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19)이영운, 멈춰버린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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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19)이영운, 멈춰버린 컴퓨터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7.04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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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운 선생님의 KOICA해외교육봉사활동 체험기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멈춰버린 컴퓨터

다카에 비가 내린다. 오랜만에 야단스럽지 않게 얌전하게 천천히 내리고 있다. 아침에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에 널었는데, 내리는 비에 옷들이 푹 젖는다. 다른 집들도 옥상에 거나하게 빨래를 널어 두고 있다. 그런데 비가 와도 빨래를 거둬들이는 집이 없다. 어차피 다시 빨아도 다시 말리기도 그렇고 또 언젠가는 다시 뜨거운 태양의 열기가 금새 옥상을 점령할테니까 그런 모양이다.

마음은 오랜만에 차분히 가라앉는다. 아침은 남은 식은 밥에 된장찌개를 말아 먹었다. 그리고 믹스 커피를 마시니 기분이 상승되었다.

어제는 강원도에 사는 여동생의 아들 재우가 결혼했다. 딸 진솔이와 집 사람이 참석했다. 강원도 가족들에게 축하의 말과 참석치 못한 죄스러움을 전했다. 사실 꼭 참석해야 하는데 여건이 이러하니 불가능하다.

조카 재우는 정형외과 의사다. 가까운 친족 중에 크게 성공한 경우 같다. 푸념으로 우리 진솔이 짝도 좀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식을 둔 부모는 자식이 짝을 찾아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독립해 사는 것인데 나는 아직 아들 딸 하나도 마무리하지 못한 못난이다.

이번 주는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우선 컴퓨터가 고장이 나서 정종량 자문관에게 이야기했더니, 산다가에 아는 수리공이 있으니 가자고 했다. 노트북의 프로그램을 모두 지우고 프랑스어 버전을 다시 깔았다. 처음에 엄청난 돈을 요구했다. 결국 만 세파 주고 고쳤다. 그러나 여전히 작동이 잘 안된다. 결국 코이카 사무실에서 근무 중인 김형철 코디네이터 선생님에게 부탁했고 그가 손봐주었다. 그러나 내 사무실로 돌아와서 부팅하면 또 작동이 잘 안돼서 결국 세 차례나 코이카 사무실로 왔다 갔다 했다. 아마 90% 정도는 정상을 되찾은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 고장이 생기면 조치하는 방법까지 익히고 메모까지 챙겼다. 김형철 코디는 전공이 컴퓨터라고 했다. 진작 알았으면 산다가의 이상한 기술자에게 돈을 투자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후회스러웠다.

김 선생님은 참 친절하다. 앞으로 문제가 생기면 우선 김 선생을 찾아가야 되겠다. 컴퓨터가 고장 나면 세상과 문이 닫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정말로 당해보니 무력한 좌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으니, 다시 새 마음으로 출발해야겠다.

현지 활동비가 지급되어서 사무용 컴퓨터와 각종 사무기기를 구입할 생각이다. 메디나에 있는 TEWA 컴퓨터 가게에서 200여 만원 가까운 물건을 견적했다. 컴퓨터, 프린터, 텔레비전 등이다. 다음 주에는 일괄 구입하여 제대로 사무실을 갖추려고 한다. 가격이 저렴하고 또 친절, 자상해 보인다. 사장의 이름이 ‘돼주’이고, 사무원이 ‘따귀’여서, 돼지와 뺨을 연상시킨다. 재미있다.

(2014년 9월 20일)

믹스커피, 그리고 성가

아침, 상쾌하다. 다섯 시에 집 앞의 모스크의 스피커 소리에 잠을 깼다. 습관대로 방 청소를 하고 세탁기를 돌렸다. 그 사이에 빵 반쪽, 계란 한 개, 사과 한 개, 냉수 한잔으로 아침 식사를 마쳤다. 이 정도면 괜찮은 토요일 아침이다. 계란은 많이 삶아서 냉장고에 보관하고 하루에 하나씩 먹는다.

다정다감한 김유나 선생님
다정다감한 김유라 선생님

지금은 성가를 듣고 있다. 인터넷으로 성가를 50여 곡 다운로드 받아서 근무 중에 가끔씩 듣는다. 성가를 들으면서 일하면 지루하지도 않고, 능률도 오르는 것 같다. MP3 파일로 복사해서 집에서도 듣는다. 이번에 MP3 음악이 재생되는 라디오를 구입했다. 이 라디오로 저녁때는 BBC 영어 방송을 들을 수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믹스커피 한 잔을 마시며 성가를 들으니 가슴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믹스 커피는 문 건너 아파트에 사는 유나 선생이 내가 처음 집으로 초대했을 때 방문 기념 선물로 스틱 10개를 가져왔었다. 이제 3개 정도 남았다. 아껴 먹어야겠다. 무엇이나 귀하고 소중한 것이 이곳이다. 유나 선생을 초대한 것은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주었고, 집도 정리가 돼서 식사나 함께 하자는 뜻이었다. 음식 솜씨가 없으나 갈치조림과 된장찌개를 해서 함께 먹었다. 소박한 식사였다. 함께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김범우 집 옆에 세워진 명동성당
김범우 집 명례방 옆에 세워진 명동성당

알고 보니 그녀는 김범우 순교자의 후손이었다. 명동 성당 초대 회장이요 현재 명동 성당을 포함한 많은 땅들을 그 당시에 기증했다고 했다. 자기도 그런 사실을 몰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성당 관계자들이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찾아와서 김범우의 후손을 찾는다고 했고, 할아버지가 직계 후손이어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을 늦게야 알게 되자 조금은 방랑벽이 있던 할아버지가 열심한 천주교 신자로 변모했다. 결국 열렬한 천주교 신자로 임종했다. 김범우 첫 순교자의 돌봄과 섭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도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냉담(쉬는) 중이고, 그녀도 지금 개신교에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하긴 이곳에 한인 성당이 없으니 교회라도 열심히 다니는 것도 좋은 일이다.

김범우에 대해서 조금 살펴보도록 하자. 김범우는 역관 김의서(金義瑞)의 아들로 태어나 1773년 역과에 합격했으며, 종6품 한학주부까지 올랐다. 학문을 좋아하여 정약용의 자형인 이벽과 가깝게 지내다가, 이벽이 1784년에 천주교 교리를 전하자 그의 권면을 받아들여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승훈이 영세를 베풀기 시작하자, 김범우도 이벽의 집에서 그에게 영세를 받아 토마스라는 영세명을 얻었다. 우리나라 천주교 사상 두 번째 영세식이었다. 김범우는 천주교 신앙을 열렬히 전도하며, 동생 이우(履禹)와 현우(顯禹)까지 입교시켰다.

김범우의 집은 명례방(明禮坊) 장예원(掌隷院) 앞에 있었는데, 천주교 서적이 많이 있어 신자들이 자주 모여 미사를 드리거나 설교를 들었다. 양반 이벽의 집에는 하층민이 드나들기 어려워, 중인 출신의 김범우가 수표교에서 가까운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1784년부터 그의 집은 명례방공동체가 되었다. 김범우가 살던 명례방(현재 명동) 아래에 청계천이 있고, 중인이 모여 살았다.

1785년 어느 봄날 이승훈과 정약전, 약종, 약용 3형제와 권일신(權日身) 부자 등 양반과 중인 신자 수십 명이 모여 이벽의 설교를 듣고 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조의 관원이 도박장으로 의심하고 수색하였다. 그곳에서 예수의 화상과 천주교 서적을 압수하여 형조에 바쳤는데, 이를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한다.

서학(西學)에 대해 비교적 온건했던 정조 시대였으므로, 형조판서 김화진은 사대부 자제들은 알아듣게 타일러 돌려보내고, 중인 신분의 김범우와 최인길 두 역관만 잡아 가두었다. 그러자 권일신이 그의 아들과 함께 형조에 찾아가, 자신도 김범우와 같은 교인이라고 하며 성상(聖像)을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화진은 양반 자제들을 처벌하기 어려워 다시 잘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사대부는 모두 집으로 돌아갔지만, 김범우는 천주교를 저버리지 않았다. 판서가 천주교를 믿느냐고 묻자, “서학에는 좋은 곳이 많다. 잘못된 점은 모른다.”고 대답하며 신앙을 고수하다, 결국 단양으로 유배되었다. 그의 집에 있던 천주교 교리서들은 모두 형조 뜰에서 불살라지고, 서학을 금하는 효유문을 전국에 돌렸다. 성균관 학생 정숙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천주교인들과 공공연하게 완전히 절교하라.”고 통문을 보냈다. 1785년 3월에 돌린 이 통문은 천주교를 공격한 최초의 공문서이다.

달레 주교가 쓴 『한국천주교회사』에 의하면, 김범우는 유배된 뒤에도 계속 천주교를 신봉하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전도하였으며, 고문당한 상처가 악화되어 1786년경 세상을 떠났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첫 순교자가 된 것이다.

김범우가 살던 동네에 명동성당이 들어섰다. 1886년에 한불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은 자유롭게 조선 땅을 여행할 권리와 더불어, 건물을 짓고 한양에 거주할 권리와 토지를 소유할 권리까지 얻게 되었다. 이때부터 푸아넬 신부가 주도하여 명례방의 대지를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인들의 가옥은 좁았기 때문에, 윤정현의 집을 비롯해 여러 채를 계속 구입해야 했다.

대중교통수단 TATA
대중교통수단 TATA

푸아넬 신부가 작성한 1887년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아직도 (명동성당의) 건축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겨울 전에는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우리가 구입한 (명동의) 대지는 도시 중심부에 위치해 있으며, 중요한 기본 건물들을 다 지을 수 있을 만큼 넓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조선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이 가까워, 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가 침해받을 우려가 있다 하여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고 착공을 지연시켰습니다.”

대중교통수간 버스 DDD
대중교통수간 버스 DDD

1892년 봄에 설계와 공사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교회 터를 평평하게 닦아 놓은 뒤, 뮈텔 주교가 머릿돌에 축복하였는데, 코스트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인 1898년 5월 29일에 푸아넬 신부가 명동성당을 준공하였다. 그 자리의 지명이 종현이어서 한때는 ‘종현성당’ 또는 ‘뾰족집’ 이라고도 불렸는데, 곧바로 장안의 명소가 되었다.

김범우의 집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많은 지도자가 체포되고 순교한 지 100년 뒤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바로 그 동네에 명동성당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즉 서울의 명동 성당은 한국교회 창설의 시작이 된 명례방 집회가 이루어졌던 김범우의 집을 역사적으로 기념하여 건립된 성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이곳 세네갈에서 다니는 성베드로 성당에는 한국 신자는 물론이요 동양인은 한 사람도 없다. 이곳 천주교 신자들 혹은 나도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 한인 교회 목사님이 모두 같은 형제니 말이 통하는 개신교로 나오라고 나에게 말한다. 그러나 성당과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고 나처럼 나이 든 신자로서는 관점과 신앙관이 다르기 때문에 나는 어려움이 있어도 성당에 나갈 수밖에 없다. 사실 나로서는 이곳 성당에 다니면서 가톨릭인으로서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어쨌든 오늘은 마음이 안정되었다. 성가도 듣고 책도 읽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프랑스문화원 수강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문화원 불어반 수강 동료들과 함께

지난주부터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어 강좌를 수강하고 있다. 45시간 수강에 총 13만 5000 세파 등록금을 지불했다. 거의 30만원이다. 우선 수준별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필기, 말하기 듣기 시험을 봤다. 강사비, 교재비, 평가비 등이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 문화원이어서 거의 무료로 수강할 수 있으리란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또 매일 매일의 교통비도 만만치 않다. 택시비가 왕복 4000세파가 든다. 그래서 갈 때는 버스를 이용하고 있다. 대형 버스 DDD는 150 세파고, TATA 낡은 소형 버스는 200 세파다. 버스비는 아주 저렴하다. 그러나 오가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한 시간 기다려야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버스 정류장엔 비나 해가림 시설이 없다. 그냥 팻말만 있다. 그 더위에 한 시간 기다리는 것은 너무 힘들 시련이다. 또 타면 너무 많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도 없다. 그래서 버스에서 소매치기, 도난 사고 등이 너무 많이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엔 가격을 잘 몰라서 200세파 내면서 모네(잔돈)를 달라고 했더니 안내양이 주지 않는다. 옆의 젊은 친구가 설명해 주는데 산다가까지는 200세파여서 잔돈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더 낡고 협소한 버스가 가격은 더 비싸다. 제일 뒤쪽에 자리가 생겨 앉았다. 의자의 비닐은 다 도망갔고 노출된 스펀지가 너덜너덜 붙어있다. 그 좁은 공간에 5명이 바싹 달라 붙여 앉았다.

프랑스어 강좌는 젊고 뚱뚱한 마리안 로즈라는 여교사가 가르친다. 나는 기초반에 편성되었다. 수강생은 처음 10명 정도 되었는데 나날이 불어나서 지금은 20명 가까이 되었다. 반을 두 개로 편성해야 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강생들의 국적은 우간다, 말리, 멕시코, 미국 등 아주 다양하다. 서양어권 수강생들은 듣기가 뛰어나 보였다. 같은 어족에 속하고 어원이 비슷한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훨씬 유리할 것이다. 열심히 하고 싶으나 오가는 시간이 많이 들고, 사람이 많다 보니 언어 사용과 접촉이 제한적이고 또 경비도 만만치 않으니 오래 계속 수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올 때는 버스가 거의 끊기고 너무 어두워서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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