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01) 제주문학 가을호(제9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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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 (101) 제주문학 가을호(제96집)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3.10.0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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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제주문학 가을호(제96집)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지금까지 수필은 길어서 지면 관계상 소개를 못했지만 이번에 고연숙 수필가의 <울림 줍다> 전문을 소개한다. 짤막하면서도 수필의 진수가 응축되었기 때문이다.

울림 줍다

'기후변화와 환경 행사장이다. 제주문인협회에서는 미세먼지 잡는 공기 정화 사진을 식물들을 무료 나눔하고 있다. 워터코인, 홍콩야자. 남도자리, 해피트리, 용설란, 안시리움, 극락조, 필레아, 비비추, 세이지, 다육이...

저쪽 부스에서 환경오염실태 설치품을 후딱 둘러본 사람들이 이쪽 부스로 우르르 몰려온다. 대부분 동문시장에서 둘러보러 나온 육지 관광객들이다. 그들은 기다란 탁자 위에 놓인 반려 식물 앞에서 좋은 놈을 고르기 바쁘다. 몸싸움까지 벌여가며 고르느라 밑으로 떨어져 구르는 화분도 있다. 젯밥에 눈이 멀어 열심히 고르다만 재들이 비행기에서 온전히 견딜 수 있으려나.

북적대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젊은이 몇과 아이들 서넛만 남아 있다. 그들은 색연필로 반려 식물에게 주는 짤막한 글을 쓰는 중이다. 지팡이를 짚은 꼬부랑 할머니가 구석에 앉아 유심히 살피고 있다. 헐렁한 몸빼 차림이고 짊어진 배낭이 무거워 보인다.

"할머니 등짐 부리고 쉬세요."

"놀 고사리라 부려놓으면 의자가 젖엉 안되주..."

할머니는 육개장을 좋아하는 아픈 아들 생각에 날마다 고사리를 꺾으러 다닌다고 한다. 사 이참에 사람들이 뜸해졌다. 이참에 사람들 발에 밟혀 뭉개진 다육이나 쓸어 담아야겠다. 한둘이라도 살려볼까 했지만, 상처가 깊어 그냥 버리기로 한다. 쓰레기통에 남몰래 막 집어넣으려는데 지팡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것들 제가 가정 가고 싶은디 주시쿠가?"

"저쪽에 멀쩡한 거 많으니 거기서 골라 가지셔요."

"...... 집도 절도 없는 자이넬 데려강 살리고판예."

멍해져서 한참이나 가만히 있었다. '데엥~' 하고 멀리서 성당 종소리가 울려오는 것 같았다. 잔잔한 파동이 느껴지는 울림이다. 어떤 번드르르한 말보다 진실로 크게 다가온다.

오늘 주웠다. 잔잔하지만 커다란 울림을.

이상이 전문이다. 필자는 식물 음치여서 공기 정화 식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데 많은 종류가 있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모아서 무료 나눔 행사를 한 사실에도 놀랐다. 그 놀람을 몇 배로 가증시킨 할머니의 모습에 가슴 뭉클했다. 비행기 속에서 그야말로 재가 되어버릴 것 같은 정화 식물을 탐한 관광객들이 모습과, 한순간에 일어난 할머니의 행동은 우리들의 본질적인 삶의 의미를 재조명하게 했다.

다음은 시를 소개한다. 강상돈 시인의 <올레에서>이다.

 

올레에서

S자로 앉은 올레 끝에 집 한 채 남겨두고

아이들 웃음소리 종일토록 들리던

추억의 그 갈피마다 정이 드는 봉성마을

 

함께했던 시간들이 예 와서 쉬고 싶다

선잠마저 달아나는 시간의 공간에서

귀엣말 살짝 전하던 잊혀져 간 내 뒷모습

 

고향집 올레길은 언제나 무채색인데

저녁 밥 짓는 냄새 구수하게 퍼질 무렵

백년된 먹구슬나무 옛집을 쳐다본다

 

올레, 먹구슬나무들의 등장은 과거를 돌아보는데 빠질 수 없는 원풍경의 출발이고 종점이기도 하다. 그 회상의 여정에서 어떠한 일들이 전개되는지 모두가 대동소이한 흐름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리워한다.

다음은 김윤숙 시인의 <오래된 정지>이다.

 

오래된 정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을린 천장 능구렁이

흙벽을 타 내리며 아궁이 솥단지로

서늘히 돋은 소름도 잠시 할머니 흩뿌리는 소금

 

조왕신 모시는 그런 날엔 눈빛으로만

궂은 모두 일 쓸어 되돌아 올 일 없이

다 삭아 엮은 새 지붕, 고이 가시라는

 

시대가 달라져도 아주 달라져서 지금 부엌에 능구렁이가 나타났다면 경찰이나 소방차를 불러서 일대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어떠한 놀람도 없이 의젓한 할머니의 모습은 연륜이 쌓은 생활의 지혜이다. 제주문학 특집 1의 '제주문화 톺아보기'에서 발췌한 시 두 편인데, 잊혀 가는 제주 풍물을 조감하고 있다.

다은은 강방영 시인의 <우리들의 관계>이다.

 

우리들의 관계

 

관계는 무엇일까 당신들과 나

컴퓨터 모니터의 바탕 화면에 놓인 문서함 하나

이제까지 없던 새로운 영역의 문서함

밤과 낮이 저장되고 새 노래가 담겨 저장되는 파일

 

언제든 삭제되어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 있는

영영 복구될 수 없는 문서함일지도

 

아직은

활발하게 작성 중인

 

모든 것을 믿고 맡겼던 현대판 곳간 컴퓨터 속의 보배가 한순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 상실감과 허탈감을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축적된 무지나 실수에서 오는 재앙이 아니고 한순간에 온다는 사실이다. 신뢰 관계의 부조리가 진행중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오늘도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다음은 양민숙 시인의 <빛에 대한 짧은 기억 2>이다.

 

빛에 대한 짧은 기억 2

 

가로등 하나 의지한 늦은 밤 공터

유영하는 그림자 트럭 적재함에 머문다

옆 집 강씨와 그림자

등 기대고 앉아 캔맥주와 컵라면으로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

빛이 빛을 부른다

강씨 주변으로 몰려드는 밤벌레들 날개를 반짝인다

트럭 바퀴만큼의 높이 낯설고도 생경한 무대

단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한 푸념 섞인 연극

빛이 점점 더 넓게 퍼진다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는 강씨의 만찬은

가로등 아래 세워둔 트럭 적재함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제 명의로 구입한 트럭은

딸에게 월세 단칸방을 내 준 후

일터가 되었다가 방이 되었다가 식탁이 되었다

소리가 되었다가 기억이 되었다가 기운이 되었다

강씨의 레퍼토리는 매번 달랐다

후루룩 들이키는 강씨의 고단함을 들어주고 나니

내 무게는 어느새 빛에 휘발되었다

 

빛은 밤벌레의 움직임처럼 고정되지 않았다

나에게로 온다

 

일상 생활을 훌훌 벗어나서 제대로 설비된 여행길의 '캠핑카'는 아니지만, 그러한 한 때라면 즐거웠을 것이다. 월세 단칸방을 사랑하는 딸에게 내주고 트럭 적재함에서 보내는 아버지의 모습은 슬픔의 아픔보다 어떤 애수를 자아내게 한다. 주인을 따라서 떨어질 줄 모르는 어린 강아지처럼 그림자가 더 없는 동행인이 아니고 동거인이 되어 위로가 된다. 소재의 독특한 신선미가 눈길을 끌고 있다.

다음은 양전형 시인의 <쇠별꽃>이다.

 

쇠별꽃

 

어제 잠 속 별밭에서

주머니 가득 별을 숨겼는데

 

이즈음 시들어가는 내 얼굴을

가만가만 보던 쇠별꽃

내 주머니 속 별들을

언제 훔쳐 갔는지

 

아침 햇살 마주 보며

마당 구석에 초롱초롱 떠 있네

별밭의 꿈속에서 주머니에 넣은 별들이 잠에서 깨어나니 없어져 버렸다. 허전하기 짝이 없다. 방문을 열고 보니 마당 구석에 초롱초롱 피어 있는 쇠별꽃이 많은 위안이 되었다. 퍼즐 맞추기처럼 복잡하게 머리 굴리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어른의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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