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큰 별 세네갈](20)이영운, 따바스키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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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큰 별 세네갈](20)이영운, 따바스키 축제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7.2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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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운 선생님의 KOICA 해외교육 봉사활동 체험기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따바스키 축제

어제는 따바스키 축제(Tabasky Fete)였다. 따바스키는 이슬람의 중요한 축제 중의 하나로 이슬람력 12월 10일에 열리는 제물을 바치는 축제다. 다른 곳에서는 이드 알아드하(EID al-Adha)라고 한다.

따바스키는 이슬람 이전에 메카 근교에 있는 마나의 골짜기에서 있었던 제물봉공(祭物奉供)의 습관에서 나온 것이다. 아브라함이 알라의 명으로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다 알라의 제지로 대신 양을 바친 것으로 유래한다. 이 축제의 기원은 예언자 아브라함

청장댁에서 따바스키를 지내며 아들 딸과 함께
청장댁에서 따바스키를 지내며 아들 딸과 함께

(Ibraham)이 신의 계시를 받고 그의 아내(Hagal)와 그의 아들(Ismael)을 황무지였던 메카에 두고 팔레스타인으로 떠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홀로 남게 된 아내와 아들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힘들어 하다가 신에게 기도하게 되고 신은 황무지였던 메카를 오아시스로 만들어 준다.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아브라함은 살아있는 아내와 아들을 보고 감사의 의미로 돌 신전(Kaaba)을 세운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 최초로 이곳을 찾아온 이는 628년 모하메드와 1400여 그의 추종자들이었다. 이것이 최초의 이슬람 성지순례였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이 늦게 얻은 외아들 이사악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려 할 때 하느님께서 이를 말리시고 주변 가시덤불에 걸려있는 양을 제물로 바치라고 지시하신다. 둘 다 유사한 내용으로 아브라함의 신앙을 기념하는 축제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거의 한 달 전부터 전국의 양들은 도시를 점령하기 시작했다. 수도 다카의 모든 공터는 양들로 메꾸어져 있었다. 어제 아침 성당 가면서 보니 그 수 많은 양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다. 다 팔린 것이다. 3,40마리 정도 있었던 어느 장터는 6마리만 남아있었다. 조금 보잘 것 없고 바싹 마른 양들이었다. 성당에서 돌아올 때는 그나마 세 마리밖에 없었다.

이날 청장은 아침 9시에, 시라바 여직원은 토요일날, 그리고 Mamadou Diouf는 1시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며칠 전에 Kermet 시장에 가서 세 곳을 방문하는데 필요한 선물을 세 개 구입했다. 후라이 팬 비슷한 종류다. 그런데 시라바는 그 후에 특별한 연락이 없다. 아마 의례적으로 초청 인사를 한 것을 내가 곧이곧대로 해석했나 보다.

청장네 집은 9시 반쯤에 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일찍 오도록 요청한 것은 알고 보니 양(Mouton)을 제물로 바치는 순간을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청소하고 7시 30분 미사를 봤다. 거의 9시가 되어서 미사가 끝났으니 거의 뛰어서 허겁지겁 집으로 왔다. 옆집 유나 선생과 함께 택시로 도착했다.

유치원 선생님들과 함께

정부 임대 주택에 사는 국장은 한 마리스트에 산다. 택시비가 평소에 1000세파나 1500세파면 가는데 오늘은 2000세파다. 모두가 대목이다.

아파트 기둥엔 잘생긴 좀 큼직한 무통(양)이 하나 매어져 있다. 그의 앞에는 음식이 놓여 있고 배설물이 흩어져 있다. 양들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보인다. 배설물을 작은 환으로 만들어 배출하기 때문이다. 왜 그런 모양으로 배출하는지 궁금하다.

집에 가보니 청장은 없었다. 아들 모하메드와 함께 모스크에 기도하러 갔다고 했다. 그들이 오자 모든 가족들과 함께 아파트 작은 1층 광장으로 갔다. 여기저기서 죽은 양들을 해체하고 있었다. 청장을 포함한 장정 서너 명이 양을 넘어뜨려 누르고 숨통을 끊는다. 나에게는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그들은 여자들도 아무런 표정이 없고 해마다 치르는 통과의례여선지 구경하기에 바쁘다. 우선 껍질을 벗기고 다리를 자르고 내장을 분리하고 고기를 조각낸다.

거의 작업이 끝날 무렵 아이들 세 명을 거느린 아주머니가 머리에 빈 양동이를 이고 아이들은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아이들은 조금씩 고기를 구걸하고 받아온 것을 그 어머니는 양동이에 담는다. 양을 잡을 여건이 안 되는 집에서는 이렇게 여기저기서 얻어다, 축제를 지낸다고 한다.

나는 며칠 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이런 형태로 축제를 지내야 하나? 아주 옛날에는 제물로 동물을, 어떤 때는 산 사람까지도 바쳤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양들이 한꺼번에 엄청나게 도살된다는 것은 모든 집에서 한 마리씩 잡는다는 것은 좋지 않아 보였다. 그것을 필요한 만큼 푸줏간에서 사다 쓰면 되지 않을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옛날에야 설이나 명절에는 소나 돼지를 잡고 아니면 공동 추렴도 하면서 제를 준비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마트나 푸줏간을 이용한다.

유나 선생은 옆에서 어린 양을 잡는 것을 보고 거의 울음을 터트렸다. 또 이 장면들을 청장으로부터 사진에 담으라는 지시를 받은 그녀는 무척 곤혹스러운 모습이다. 나도 사진 몇 장을 담았다. 유나 선생은 교회일로 먼저 자리를 뜨고, 나는 2시 반까지 있었다.

따바스키를 위해 준비된 숫양들
따바스키를 위해 준비된 숫양들

1시가 지나자 우선 작은 음식이 나왔다. 빵과 약간의 구운 간과 약간의 양고기다. 이것이 아침 식사다. 아마 4, 5시가 되면 점심 식사가 늦은 저녁 거의 한밤중이 되어야 저녁 식사를 한다. 저녁을 하면 다시 그곳에서 잠을 자는 경우가 많다. 이 식사에 일본인 2명이 함께 참석했다. 남자는 냉동 시설 전문인 봉사자로 66세라고 한다. 이미 해외에서 3년간 근무경력이 있었다. 여자는 50대 후반으로 35년간 유치원에서 근무했고 퇴직 후에 시니어 봉사단원으로 온 것이고 우리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된단다.

이곳에 온지 열흘정도 되었다고 했다. 지난주에 일본에서 새로운 봉사단원(JIKA) 19명이 이곳에 왔고, 시니어 단원 4명, 일반 봉사단원이 15명이라고 한다. 4명이 남자이고 대부분이 여자라고 했다. 한국 코이카는 철수하기에 바쁜데 다른 나라에서는 계속 도착하고 있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다. 봉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면서 이루어져야 효과와 공감대와 우정을 지켜나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수원국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해서 도움을 쉽게 포기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노력도 헛되게 평가될 수도 있으므로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특히 정치가들은 섯부른 판단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두 명의 정치인인 애볼라의 위험성을 얘기하면서 코이카의 대처 방안을 빨리 대라고 얘기하고, 코이카에서는 조급히 판단하여 조기 귀국 등을 내세우면 그 사이 쌓아 온 성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일본을 확실히 배울만하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Mamadou Diouf네 집으로 갔다. 그는 59세이고 1년 후 60세에 퇴직한다. 집 안엔 자녀들, 손녀들, 친족들로 북적인다. 그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며 따뜻하고 친절하다. 그는 전에 오랫동안 초등학교 교장을 하다가 장학사로 근무해오고 있다. 그는 자녀가 열 명이다. 다섯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아직 5, 6세밖에 안 되는 아들도 있었다. 가족들이 너무 많으니 침실에서 혼자 식사하라며 별도 식탁을 마련해 주었다. 양고기, 주스, 쌀밥 등 푸짐하다. 음식들은 맛있고 정성이 들어 있었다. 그의 한 아들은 대학생인데 영어를 잘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아이들이 많은 것은 그가 두 명의 부인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부엌에서 일하던 좀 후줄그레한 부인과 조금 전에 들어 온 좀 세련돼 보이는 젊은 여자도 부인이라고 해서 한참 헷갈렸는데, 그녀는 아마 두 번째 부인인듯 싶다. 두 번째 부인은 초등학교 교사라고 하고, Fatic이라는 시골에 살고 있다고 한다.

모스크에 가서 기도할 시간이 되었다고 한다. 잠시 없는 동안에 머무르다 가라는 권유를 물리치고 나도 집을 나섰다. 서울의 남대문시장처럼 복잡하고 붐비던 산다가 시장도 오늘은 한가한 시골 장터 같다. 그러나 사람과 물건이 자취를 감춘 자리엔 온갖 쓰레기가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시커먼 폐비닐 봉투들이 윤무를 그리면서 춤추고 있고, 온 시장 바닥은 쓰레기 더미로 덮여있다.

어젯밤은 너무 더웠다. 아마 가장 더운 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생각한다. 그 수많은 양들이 그들은 이유도 모른 채 세상과 일시적으로 이별하면서 내뱉은 절규가 이 밤을 더욱 무덥고 숨막히게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2014년 10월 6일)

개천절 행사에서 교민 현지인과 함께
개천절 행사에서 교민 현지인과 함께

대사관의 개천절 행사

오늘은 대사관저에서 개천절 국경일 행사가 있었다. 원래 10월 3일이 개천절이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날을 전후해서 개최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많은 교민들과 외국 사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100여 명이 참석했다. 남자들은 정장, 여자들은 예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 중에는 이 서기관 사모님도 계셨고 사무소장 사모님도 있었다. 사모님은 내가 지난번 생일 선물로 준 내 수필집을 좀 읽은 것 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자기소개를 하자 책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대사관저 뒤뜰은 150평 정도의 넓은 잔디 광장에 바오밥, 야자수 등 다양한 나무와 잔디와 숲으로 이루어진 정원이다. 우선 한국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비디오 상영이 있었다. 이어서 대사님의 프랑스어 인사말과 정부를 대표하는 농업장관의 축사가 있었다.

샤베트 식당 주인, 식수 사업을 하는 동부건설 정 단장, 인쇄소를 설치하고 있는 폴리스텍 이영호 교수 등과 얘기를 나누었다. 이곳 부산식당에서 준비했다는 소고기 불고기, 김밥, 김치 등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음료수도 포도주, 맥주, 주스, 소다수 등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나 선생이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해서 함께 좀 빨리 귀가했다. 정종량 자문관이 지난번 한국 휴가 때 내가 부탁했던 컴퓨터 한국어 자판을 갖고 왔다. 내가 이곳에서 구입한 데스크 탑 컴퓨터는 영문 자판이어서 너무 불편했다. 어떤 단원들은 한글을 오려 붙여서 사용하기도 하는데 나는 한글을 외워서 사용해 왔었다. 이제 편리하게 컴퓨터 작업을 한글 자판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농업장관등이 참석한 야간에 대사관 뜰에서 개최된 개천절 행사
농업장관등이 참석한 야간에 대사관 뜰에서 개최된 개천절 행사

오래전에 내가 플로리다주립대학에 공부하러 갈 일이 있었다. 그 때 강정은 전 제주도교육감님이 나를 불러 함께 식사하면서 부탁했었다. 플로리다에 몸이 약한 딸이 살고 있는 데 갈 때 지어놓은 보약을 좀 전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해외에 갈 때는 소위 눈썹 하나만 얹는 부탁을 해도 큰 부담이 되는데 미안하다’며 힘들게 말을 건네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 선생님께 엄청 많은 눈썹을 부탁했었는데 한국에 갔다가 오늘 갖고 나와서 너무도 고마웠다.

(2014년 10월 16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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