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92) 제주문학 2023년 여름호(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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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92) 제주문학 2023년 여름호(95)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7.04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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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제주문학 2023년 여름호(95)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오승철 시인(한국문인협 제주도지회장)의 추모특집으로 시작된 제주문학 2023년 여름호(95)는 장례위원장 강중훈 시인의 고별사,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이정환 시조시인의 조시, 오승철 대표시 <고추잠자리, 22> 외 4편, 추모 글 양전형 시인의 <언어에 날개를 달아주는 시인 오승철>이 게재되었다. 오승철 시인에 대해서는 <김길호의 일본아리랑>에 필자의 추도사와 오승철 시인의 생전의 마지막 시집 『다 떠난 바다에 경례』를 썼기 때문에 생략하고, 다시 오승철 시인의 명복을 빌면서 다른 시인들의 작품 5편을 소개한다.

강방영 시인의 <망각>이다.

 

망각

 

아련히 보이는 먼 숲인 듯

연초록으로 다가오는 목소리

지나간 노래도 풍경도

묵은 잎으로 다 떨구어

시간 따라가도록 보내면서

깨끗이 사라지는 삶의 끝에서

새로운 기억은 강물처럼 흐르고

 

아련한 목소리

가볍게 다가와 아늑하게 안아서

잠시 부드럽게 흔들어주고는

다시 사라지는 목소리

 

비가 오네 오늘

어제를 모두 씻어 내리며

새 아침 비가 흐르네

실루엣처럼 보이는 먼 숲은 연륜과 함께 지내 왔던 일상의 잔상이다. 화석과 같이 깊이 새겨지리라던 5월의 짙은 녹음과 눈부시도록 파아란 가을 하늘 같았던 일상도 기억의 편린 속에서 가물거린다. 실체였던 그러한 일상들이 비몽사몽 속에서 망각으로 돌입한다. 새로운 기억들도 강물처럼 흐르면서 모두 사라진다. 내일 내리는 비는 또 다시 오늘을 씻어 내릴 것이다.

다음은 고문헌 시인의 <꿈꾸는 자화상>이다.

 

꿈꾸는 자화상

 

시작이 설렘이라면

끝은 아쉬움이다

추수가 끝난 들녘 너머

계절도 쉬어가는 언덕에서

고결한 그리움의 꽃

억새가 토하는

황홀한 은빛 외로움도

새들도 깃들지 않는

가지 앙상한 나목도

기억 속에 묻힌

봄을 꿈꾸는

노을 진 자화상이다

 

시도 앞의 <망각>과 맥을 같 하고 있다. 기억 속에 묻힌 봄을 다시 꿈꾸는 윤회의 자화상다. 늦가을의 황량한 들판은 억새가 빚어내는 아름답고 황홀한 은빛 세계를 더욱 외로운 심연으로 빠트린다.

다음은 오안일 시인의 <금송아지>이다

 

금송아지

 

황금이 방에 가득 쌓였다 해도

즐거워서 웃음이 나올까요

어린아이가 있으면 재롱떨어서

재롱 바람에 웃음이 나옵니다

황금이 집에 가득 쌓인다 하면

지키기 위해 걱정이 많지만

아이는 재치 있게 생활합니다

생동하는 것이 즐거워지는 거

생동하는 가정에서 행복해지네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어른이 지키지 못하는 어른이 읽는 동시이다. 이렇게 차원이 다른 욕구와 만족감에서 선택은 우리들 가 해야 한다.

다음은 임태진 시조 시인의 <칼>이다

 

 

칼을 갈러 갔다가

칼의 뜻을 배웠다

 

칼갈이 오십 년에

칼 박사 되었다는

 

백발의

그녀 입담이

날카롭게 빛난다

 

젊을 땐 날을 세운

칼날로 살아가고

 

중년엔 날을 깎은

칼등으로 살아가고

 

노년엔

칼을 감싸는

칼집으로 살라는

 

읽는 순간 칼처럼 날카롭게 가슴에 파고들고 섬뜩하게 한다. 칼갈이 50년의 백발 여인은 신성한 종교의 신앙성 분위기마저 떠오르게 한다. 이색적인 직업, 칼갈이 달관 속에 계시와 같은 가르침은 날을 세웠던 칼을 "노년엔/ 칼을 감싸는/ 칼집으로 살라는" 한 마디가 따뜻하게 감싸 주고 있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시였다.

다음은 김영기 동시 시인의 특집기사 '동심은 나의 힘'에 대표 시 5편 중에 게재된 <아름다운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거짓말

 

수학 시험 100점 받고 기분이 좋은 날

할머니께 누굴 닮았나 물어봤지요.

"그야, 네 엄마 닮아 그러지!"

 

-아니지! 속으론 아빠일 텐데,

울 아빠는 수학 경시 1등 했잖아!

 

운동회 달리기 1등하고 신나는 날

칭찬하는 외할머니께 물어봤지요.

"그야, 네 아빠 닮아 그러지!"

 

-아니지! 속으론 엄마일 텐데,

울 엄마는 달리기 선수였잖아!

 

어린이들에게 나쁜 일 하지 말라, 거짓말 하지 말라면서 가르쳐 왔는데 '아름다운 거짓말'에는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이율배반적인 부조리가 옹이처럼 박힌 '아름다운 거짓말'을 읽으면서도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서로 자기 아들 자랑, 딸 자랑을 하지 않고 며느리와 사위를 자랑하니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심성이 아름답기만 하다. 그 사돈(할머니)에 그 사돈(외할머니)이다. 손자도 귀엽기만 하다. 할머니들의 말이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독백처럼 혼자서 중얼거리니 그 사돈에 그 사돈만이 아니고, 그 할머니들에 그 손자였다.

이번 제주문학 여름호에 두드러진 경향은 제주어 작품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제주어 시 작품을 게재하면 그 다음 페이지에 표준어로 다시 번역(?)하여 실렸었는데 그것이 없어졌다. 제주어 시 작품도 소개하고 싶었지만 표준어로 다시 그 옆에 게재하지 않으면 모든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 싣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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