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12)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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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12)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3.2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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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 (12)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

제11연대 통신 대장이었던 강태홍(예비역 육군 소장. 육사 7기 후반 출신으로 옥본통신감· 합풍통신 전무국장·한전 부사장을 지냈다. 육사 7기 후반은 「7후」는 각연대 하사관 중에서 유능한 사람과 의무·법무·통신 등 각특과분야의 우수 인재들을 흡수하여 편성한 후보생 반이었다. 이들은 4.3사건 공비토벌에 참전중인 고급 하사관으로 현지에서 임관되었다.)의 회상은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된 방에서 3칸 정도 떨어진 방에서 침식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6월 18일 새벽 3시경 ‘팡’하는 총소리에 놀라 깨어나 밖으로 뛰어 나갔더니 제주농업중학교 본관 복도에는 헌병들이 뛰어 다니기에 “무슨 일이냐?” 질문을 하니 “연대장님이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했다. “범인은 누구냐?” “잘 모르겠습니다.” 라는 답변을 들었다.

제11연대장실은 바로 나의 옆방이나 다름없기에 달려갔더니 주위에는 보병들이 보초를 서 있었다. 나는 시체 밑에 깔린 모포에 총탄이 관통한 것을 보고 나왔는데 나로서는 말단 소위에 불과하여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제주4·3사건 때 나는 육사 7기 후 통신 2기로 현지 임관하여 김익렬, 박진경, 송요찬 연대장 밑에서 통신대장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통신대원은 약 30명으로 서울 통위부(육군본부)와도 통신이 가능한 통신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나는 제주4·3사건 현장에서 세분의 연대장을 모셨는데 박진경 연대장은 말씀이 젊잖았고 부하들에게도 막말을 쓰지 않고 경어를 쓰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으며 주위에서는 박진경 연대장을 앞으로 대한민국의 훌륭한 ‘참모총장 감’이라고 하는 칭송의 말을 들은 것이 기억이 난다. 김익렬 연대장은 성격이 괄괄했으며 ‘육군의 3대포’란 말을 들을 정도였다. 미국 CIA에서 암살 때 쏜 M-1 소총탄을 찾기 위해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때 아닌 6월 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실에서 총성이 들려 요란하여 당직장교가 달려갔더니 박진경 연대장은 집무실에 놓인 침대위에 누워서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 이미 숨이 끊겨 있었다.

바로 비상소집을 걸어 달려온 위생병 손선호 하사는 울면서 박진경 대령의 시신을 알콜로 닦았는데, M-1소총의 탄환이 심장과 머리를 관통해 있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 위생병 손선호 하사는 최 상사의 지시를 받고 연대장을 암살했으며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 암살 후 M-1소총을 숨겨놓고 침실에서 자는 척 하다가 비상소집이 걸리니 달려와서 슬피 울면서 자기가 암살한 연대장의 시신을 닦았던 것이다.

사건 즉시 비상소집이 걸렸다. 총기 검사를 하는 등 여러 조치를 했으나 범인의 단서조차 포착하지 못하였다.

당시 제11연대 인사참모 최갑중(육사 1기. 전 예비역 육군 준장 최갑중, 경남김해·39사단장·경남지사역임) 대위의 회상을 보면

‘나는 연대 인사참모로서 박진경 연대장이 암살이라는 급변을 당하여 며칠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지쳐 쓰러지다 시피 책상에 엎드려 잠에 취해 자다가 우연스럽게 내 책상 서랍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 편지는 바로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을 지목한 투서였다. 제3중대장 문상길 중위와 연대 정보과 선임하사인 최상사를 조사해 보시오‘라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내용에 놀란 나는 문상길 중위를 찾았더니 서귀포에 있는 약혼녀 고양숙집에서 몸이 불편해 누워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1개 소대 무장병력을 이끌고 서귀포로 달려가 땀을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문상길 중위를 체포하여 들것에 실어 압송했다.

제9연대 남로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의 애인 고양숙을 살펴보면

문상길은 모슬포 주둔 제9연대 소대장·중대장 시절 서귀포 처녀와 열애에 빠졌다.

그 처녀가 제주고녀를 나온 고양숙(高良淑, 18)[제민일보 4·3 취재반. 4·3은 말한다 ③. (서울 : 전예원,1995), p.205.]이었다. 그의 연애소식은 부대 안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문상길 중위의 약혼녀(월간조선 8월호. 2012. p.268.)는 서귀포에 살면서 떡, 과일, 음료수 등을 가지고 거의 매주 면회를 왔다.

고양숙과 절친인 강애숙[박윤식. 참옥했던 비극의 역사 1948년 제주4·3사건. (서울 : 도서출판 휘선, 2011), p. 170. 고양숙의 절친인 강애숙은 강길화(제주도초등교원양성소 3회. 법환교 교사. 1932.02.06.)으로 추정이 된다.]씨는 1932년생으로 서귀포가 고향으로 문상길의 애인 고양숙과는 같은 고향(섯동네)에서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당시 ‘문소위’(문상길 중위)는 키가 작고 얼굴이 잘 생기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그가 약혼녀 고양숙의 집에 들를 때면 자기는 일부러 자리를 피해주었다고 한다.

강애숙(강길화)씨 부친은 강대원, 모친은 문옥란 사이에 장녀로 태어났다.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으로 남로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 중위의 애인 고양숙(18세)과 그녀의 어머니 윤장옥(45세)이 헌병대에 연행되어 목숨을 잃었다.[윤태준(서울시동대문구전농동. 대령 예편. 윤장옥의 동생)의 1995년 증언.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1기생 제민일보 4·3 취재반. 4·3은 말한다 ③. (서울 : 전예원,1995), p.218.]

문상길의 약혼녀 고양숙(高良淑)이 연행된 것은 문상길 중위가 제9연대 안에 있는 80여 명이 넘는 남로당원과 오일균 소령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애인을 대신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1948년 8월 9일 통위부 고등군법회의 재판정에는 참고인 자격으로 김익렬 중령과 문상길 중위의 애인인 고양숙[제민일보 4·3 취재반. 4·3은 말한다 ③. (서울 : 전예원,1995), p.210.]도 출석, 눈길을 끌었다.

연행된 사람은 문상길 중위를 시작으로 암살 사건 연루자들[국제신문 1948년 8월 10일. 박(朴) 대령 살해범 / 고등군법회의 개정]은 11연대 소속의 신상우(중사. 20세) 손선호(하사. 22) 배경용(하사. 19) 양회천(2등상사), 이정우(하사. 미체포) 강자규(하사), 황주복(하사), 김정도(하사) 등 모두 9명이었고 이중에 이정우[문창송편. 한라산을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제주: 대림인쇄사, 1995), p.82.]는 M-1소총 1정을 가지고 탈영하여 한라산에 있는 남로당 인민유격대에 들어갔다. 문상길의 약혼녀 고양숙도 연행되었다.

당시 23세였던 문상길 중위는 처음에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면서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으나 계속된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암살사건 전모와 연대내 좌익계보를 자백했다.

문상길 중위는 4월 20일경 9연대 근무 남로당 사병 프락치 고승옥의 연락으로 남로당 제주도당 군책 인민유격대 1대 사령관 김달삼과 만나 경비대원 40명을 도주케 하고 5월 중순에는 제2차로 박 대령을 살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정동웅. ‘동란 제주의 새비극 박대령 살해범 재판기. 새한민보 1948년 10월 상순)

문상길 중위는 소위 때부터 모슬포 동네 사람들로부터 ‘문 소위, 문 소위“ 로 불리어졌고 제9연대에서 말을 타고 거닥 거닥 타고 와서 유유히 말을 매어놓고 김달삼 집에 며칠 머무르다 가기도 했다.[제주4·3연구소. 4·3증언자료집 Ⅰ. 이제사 말햄수다. (제주 ; 도서출판 한울, 1989), p.200]. 그때 김달삼 가족들은 김달삼의 큰형(이승만)이 장사를 하는 대구로 피신해 갔을 때이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가슴에 붙은 붉은 부적이 발견되면서 덜미가 잡혔다. 문상길의 가슴에 빨간 물이 들어 있는 것을 이상히 여긴 수사관이 가까이 가서 보니 종이가 땀에 젖어 가슴에 붙어 있었는데, 종이에 쓰인 글씨가 땀에 범벅이 되어 가슴을 빨갛게 물들이고 글씨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 종이가 부적임을 알아 본 조사관이 “박진경 연대장을 죽이고 가슴이 뛰고 불안해서 부적을 붙인 게지?” 라고 묻자 문상길은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자신이 그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있음을 자백하였다.

서귀포 무당이 문상길을 살리려고 써 준 부적이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증거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김종면 소령은 문상길에 대한 기초 조사가 끝난 다음 바로 서울로 돌아왔는데 ‘제주도에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어 정보국에 사건 보고도 할 겸 상경해 버렸다’고 회상했다.

「일단 서울로 돌아와 백선엽 국장에 사건을 보고했더니 백 국장은 대뜸 ‘문상길을 제주도에 그대로 두면 위험하니 서울로 호송해서 다시 정밀하게 취조해야 할 것’ 이라고 지시했다.」[ 백선엽. 실록 지리산. (서울 : 고려원, 1992),p.125.] 그래서 나는 다시 제주도로 돌아갔는데 미 고문관 존 리드 대위와 함께 갔다. 암살범 문상길을 비행기로 옮겨와 군기사령부에 넘겼다.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M-1 소총으로 직접 저격한 손선호 하사는 경북 경주 출신의 22세로서 당시 고향에 노령의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5인의 형제, 또 결혼하여 마누라가 있는 기혼자였다.

그는 좌익단체인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조직에 가담하였고 조선공산당의 선동과 주도를 한 대구 10·1폭동에도 가담했다가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대구의 제6연대에 제3기로 잠시 입대하였다.

그는 1948년 3월 부산 제5연대의 하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가 4월 20일에 제5연대 1개대대(오일균 대대)가 제주도 출동 시 제주도에 왔으며, 제주도에서는 선거방해와 급식투쟁 등 나름대로 제주 주둔 부대 내에서 좌익활동을 하였다.

남로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은 “제주도 무장봉기는 오직 전도 30만의 불타는 애국심의 집중적 발로인 것이며 이것은 진정한 구국항쟁일 것이다. 이것을 토벌하려는 자는 그 누구를 물론하고 민족 반역자의 오명을 받게 될 것이며 한라산 토벌을 아니 하느냐 또는 하느냐에서 그 누가 진정한 애국자이며 그 누가 미제의 주구인가 명확히 판단될 것이다.” 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하병사들에게 말을 하니 손선호는 문상길 중위와 호흡이 맞아 사상적으로 문 중위의 충실한 심복이 되었다.

손선호는 불을 품은 듯한 어조로 자기의 동료들에게 이런 말을 누차 하였다.

“친일 매국도당을 무찌르고 한라산에서 제주도 인민들과 함께 목숨을 바칠 것이다” 라고 했다.

제11연대 사병 숙소인 서비행장 안에서 남로당 사병 프락치를 규합하기 위한 조직 선전공작에 전력을 다했다. 5·10총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자기 담당구역인 한림면 일대의 각 투표장에서 선거 방해 공작을 하였으며 특히 5월 14일 대낮에 한림면 남로당 마을 자위대원들이 한림지서를 습격할 때 경찰관 강태경이 망루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교전 중에 남로당 마을 자위대원 4명이 사망했다.

모슬포 주둔 제9연대 군인들이 연락을 받고 현장에 도착하였다. 한림지서 습격 피해 수습과정에 손선호와 연결이 되어있는 프락치 제9연대 군인들이 이들 자위대원 시신을 ‘한림면민장’을 치르도록 했다. 여기에 참여한 제9연대 군인들은 훗날 5월 20일 41명이 총과 탄알을 가지고 탈영하기도 하였다.

5월 23일에는 병사 숙소에서 일반 병사들에게 급식 증가의 구호를 주어 수백 명 병사의 근무 태업을 하도록 선동을 하고 연대장 박진경의 앞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밥그릇을 가지고 기아시위를 하였다. 그리하여 박진경으로 하여금 완전히 병사들의 요구를 실행케 하였다.

또 5월 27일에는 진급 요구를 구실로 태업과 시위를 조장하기도 하였다.

딘 군정장관은 6월 18일 정오 이 암살사건을 직접 조사하기 위하여 경찰의 총포 연구 권위자 2명을 대동하고 18일 정오 공로(空路)로 제주에 향하였다(조선일보 1948년 6월 19일).

딘 군정장관은 현지 사정을 조사한 뒤 이날 저녁 7시 반 고 박진경 연대장의 시신을 싣고 귀경하였다(현대일보 1948년 6월 20일).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암살되자 통위부는 후임에 최경록 중령(일본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 일본 도요하시 예비사관학교(제59기)를 거쳐 일본 육군 준위 계급으로 8월 제대’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뒤 제주4·3사건 공비토벌, 한국전 때 11연대장으로 음성 부근 전투에서 전공을 세움. 1960∼1961년 참모총장을 역임."군인이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며 5ㆍ16 군사 쿠데타에 반대하다 사실상 강제 예비역 육군중장으로 예편된 뒤 자의반 타의반 미국으로 망명, 반(反) 박정희 활동을 펼침‘ 군에서 전역 당시 18평 가옥 한 채만을 소유할 정도여서 부하들이 쌀을 걷어다 줄 정도로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음), 부연대장에는 송요찬 소령을 6월 21일부로 임명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박진경 대령의 후임으로 온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도 암살하려고 두 차례나 시도했으나 세퍼드 군용견(독일산 세퍼드는 암컷으로 제주주둔 일본군견이었다. 북제주 한림면 상대리 주둔했던 일본군인은 철수하면서 그동안 편의를 봐 준 귀덕1구 구장 김영조에게 답례로 세퍼드를 준 것이다. 김영조구장은 이름을 ‘죵’이라 짓고 잘 키웠다. 4·3사건때도 김영조 구장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이 개는 먹는 량의 너무 많아 보리밥에 콩국을 끓여서 주었는데 부담이 되자 제주농업중학교에 주둔한 제11연대에 기증한 것이다.)이 있어 실패했다고 실토[고문승. 제주사람들의 설움. (제주 : 도서출판 신아문화사, 1991), p.463.]한 바 있다.

최경록 연대장은 독일산 세퍼드를 잠자리 옆에 꼭 두었는데, 그 이유는 경호원도 부관도 당번도 누가 남로당 프락치인지 몰라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나 개는 주인에게 뒤통수를 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박윤식, 전게서, p.174.)

최경록 연대장과 송요찬 부연대장은 제주에 부임한 즉시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 색출에 주력하는 한편, 전임 연대장과 같은 진압작전을 추진했다.

남조선 국방경비대는 최경록 연대장이 부임하던 날부터 수색작전을 펼쳤는데, 6월 21일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까지 구좌면 송당리 지경에서 48명을 체포하고 카빈총 1정을 회수했고, 같은 기간 동안 제주읍 삼양리에서 29명을 체포했다.[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괴G-2 Periodic Report. No. 868, 1948. 06. 24. 보고] 6월 25일에도 야간 작전으로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후 6시까지 수색작전을 펴 176명을 체포하고, 약 3만원의 돈과 50명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압수했다.(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괴G-2 Periodic Report. No. 871, 1948. 06. 28. 보고)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은 부산 기자단 일행에게 7월 10일, 7월 14일 2차에 걸쳐 회견하고 제주도 사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문답을 하였다.

(문) 앞으로도 토벌을 더 계속 할 터인가.

(답) 필요시에는 하겠다.

(문) 현재까지 체포된 폭도의 수효는 얼마나 되는가.

(답) 실제 전투에 종사한 정예부대는 아직 하나도 체포되지 않고 중간 연락대원과 물자운반 등에 종군한 자를 현재까지 1454명 체포하여 모두 석방하고 약 80명만 송청(피의자가 검찰청으로 넘겨지다)할 것으로 결정되었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21일).

최경록 연대장은 자신이 지휘하는 제11연대 진압작전 마지막날인 7월 15일 대구법조단 기자들에게 소요사태를 말해주었다.

(1) 4월 3일 사건 발생이후 7월 15일 현재까지 사령부에서 취급한 포로 수는 약 1800명 내외인데 그 중 석방자가 약 1600명 가량이고 현재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이 약 150명 가량이며 송청자가 46명이다. 송청자 46명은 주모자로 인정되는 사람들이며 그 중에는 여성이 약간 명 있다. 여성들은 대개가 가정부인인데 지식정도가 모두 고녀(高女)출신이다.

2) 지금까지 한라산을 중심으로 토벌을 4회 한일이 있었는데 산사람들을 체포할 수는 없었다.

3) 한라산에는 약 4개 연대(1개 연대 약 120명)로 약 600명이 잔존하고 있다.

4) 국방경비대원으로서 현지 재판을 받은 사람은 43명인데 그중 사형이 5명이고 10년 징역이 10명이다.

5) 국방경비대가 산에 올라가면 산사람들은 발포하지 않고 경찰관이 산에 올라가면 발포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7월 29일.)

신임 최경록 연대장의 작전은 수색작전을 펼쳤지만, 전임 연대장 작전보다는 완화된 것으로 추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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