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15)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 고등군법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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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사건과 제11연대장 고 박진경 대령](15)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 고등군법회의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08.2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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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학 제주4·3사건재정립시민연대 교육정립위원장

(15)조선국방경비대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 암살범 고등군법회의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제4회 공판으로, 8월 12일 상오 9시 반부터 남산 군기대사령부에서 고등군법회의가 열렸다.

문상길 중위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자 문상길 중위는 남로당제주도군사총책 사령관 김달삼과의 관계에 대하여 전후 2회에 걸쳐 만난 일은 있으나 암살 지령에 대하여는 이를 일언지하로 부인하였다.

문상길 중위는 검사 심문에 정연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4일)

“4월 3일 제주도 소요가 봉기된 이후 전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재임시와 박진경 대령 취임 후의 부대 내의 공기는 전반적으로 변하였다.

경찰의 폭도와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에 대하여 김익렬 중령 지휘 밑의 경비대는 도민을 선무하기에 노력하여 그들의 신뢰를 받았으나 박진경 중령 취임 후로는 경찰과 협력하여 소요 부대에 무조건 공격명령을 내렸으며 도민도 탄압하기 시작했으므로 도민들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경비대 내부 공기도 동요하였다.

나는 김익렬 중령의 동족상잔을 피하는 해결방침에 찬동하였으며 처음으로 김달삼을 만난 이유는 김익렬 중령과 회견시키기 위하여서였고 두 번째는 박진경 대령 취임 후였는데 그때 김달삼은 30만 도민을 위하여 박대령을 살해했으면 좋겠다고 하였을 뿐 절대 지령을 받지는 않았다고 주장하는 동시 심리조서에 서명 날인한 것은 전기고문 끝에 눈을 막은 후 조서에 대한 기록내용 여하를 모르고 강제적으로 무조건 날인한 것으로 이 법정에서 진술한 것이 진실이라고 굳게 그 조서 날인에 대하여 부인하였다.”

여기에서 김달삼은 ‘박진경 연대장을 살해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함으로써 ‘김달삼의 박진경 대령 암살 지령설’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 되었다.

문상길은 김달삼을 전후 2회에 만났다고 하지만 이미 둘은 사전에 잘 알고 있었던 사이였다. 문상길이 모슬포 제9연대의 소대장으로 근무 할 때 모슬포 주민들은 “문 소위, 문 소위” 하면서 애칭으로 불렀고 문상길은 말 타고 거닥거닥 와서 유유히 말을 메어놓고 김달삼의 집에 며칠 머무르다 가기도 했다. [제주4·3연구소. 4·3증언자료집Ⅰ 이제사 말햄수다.(제주 : 도서출판 한울, 1989), p.200.] 이때 김달삼 가족들은 김달삼의 큰 형 ‘이승만’이 대구에서 장사를 하고 있어 대구로 피신해 있었다고 한다.

4·3사건 발생 10여 일이 지나도 경찰이 진압하지 못하고 치안 상황이 더 어렵게 되자 미군정장관은 국방경비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린다. 이에 제5연대 소속 제2대대(오일균 소령 지휘)가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상사태를 지원하기 위하여 1948년 4월 19일 19시에 해상으로 진해를 출발하여 1948년 4월 20일에 제주도에 도착하게 된다.

이때 남로당 장교 프락치 문상길은 남로당 군사 총책 김달삼에게 긴급 연락하여 앞으로 제5연대 제2대대 남로당 인민유격대를 포위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시급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된다는 사항을 알리자 남로당 측에서는 군책 김달삼을 보내 문상길과 회합을 가져 남로당 인민유격대에게 최대한의 무기 공급, 제9연대 군인 탈영 추진[문창송. 한라산은 알고 있다.묻혀진 4·3의 진상. (제주 : 대림인쇄사, 1995), p. 78.] 등을 논의한 일도 있었다. 이 논의 사실도 이날 말하지 않았다.

5월 10일 제헌의원 선출 총선거일 날 남로당 비밀 아지트인 제주읍 모처에서 식사를 겸하면서 남로당제주도당 군사총책 김달삼, 조직책 김양근 2명과 국방경비대측에서 오일균 대대장 및 부관 나희필, 제9연대 정보주임 이윤락 소위 등 3명, 모두 5명이 비밀 회합에서 박진경 연대장을 숙청하기로 합의한 사실들도 모르쇠로 입을 다물었다.

1948년 8월 15일자 조선중앙일보를 보면 ‘4명에 총살형 / 박 대령 암살사건 언도’ 제하에

“박 대령 암살사건에 대한 고등군법재판이 드디어 14일 오전 11시 반 문상길 중위(23) 신상우(1등상사․20) 손선호(하사․22) 배경용(하사․19) 4명에 대하여 총살을 언도하고 또한 양회천(2등상사․25)에 무기, 강승규(1등중사․22)에 5개년 징역을 언도하였다.

제 4일째인 12일 피고 문 중위의 심리진술에 이어 동일 오후에는 직접 하수자 배경용 손선호에 대한 심문이 있었다. 피고 배는 조직 전후의 진상을 상세히 진술한 후 민족상잔을 감행한 박 대령의 암살은 당연하다고 말하였다. 또한 손선호는 태연자약하게 유창한 말로 암살 동기와 목격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작전에 비하여 볼 때 그의 작전에 대하여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빚어졌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에 대한 자세한 조사 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牛) 기타 가축을 난살(亂殺)하였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사람이 한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한편 이번 언도된 총살형은 통위부장을 거쳐 군정장관의 인준이 있은 후에 비로소 집행될 것으로 보인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15일)

제주4.3진상보고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제주4·3보고서)  219쪽에

“1948년 8월 15일자 조선중앙일보의 4명에 총살형 / 박대령 암살사건 언도의 제하 기사 중

‘……………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에 대한 자세한 조사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사격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牛) 기타 가축을 난살(亂殺)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 라고 되어있는데,

4·3진상보고서에는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에 대한 자세한 조사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라는 기사 내용을 누락시키어 마치 박진경 연대장의 무자비한 작전으로 제주도민들의 피해를 당했다는 것으로 박진경 대령을 비판하고 있다.

이 신문기사에서 손선호의 진술을 보면 화북마을을 갔을 때의 일과 5월 1일 오라리 마을 출동 시 보았던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체를 보았다는 것 등은 박진경 연대장이 제9연대장으로 취임하기 전의 일로 김익렬 연대장이 제9연대장으로 재직시 벌어진 일들이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이하 제주4·3보고서)  219쪽에도

한성일보 1948년 8월 18일 ‘총살형은 혹심(酷甚) / 요로에 감형진정서 / 박대령의 암살공판’ 제하의 기사 중

“제주도사건 진압 차 파견되었던 조선경비대 제11연대장 박대령 암살사건에 대한 고등군법회의는 지난 14일 회의에서 피고에 대한 사형언도가 내리었다.

기쁨에서 맞이한 4년 전의 8․15민족해방은 건설을 온 사회혼란과 흥분에만 넘치어 민심은 극도로 불안정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조직된 남조선 경찰은 인민의 안녕과 질서를 위하여 이에 뚜렷이 활동을 개시하였으나 사회의 혼란은 관공리에까지 미치어 곳에 따라서는 직분을 망각한 경관들이 있어 민주주의 사회에서만 존재하는 경민(警民)일체는 각 지방을 비롯하여 제주도에서 극심히 침식되었다.

자타가 공인하는바 일부 경관과 탐관오리의 비행에서 발단된 4월 3일의 제주도민 봉기는 나날이 확대되어 조선경비대의 출동에까지 이르렀으며 또한 금번의 고등군법회의를 소집하게 되었으니 애초의 사건 동기와 저간의 결과에 대하여 사회의 이목은 바야흐로 총집중되고 있으며 금번 민선 변호인이었던 김양(金養)씨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말하였다.

“언제든지 범죄에는 범행동기와 이유가 있는 것이다. 법에 의하여 범죄의 공정한 처단을 기할 목적으로 재판이 존재하는 것이며 결과를 초래한 동기와 원인이 중심되어 심리되는 것이다.

금번 암살사건 관계자의 범행동기가 사심사리(私心私利)에서 출발된 것이 아니라 민족정기에 살고 죽으라는 국방경비대 자체의 신조에서 나온 애족적 신념의 조치라는 것은 엄숙히 말하는 피고들의 진술에서 명백하다.

또한 증인인 박 대령의 참모인 임부택(林富澤) 대위의 진술을 보면 박 대령 취임 전 평화복구를 목적으로 선무하며 그들과 다정하여진 피고들은 ‘①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 ②양민 여부를 막론하고 도피하는 자에 대하여 3회 정지명령에 불응자는 총살하라’는 등 타국과의 전쟁을 연상케 한 박 대령의 명령에 피고들은 불응하였으며 민족적 거사로서 살해를 결행한 것이다.

과거 일본에서 대사건이었던 2․26, 5․15사건에 있어서도 가해 군인에 사형이라고는 없었다. 설마 애족 애국적 신념의 발로 결과가 사형으로 보상된다면 사람을 나무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떼어버리는 격이 된다. 이에 변호인으로서 동 사건의 감형을 다시 주장하며 또한 국방장관과 딘 군정장관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겠다”(한성일보. 1948년 8월 18일) 라고 되어 있는데도

제주4·3사건 진상보고서 219쪽에 “또한 증인인 박 대령의 참모인 임부택(林富澤) 대위의 진술을 보면 박대령 취임 전 평화복구를 목적으로 선무하며 그들과 다정하여진 피고들은”을 누락시키어

제주4·3보고서 219쪽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손선호의 주장은 박진경 연대장의 참모였던 임부택(林富澤) 대위의 증언과도 비슷하다. 임 대위는 재판정에서 ‘①조선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좋다 ②양민 여부를 막론하고 도피하는 자에 대하여 3회 정지명령에 불응자는 총살하라’는 박진경 연대장의 명령에 대해 진술했다.’ 라고 기술하여 마치 임부택 대위의 증언인 양 위장 보고서를 작성했다. 임부택 대위의 증언은 절대로 아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피고는 바로 카빈총으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위생병 출신 손선호(22세)이다.

임부택 대위는 1948년 6월 6일자 총사령부 특명 제72호에 의하여 제9연대장으로 보직을 받았으나 제11연대 작전참모 임무가 중대하여 박진경 연대장을 보좌하기 위해 제11연대 작전과장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신문사 제호

여기 박진경 대령 암살 재판을 좌파적 입장에서 상세히 보도한 조선중앙일보는 어떠한 신문인가 살펴보자. 중국 공산당과 김일성의 연합공작단의 총사령 격으로 서울에 잠입한 성시백은 남한에 남로당 이상 규모의 김일성지지 좌익정당을 결성하는 일에 분주하면서 만든 신문이 조선중앙일보이다.

당시 남북한 밀무역이 성행하던 때인지라 성시백은 해주에서 인천으로 오는 배편을 이용, 북조선과 만주에서 쓰던 조선은행권 뭉치를 고리짝과 카바이드 드럼통에 감춰 빈번히 남한에 반입하였다. 그 엄청난 돈으로 성시백은 사로당(사회로동당)계를 흡수하고, 신문을 잇따라 창간한다. [조선중앙일보]와 [우리신문] 및 [광명일보] 등인데, 이 밖에도 여러 신문에 자금을 지원하며 선전망과 정보망을 구축하였다.

성시백이 남한으로 들여온 조선은행권 화폐

성시백이 남한으로 들여온 조선은행권의 화폐는 1947년 12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법령 30호에 의거한 지주, 반공주의자들의 재산 몰수 구실로 실시한 화폐개혁으로 북한에서 사용 못하는 조선은행권의 화폐들이다.

조선중앙일보가 좌파적입장에서 박진경 암살 재판에 대한 기사들을 살펴보면

■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0일자

’문 중위 총살형 언도 / 각계에서 철회를 요망‘ 제하에

과반 발생한 제주도 국방경비대 박 대령 암살사건 군사재판은 14일 문상길 중위 외 3명에 대한 총살형 언도로 폐정되었는데 총살형은 너무나 가혹하다 하여 일반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거니와 이번 재판에 민간 변호인으로 종사하였던 김양(金養)변호사는 동 사건의 감형을 각계에 진정하는 한편 동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금번 암살사건 관계자의 범행동기가 추호의 사심사리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민족 정기에 살고 죽으려는 국방경비대 자체의 신조에서 우러나온 애족적 신념의 소치라는 것은 피를 토하는 듯한 피고들의 진술로 명백하다고, 도민의 생명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며 박 대령 암살이 애족적 신념의 발로라는 것을 천명하여 각계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터인데 19일 민주학련(民主學聯)에서 동 사건 언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당국의 언도철회를 주장하였다.

“조국의 예속화를 반대하고 궐기한 제주도 애국 인민에 대하여 학살을 강요하고 동족상잔을 감행한 박 대령의 반민족적 행동을 반대하고 민족과 조국을 사랑하며 수호한 문 중위 등의 애국적인 의거에 총살형을 언도하였다. 우리 전 애국 학생들은 전 인민들과 더불어 이를 한사코 반대하며 형의 언도를 무조건 철회할 것을 주장하는 바이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0일)”

■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8일자

’문 중위 등의 총살형 철회 요구 / 민애청과 법학자동맹 성명‘ 제하에

무고한 제주도 인민을 무자비하게 토벌하는 제주도 경비대 대장 박 대령 암살사건은 그 동기가 애국애족의 지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살해범 문상길 중위 등에 대한 총살언도는 너무나 민족정기에 거슬리는 처사라 하여 각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바, 27일 민애청 법학자 동맹 및 민애청 서울시위(市委) 등에서도 각각 성명을 발표하여 “박 대령은 그 생모가 왜녀이며 대동아 전쟁 당시 여성학병에 자원 참가하여 미영(美英)격멸에 위훈을 세운 알짜 친일파로 제주도에 파견되자 무고한 애국인민에 대하여 천인공노할 야수적 학살을 자행하였다.이러한 반역도인 박 대령을 정의의 총탄으로써 처단한 문 중위 등의 의거는 실로 민족정기의 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총살형 언도는 언어도단으로 즉시 총살형 언도 철회를 강경히 요구한다”고 말하였다.

박진경 대령의 생모인 평산 신씨를 왜녀로 표현하고 여성학병에 자원 참가한 알짜 친일파였다고 기사를 쓰고 있다.

■ 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31일

’문 중위 등의 총살형 철회하라 / 신진당서 담화‘ 제하에

저간 각계에서는 문 중위의 총살형 언도에 대하여 그 가혹함을

지적하여 철회를 요구하여 왔는데 30일 신진당(新進黨)(1946년 남한의 신한 민족당을 비롯한 여덟 개의 군소 정당이 결성한 정당. 좌우 합작 운동을 지지하였고 단독 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보수 세력의 주장에 반대하며 이후 남한의 단독 선거에도 반대하였다.에서는 “제주도 사건의 해결은 조선 전 민족 문제의 해결이다”라고 전제하고 “박 대령의 반민족적 처사를 중단시키려 한 동 중위 이하 제 병사에 대하여 총살형을 가함은 절대 규명치 않으면 아니될 것으로 즉시 철회하기를 강경히 주장한다”라는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31일)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문 중위 등 감형하라 / 기독교 민주동맹주장[좌익진영에서 속한 유일한 기독교단체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의장 중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 목사가 중심이 된 정당으로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앞장서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기독교민주동맹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차 평양에 간 후 목사 김창준은 평양에 남아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설에 참여하였다고 전해진다. 주장‘ ] 제하에

어제 31일 기민(基民)에서는 문 중위 총살언도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제주도사건을 무력으로 해결 지으려는 것은 천만부당하다”고 전제하고 “문 중위가 박 대령을 암살한 동기는 애국 순정에서 나온 민족정의 수호에 있으므로 사형언도는 부당하다”고 지적하는 동시 “그 감형을 요구한다”고 주장(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하였다.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문 중위 등 행위는 민족정기에서 / 사형 취소하라 / 재일조련(在日朝聯)서울위(委)서도 성명‘ 제하에

“조국의 통일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5․10선거를 반대하고 봉기한 제주도민의 위대한 애국성을 박 대령은 학살과 고문과 총검으로써 전 도민을 소탕하려 한 것이다. 이는 박 대령이 제2차 대전 중 강도(强盜) 일제에 자진 학병으로 나가 충성을 다하였던 자이며 해방 후는 그들의 새로운 주인에게 그 충성을 드리는데 전 도민의 무차별 학살로써 진충(盡忠)하였으며 그를 계속하려 하였다. 이에 분연하고 동족살상을 묵과할 수 없는 민족정기에서 문 중위 등 제씨는 박 대령을 살해한 것이다. 이런 애국애족열에 불타는 의거를 불구하고 사형판결이라는 그 부당성을 재일 60만을 대표하여 지적하고 즉시 취소할 것을 강경히 요구하는 바이다.”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3일

’문중위등 총살형 즉시 철회하라 / 민중동맹 담화‘ 제하에

2일 민중동맹(民衆同盟)[1946년 12월 22일 김규식(金奎植)을 영도자로 민생문제 해결을 표방하면서 조직된 정당]에서는 문 중위 총살형 판결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 “박 대령을 살해한 문 중위 등의 범행은 그것이 피끓는 정의감과 뜨거운 동족애의 발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일반의 살인과 그 궤를 동일시할 수 없다”고 전제하고 “이것이 범죄로 구성된다는 데는 이론이 없으나 그의 벌을 생명형으로써 한다는 것은 지나친 판결이라고 단정치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총살형 언도를 철회하기를 간곡히 요청한다”고 주장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3일)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3일

‘사형은 부당 / 근대당(勤大黨)(미군정기에 존재했던 중도좌파 계열의 정당 ) 학병거부자연맹서도 성명’ 제하에

근로대중당과 학병거부자연맹에서도 1일 담화를 발표하여 문중위 총살형의 부당성을 강조하고 그 언도 철회를 요청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3일)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4일

’제주 토벌 중지하고 문 중위 등 사형 철회하라 / 민전 인공 청우 담화‘ 제하에

3일 민전과 인공당 천도교청우당(광복 후 1945년 9월 서울에서 김병제(金秉濟)를 당수로 남조선천도교청우당이 조직됨)에서는 각각 제주도 사태 및 문 중위 총살형 언도에 대하여 담화를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금번 제주도에 대한 경찰과 경비대의 지속적인 대량 파견은 제주도 형제들과의 상잔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으므로 이것을 그대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제주도 동포에 대한 토벌을 즉시 중지하고 애국의 열의에서 나온 문 중위의 총살형은 철회하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전 역량을 집결하여 외군 철퇴 조국통일의 민족 과업 완수에 총진군할 것을 호소(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4일)하였다.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7일

’문 중위 등 사형 반대 / 교협(敎協)서 담화‘ 제하에

조선교육자협회(이 단체는 좌익정치운동세력이었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입하고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에 반대했다. 미군정에서는 ‘조선교육자협회’를 좌익정치세력으로 규정하고, 관련 교사를 검거하여 협회를 불법화했다)에서는 6일 문 중위 등에 대한 사형에 반대함과 동시 그들의 구명을 인민과 당국자에게 열렬히 호소한다는 담화를 발표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7일)

김달삼 등 남조선 인민대표자들이 참석한 1948년 8월 해주 인민대표자회의.

■ 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문 중위 사형 반대 삐라!‘ 제하에

지난 30일 하오 5시경 시내 화신 5층으로부터 돌연 수많은 삐라가 가두에 살포되었는데 삐라의 내용은 문 중위에 대한 사형집행을 철회하라는 것이었다 한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9월 1일)

더욱이 1948년 8월 25일자 조선중앙일보 내용을 보면

‘인민대표 대회 제2일 김달삼(金達三)씨 등단하자 박수우뢰’ 제하에

【공동통신】(전략) 제주도 대표 김달삼씨가 등단하자 제주도 인민투쟁의 총지휘자 김달삼을 환영하는 우레 같은 박수소리로 장내가 떠나갈 듯하며 회장의 인사들은 오래 계속되는 박수에 ××에××의 경의를 표하였다. 김달삼씨는 제주도 인민 항쟁과 이번 선거 투쟁 무장 봉기대와 인민들의 투쟁에 대한 피를 뿜는 듯 자세한 보고 마디마디에 찬양과 □□의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이로써 오후 7시 제2일의 대회는 전부 종료하고 각 대표는 최승희(崔承喜)무용단의 무용을 관람하였다.(조선중앙일보 1948년 8월 25일)

1948년 8월 21일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한 김달삼의 연설 내용을 보도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김달삼은 우선 박헌영에 대한 지지를 밝힌 후 무장봉기의 발발 원인과 관련,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선거 실시에 따른 분노가 폭발해 벌어진 자연 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했다. 김달삼은 이어 5‧10 총선거를 보이코트 한 무장대의 ‘전과’ 등을 길게 설명한 후, “민주조선 완전 자주 독립 만세! 우리 조국의 해방군인 위대한 소련군과 그의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치며 연설을 마쳤다[현길언. 본질과 현상.(경기도파주: 본질과 현상사, 1995), pp.111~120.]. 고 전한다.

이것으로 보면 조선중앙일보 창간 의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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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악전투 2023-08-27 20:09:48
제주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은 남로당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고 반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