무런 행동없이 제2구 경찰서를 떠나 남원쪽으로 나아갔다.
빌린 차량은 징발된 민간인 차량이었다. 차량 2대에 분승한 이들은 약속 장소인 남원면 남원리에 갔으나 남로당 인민유격대측과 연락이 되지 않자 되돌아와서 신례리쪽으로 남로당 인미유격대 있는 쪽으로 이동중이었는데, 빌린 차량 운전수가 이들의 대화를 듣고는 위험을 즉시 알아차리고 차를 세운 뒤 ‘엔진이 과열되었으니 물로 식혀야 된다’고 하면서 물을 뜨러 가는 척 하다가 그대로 줄행랑을 쳐 서귀포로 가서 신고하게 된다(상게서, p.124..).  
제9연대 탈영병과 남로당인민유격대가 서로 연락이 안된 이유를 노획문서인 『제주도 인민 유격대 투쟁보고서』 문건에는 ‘문 소위가 우리에게 보낸 연락 방법과 탈출병들이 연락한 방법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든 것에 기인한다’(문창송. 전게서, P. 81..)고 기록되고, 제11연대 토벌작전으로 남로당 인민유격대 피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5월 21일, 아 부대원 2명이 국경 탈출병과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남원리(南元里)에 복병 중 경관차가 질주하여 오는 것을 국경차로 오인하고 손을 들고 차에 접근하여 본 즉 경관차였고, 피할 시간적 여유가 없으므로 할 수 없이 개(경찰을 의미, 남로당인민유격대 측은 경찰을 검은개, 국방경비대를 노랑개로 칭했다)에게 달려들어 개의 총을 빼앗았으나 결국 다른 개의 총에 학살당했음(상게서, PP.85~86.).
즉 접선 약속 장소인 남제주 남원리 쪽에 있던 남로당인민유격대 안내원 2명이 접근하는 경찰 수송 차량을 제9연대 탈영병 탑승 차량으로 잘못 생각하여 정지시키려다가 경찰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에 제9연대 탈영병들은 남원면 남원리까지 갔다가 남로당인민유격대 안내원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남로당 인민유격대 쪽과 접선을 하지 못한 제9연대 탈영병 군인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중산간 어느 부락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탈영병들은 부락의 어느 외딴 초가집으로 들어가 여주인에게 ‘우리는 폭도들을 토벌하러 나온 국방경비대 군인들이다. 배가 고프니 밥을 좀 해 달라’고 하였다. 이 말을 안방에서 엿들은 남편이 ‘수상하다’고 느끼고 몰래 뒷담을 넘어 달려가 대정지서에 신고하였다(『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③』전게서, p.130.). 
다음날인 5월 22일,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은 국방경비대(육지에서 온 11연대 병력, 탈영부대인 제9연대 1대대는 탈영사건으로 불신을 받아 무장해제 되었음)가 출동하여 이들을 포위하고 ‘투항하라’고 하였는데, 21명은 산으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도주하였고, 탈영병 41명중 20명은 대정 인근에서 5월 22일 체포되었다. 이들이 탈영할 때 갖고 있던 소총 19정과 실탄 3500발이 회수되었다(『제주4 3사건자, 미국자료편 ①』 7권, 전게서 p. 70. 1948. 5. 26. No. 844.). 체포된 20명은 부대로 끌려와 조사를 받고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탈영하는 날 당직사령인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는 자신의 지시로 탈영사건이 발생했음을 잘 되었다 하여 새벽녘에 비상을 걸었으나 인원점검만 했을 뿐 적극적인 탈영대책을 세우지도 않았고, 일부 병력들을 피습당한 대정지서로 보냈으나 곧 돌아오고 말았다. 문상길 중위는 자신이 해 놓은 일이라 탈영병 수습 대책에는 소극적이었다.
 
탈영사건 4~5일 후에야 탈영한 제9연대 나머지 21명과 남로당인민유격대와 연락이 되었다. 이때는 각각 99식총 1정식과 99식 탄환 100발씩만이 남아 있었다. 이 때 연락이 안 된 원인은 문상길 중위가 남로당인민유격대에게 보낸 연락 방법과 탈영병들이 연락한 연락 방법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진다(.문창송, 전게서, p.81.).
  탈영 병력과 미회수된 무기와 탄약은 남로당인민유격대의 전력을 강화하는데 큰 보탬을 주었을 것이다.
탈영군인들의 명단(양조훈,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Ⅰ』제주 : 제주4·3평화재단, 2019, p.65.)을 보면 김석종(구좌면 세화리 21세), 고두언(제주읍 도평리 17세), 고태숙(중문면 대포리 21세), 허창익(서귀면 호근리 30세), 전재평(중문면, 대포리 26세), 홍기병(한림면 명월리 25세), 고수남(한림면 두모리 20세), 이성부(대정면 안성리 21세), 김성순(대정면 안성리 20세), 강기창(3기생. 대정면 안성리), 문덕오(대정면 상모리 27세), 김원보(대정면 동일리 21세), 강일영(대정면 동일리 20세), 고군현(대정면 안성리 23세), 김창흥(남로당인민유격대 제1중대장·전 국방경비대 제9연대 2등 중사·별명 맹호, 남원면 신흥리 25세), 강정호(4기생. 성산면 오조리 23세), 김태길(대정면 영락리 19세), 김태흥(남원면 남원리)(『제민일보 4·3취재반. 4·3은 말한다 ③』, 서울 : 전예원, 1995, p.114.)등이다. 이들 중에 체포된 군인들은 일반 군법회의의 선고결과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제주도파견 육군 헌병감의 지휘하에 1948년 10월 2일 오전 9시 실시됐다. 모든 선고는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승인됐다. 이날 처형된 21명은 제주도에 주둔했던 제9연대의 탈영병들이다.

1948년 6월 17일자 『조선중앙일보』와 『동광신문』에는 ‘지서 습격한 경비대원 / 제주도에서 32명을 체포’ 란 제목의 기사를 냈다.

제주도 9연대 부대대장 시절의 이세호. 앞줄 맨 왼쪽이 이세호 대위, 두 사람 건너 김익렬 연대장, 심흥선 대위, 문상길 중위.
제주도 9연대 부대대장 시절의 이세호. 앞줄 맨 왼쪽이 이세호 대위, 두 사람 건너 김익렬 연대장, 심흥선 대위, 문상길 중위.

 ‘제주도에 파견돼 있던 판검사 일행이 현지 국방경비대로부터 입수한 보고에 의하면 4·3사건 당시 대정면 경찰지서를 습격하고 서원을 멸살 소각하는 등의 반란을 일으킨 국방경비대원 32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지명 수배되고 있는 반란 경비대원은 41명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이들을 처결하기 위하여 현지에 고등군법회의가 설치된다고 한다.’ 라고 보도하고 있다(『제주4 3사건자료[신문편 ②』, 전게서, p.143.)
 
당시 제9연대 제1중대장 이세호 중위는 월간조선 2012년 8월호에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948년 5월 20일 오전 5시 비상나팔 소리가 적막을 깨뜨리며 울려 퍼졌다. 연병장으로 달려갔을 때 주번사령 문상길 중위가 ‘큰일 났습니다. 간밤에 연대병력 약 40명이 탄약고를 부수고 보관 중인 무기와 탄약을 절취해 탈영했다고 합니다. 주번 사령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며 보고를 드립니다’라고 했다.”
  탈영보고를 받은 대대장 직무대리(대대장 요원인 임부택 대위는 제주에서 박진경 제11연대장을 도와 연대 작전과장 임무를 수행중이었고, 신임대대장 고근흥 대위는 5월 25일 부임. 그러므로 5월 21일에는 대대장이 공석중이었다)인 제1중대장 이세호 중위는 제주읍에 있는 제11연대장 박진경 중령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탈영병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전화선마저 모두 절단해 버렸다.
  주번사령 문상길 중위에게 ‘부재중 더 이상의 사고가 나지 않도록 당부한다’.는 말을 남기고 9연대 사병 2인과 같이 부랴부랴 어선인 발동선을 타고 제주읍 토벌사령부로 향했다. 이 발동선에는 마침 제주 감찰청에 보고하러 가는 대정지서 송순옥 순경외 2명의 경찰관도 같이 승선하게 되었다.
  서회선 일주도로인 신작로를 택하지 않고 해상 선박편을 이용한 것은 남로당 마을 세포원 중 열성 분자로 조직된 기초 전투요원인 자위대원들이 지령을 받고 일주도로변에 차량이 지나지 못하도록 돌무더기를 쌓아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로당 자위대가 도로에 차량통과 방해 돌무더기를 갖다 놓은 것을 9연대 군인들이 치우고 있다.
남로당 자위대가 도로에 차량통과 방해 돌무더기를 갖다 놓은 것을 9연대 군인들이 치우고 있다.

박진경 토벌사령관에게 전말을 보고했다. 박 사령관은 “이 대위,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귀관이 지휘하는 9연대는 제주도 병사들이 많으니까 당분간 토벌작전에 9연대 투입을 보류하고 별도 명령이 있을 때까지 장병들 신상과 동태파악에 최선을 다하게”라고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귀대 후 문상길 중위에게 박진경 사령관의 지시사항을 소상히 전해주었다(『월간조선』 8월호,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이세호 전 육군참모총장”, 서울 : 조선뉴스프레스, 2012, p. 268).
  탈영병들은 대부분이 제주출신들이었다. 이 탈영 사건으로 제주출신 병사들이 크게 불신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즉 ‘제주출신 9연대 군인들은 빨갱이’라는 인식이 크게 퍼져 나간 것이다.
  미군정은 제9연대 41명이 집단 탈영 사건을 다음과 같이 사후처리를 하여 진압 토벌작전에 대처하였다.
첫째, 제9연대 병사들을 무장해제하였다.
둘째, 제9연대를 해체시키고 잔여 병력을 제11연대에 편입시켰다.
셋째, 연대본부를 모슬포에서 제주읍으로 이동시키고 본부는 제주농업중학교에 설치하였다.

제11연대(연대장 박진경 대령)본부인 제주농업중학교 본관
제11연대(연대장 박진경 대령)본부인 제주농업중학교 본관

 당시 제주출신은 모두 ‘모슬포 대대(제9연대 1대대를 지칭)’라는 이름 아래 1개대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탈영사건 이 후 모슬포 대대를 연대 본부를 거쳐 제주읍 오등리 죽성마을 천막속에 분리시켜 놓고 토벌박전에 간혹 투입 했으나 그 횟수는 적었다. 육지부에서 들어온 5, 6연대 출신 병사들은 미제 M-1 소총으로 무장되었지만 제주출신 9연대 병사들은 일제가 남기고 간 99식 소총을 갖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제9연대에서 부대원이 탈영하거나 또는 무기와 탄약 등을 남로당인민유격대 측에 제공한 일은 여러 차례 있었으나 이와 같이 40여명의 대병력이 한꺼번에 인민유격대 측에 합류한 탈영 사건은 제주도4· 3사건의 진행과정에서 처음이며 마지막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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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악전투 2022-06-13 14:37:25
남로당제주島당 대정면당 위원장 이운방은 “4ㆍ3주동자는 빨갱이로 봐야지, 최종 목적은 공산주의니까. 그들의 우선 목적은 통일조국 건설이고”라고 증언했다

녹하악전투 2022-06-13 14:36:41
제주4ㆍ3발발의 주체는 남로당이고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이며 남로당 강령은 마르크스ㆍ레닌 사상에 입각한 공산주의체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