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길서 만나는 제주 4·3의 진실 (2) 관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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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길서 만나는 제주 4·3의 진실 (2) 관덕정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1.15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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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학 제주 4·3사건 재정립 시민연대 교육정립 위원장
- "이덕구 시신 전시됐던 관덕정 광장, 제주역사의 중심지 "

▣ 무근성의 관덕정 광장

성안길 무근성내 위치한 관덕정은 제주역사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제주목관아의 부속 건물로, 조선 세종 때 처음 세워져 재건과 보수를 반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성안길(제주시 원도심(구도심)지역은 견공한 성으로 둘러싸여 있어 예로부터 ‘성안’으로 불렸다. ‘성(城)의 안쪽’이란 뜻이며, 원도심 일대를 부르는 순수 옛 명칭이다.) 무근성은 탐라시대의 성(묵은 성)이 있었던 마을로, 조선시대 제주성을 넓힐 때 만들어진 동네 성안과 대비해 이처럼 불리웠다고 전해진다.

관덕정 앞 광장은 제주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자 투쟁의 장소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천주교도들의 무리한 행패를 견디다 못한 군중이 들고 일어선 1901년 이재수의 난(辛丑敎亂) 때 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맞이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으며, 제주4·3사건 때 남로당 제주도당 반란군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체가 전시된 곳도 또한 여기이다. 

이래 저래 무근성의 관덕정 광장은 제주 역사의 중심지였다.

▣ 이덕구는 누구인가?

1920년 북제주 조천면 신촌리에서 부유한 지방 유지인 아버지 이근훈과 어머니 김삼동 사이에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덕구는 형(큰형 이호구는 오사카에서 장사를 하다 해방 뒤 귀국하여 고향에 신촌국민학교를 설립. 둘째형 이좌구는 오사카에서 형제상회 운영하다가 귀향하여 남로당제주도당 총무부장을 함.)들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미오키모리국민학교와 히가시오사카시에 있던 일신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교토의 리츠메이칸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으나 4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 학병으로 징집되어, 만주 관동군 소위(회천동에 있는 이덕구의 가족묘지 비에는 계급이 대위로 적혀있음)로 복무하다 해방이 되자 잠시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제주로 귀향하여 조천면 좌익 조선민주 청년애국동맹 책임자로 있었다.

일본 일신상업학교 재학중인 이덕구

1946년 3월 조천중학원에서 1947년 3월 총파업 이전까지 역사와 체육 담당교사로 재직하기도 했으며,

1947년 여름 조천중학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한동안 조천면 신촌리 사돈집에서 숨어지내던 이덕구는 남로당 폭동지령 대책회의 도중 피검되기도 했으나 풀려난 뒤,

1948년 한라산에 들어가 남로당제주도당 인민유격대 제주읍·조천면·구좌면 중심으로 한 3·1지대장을 맡았다.

1948년 7월~8일 사이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초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이덕구에게 모든 직책을 맡기고 제주도를 빠져나가자, 이덕구는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장, 2대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책을 맡았다.

1948년 10월 24일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다.

1949년 1월 관음사 배치된 제2연대를 기습했으나 크게 패배했으며, 1949년 1월과 3월 의귀리 전투와 녹하악 전투에서 패퇴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1949년 6월 7일 오후 4시 견월악 부근 623고지에서 화북지서 경찰 합동 체포조에 사살되었다.

이덕구의 시신은 관덕정 앞과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에서 전시되었다.

1949년 1월 8일 수상 김일성, 부수상 박헌영이 임석한 훈장 수여식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기 훈장 3급이 서훈되었다.

1990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이덕구의 형 이좌구의 아들 등 9명이 참석,조국통일신보, 1990. 12. 15) 수여, 묘소는 평양시 형제산 구역 신미동에 위치한 애국열사릉에 김달삼과 같이 가묘로 조성되어 남조선 혁명가의 비가 세워졌다고 전해진다.

▣ 남로당 제주도당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 이덕구의 사살 비화

이덕구의 사살은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에 유재흥 대령, 참모장에 함병선 대령.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참모장을 겸함. 제주도지구전투부대 병력은 제2연대의 3개대대와 제6여단 유격대대 등 4개대대로 구성됨)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시기 문창송 경위( 화북지서 주임)는 지속적인 귀순공작을 펼치면서 당시 홍순봉(1948년 10월 6일 제주도경찰청장 부임) 제주도경찰국장에게 ‘이덕구를 체포하고 말겠다’ 고 큰 소리로 보고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덕구 체포를 자신있게 말하고 있는 것은 화북지서에서 귀순한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생명을 보장, 귀순 공작이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화북마을에 소개한 사람들은 아라리, 도련리, 회천리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피자 즉 입산자 가족이 많아서 화북지서에서는 젊은 여자 둘을 불러다 놓았다. 오빠가 산으로 올라간 사람, 남편이 산으로 간 사람이었다. 산에 올라간 사람들을 하산시키기 위해서 지서주임이 이들에게 양민증에 통행증을 발급한 후 일주일간 먹을 식량도 주고해서 산으로 올려보내면서 입산자들과 그 가족에게도 양민증을 내주고, 귀순하면 ‘죽이지 않는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화북지서로 내려오라. 화북지서로 내려오면 절대 생명을 내가 보장해 준다. 그 대신 내려올 때는 하얀 깃발을 들고 밤중에 내려오라. 그리고 정정당당히 화북 마을성 정문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우리가 보장해준다.”

그 사람들이 보름이 지나서 한 달이 되어도 소식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차 조천면 교래리에 주둔 중인 제2연대 소속 부대에서 전화로 연락이 왔다.

“화북지서에서 젊은 여자를 귀순공작대로 보낸 일이 있느냐?” 하니, 화북지서에서는 귀순공작으로 올려보냈다고 답을 하니, “왜 남의 작전구역에 들어와서 작전을 방해하느냐? 당신 지서주임은 총살형이야!” 라고 협박을 한다.

“그게 무슨 총살감이냐! 당신네 2연대가 사태 수습하는 것과 화북지서에서 사태 수습하는게 각 나름대로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소리냐? 그 젊은 여자들 다치게 하지 말고 당장 화북지서로 보내길 바란다.”

제2연대 교래리 주둔 부대에서는 귀순공작대 젊은 여자들을 취사병으로 쓴다고 했다.

화북지서에서는 “그게 말이 되느냐. 빨리 보내라!” 했다.

그 귀순 공작 자체가 화북지서에서 한 것으로 상부에 보고 안된 상태이었다. 화북지서주임이 경찰서에 가서 공작차원이라고 자초지종으로 설명을 하니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한 보름뒤에 그 사람들을 내 보내주었다.

그 다음에 하얀기를 든 젊은이들이 화북지서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보고 활용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우선 보았다. 활용가치가 없는 입산자들은 읍내 건입리 동척회사의 수용소로 보냈고 특히 활용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발을 하지 말라고 했다. 이 사람들을 다시 귀순공작대로 산으로 올려보냈다.

증명서를 발급하여 산으로 올려보내어 당신네 지휘했던 사람들을 데리고 내려오라고 하니, 그 중에는 남로당 인민유격대 분대장도 있었고 중대장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또 다시 산으로 올려 보냈다.

첫 번째의 성공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의 소대장이었던 허○○, 고00(제주환경일보, 2017. 06. 29.) 등 2명이 귀순하고 이들은 ‘연대장을 체포토록 하겠다’며 문창송 경위와 약속을 굳게 했다. 며칠 뒤 이들은 드디어 남로당인민유격대 연대장 도련동 출신 고00(오성찬, 『한라산의 통곡 소리(4·3제주대학살의 증언)』,서울 : 소나무, 1988, p.137.)을 유인, 화북지서 근무 경찰들이 그를 생포했다.

문창송 경위는 일반 귀순 남로당 인민유격대원들이 귀순하면 그대로 귀가토록 했다가 이튿날 그 산사람 복장 그대로 화북지서로 오도록 했으나 연대장 고00은 거물 남로당 반란군이어서 화북지서 유치장에 일단 보호 조치하였다.(제주자유수호협의회, 『제주도의 4월 3일은?』, 제주:도서출판, 2012, p.210.)

이튿날 연대장 고00의 모친과 딸을 면회토록 조치했다. 고00은 깜짝 놀라 울부짖으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처는 데리고 다니다가 정부군인의 진압 토벌 작전중에 이미 죽었고, 해변마을로 내려온 자신의 모친과 딸은 틀림없이 죽은 걸로 알았는데 살아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기 때문에 감격했으리라 본다. 경찰에 의해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모친과 딸을 보고서는 여러 가지의 생각과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하루를 아무 말 없이 깊이 생각을 하던 연대장 고00은 문창송 주임을 찾고는 막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를 인정해 주면 ‘이덕구 폭도 사령관을 잡아오겠습니다.’ 라며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혈서를 썼다.

고00과 고00에게 각각 1주일분씩 양식을 싸서 공작차 산으로 보냈다. 꼭 1주일만에 그들은 내려왔다. 6월 장마철이었는지 그날 밤엔 비가 많이 내렸다. 마음속으로 애를 쓰며 속을 태우고 있는 찰나 봉개마을 견월악 부근에서 이덕구를 보았다는 희소식을 알려 주었다. 문창송 주임에게 고점신이 ‘이덕구 반란군 사령관의 위치’를 알았으니 이덕구를 체포하는 행동을 개시하는데 밤중에 가야한다는 의견을 내 놓기도 했다.

서북청년단 출신 김영주 경사와 모두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대원 5명, 젊은 민보단원(향보단 : 1948년 5·10 총선거 때 조직되어 남로당의 조직적인 반대 투쟁에 대비하여 1950년 봄까지, 경찰의 하부·지원조직으로 활동한 단체이다. 55세 이하 청장년으로 조직된 경찰 보조 단체로 5·10 총선거 직후인 5월 22일자로 해산되었다. 그 후 민보단이 조직되었다.) 5명 해서 10명에게 그날 밤 출동 명령을 내렸다.

이덕구 체포 특공대원들은 이덕구가 은신하고 있는 장소인 견월악 부근 용강리 북받친밭까지 무사히 갔다. 암호는 ‘조국과 통일’이었다. 한쪽이 ‘조국’하면 ‘통일’로 응답해야 하는 것으로 통과 는 무사히 하고 이덕구를 생포할 상황까지 이르렀다.

견월악 부근 용강지경 북받친밭.
견월악 부근 용강지경 북받친밭.

암호 통과 후 경찰 쪽 사람들이란 것이 탄로가 나자 산속의 남로당 잔비 인민유격대가 사격을 하자 경찰쪽에서도 응사를 하여 교전이 벌어졌다. 이덕구는 포위되어 격전 중 남로당 잔비 반란군 4~5명은 급히 도주하였다. 일설에는 1949년 6월 7일 새벽 3시, 제주도를 탈출해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과 합류할 계획으로 하산하다가 경찰에게 포위되었는데, 경찰에서는 자수를 권했으나 경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고, 이에경찰도 집중 사격을 해 그의 몸은 벌집같이 돼 있었다는 말도 있다. 이덕구는 부상을 입고 남아 있었다. 이덕구를 집중 사격하여 사살하였다.

6월 7일 16:00쯤 속칭 작은 가오리오름 부근 정글 623고지에서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전령(호위병) 양생돌(22세. 제주지방검찰청 수형인명부 11-84은 1949년 7월 1일 무기로 판결받아 마포형무소에 수감 생활을 하다가 6․25 한국전쟁 때 북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장악함에 따라 출옥하였다. 마포형무소의 탈옥수 명부에 출옥자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마포형무소에는 500여명이 수감되었는데 이들은 타의적으로 북한의 의용군에 편입된 것으로 보아진다.)을 생포하였다.

화북지서에 귀순한 남로당 인민유격대원이었던 제주읍 용강리 출신 고00에 의해 군화를 신고 위아래가 붙은 일본군 비행사 복장에 숟가락 1개 꽂은 이덕구의 시체를 확인하였다. 이때 화북지서 문창송 주임은 이튿날 밤 1시가 되어도 이덕구의 체포·사살 부대에서 연락이 없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중 이덕구 시신의 손발을 칡으로 묶고 나무에 꿰어 소 달구지에 싣고 서북청년단가의 노래와 왈강 달강하는 소 달구지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화북지서 정문까지 들려왔다. 이때 이덕구의 호위병 양생돌을 생포하는 과정에 45구경 권총 1정과 탄알 수발을 노획하면서 문창송 경위(제주경찰서 화북지서 주임)는 이 호위병으로부터 제주4․3사건 진실을 밝히는 귀중한 문서(이 문서는 유일하게 고 문창송씨만이 필사본으로 보관, 관리해오다가 1995년 8월 『한라산은 알고 있다』 책자를 통해 전문을 발표하였다) ‘제주도인민유격대 투쟁 보고서’를 압수하였다.

문창송 펴저,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 표지

이 노획문서 원본은 제주경찰국에게 제출했으며 이 원본을 근거로 경찰청에서 필경사를 동원하여 가리반으로 필사하여 각 과장들에게 1권씩 배부를 했으며 원본은 지금 어디 갔는지 모르고, 필사본 마저 낡아 떨어져 전 화북지서 주임 문창송 사후에 가족들에 의해 국가기록원에 기증했다는 말이 전해져 온다.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1949년 6월 8일 이덕구의 목을 베지 않고 제주시 관덕정 광장 앞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 서쪽 돌하르방 옆에 십자형 틀에 묶인 이덕구 시신을 걸쳐 세워 반란군의 말로를 주민들이 볼 수 있도록 전시하였다(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주4·3사건 토벌작전사』, 2002,p.214.).

이 작업에 동원된 사람들은 남로당 인민유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경찰에 생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이덕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며칠 뒤 동료 2명과 함께 불려나가 이덕구의 시신을 관덕정 앞과 경찰서 앞에 십자형 나무틀에 매달고 내리는 일을 명령(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➁』, 서울 : 한겨레신문사, 1992, p.97.)받았다고 전해진다.

전시된 이덕구의 시신 복장은 때 묻은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윗도리 주머니에는 놋 수저 1개가 덜렁 꽂혀 있었다.

입가에 피를 흘리고 헝클어진 머리에 둥근 형의 얽은 얼굴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덕구 시신을 전시할 당시 국민학교 2학년이었던 전 제주실업전문대학 교수 홍석표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덕구의 복장은 위아래가 붙은 일본군 조종사 복장이고 신발은 신지 않아 맨발이었고 조종사 복장 왼쪽에 놋수저가 한 개 꽂혀 있는 걸 보았다”고 증언을 했다.

경찰은 이덕구의 사체를 나무 십자가에 묶어 하룻동안 제주경찰서 정문 앞에 전시했다가 화장 처리했다. 이덕구의 외조카로서 당시 사체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경찰의 요구를 받고 외삼촌의 주검을 확인했다는 강실(康實)(강실의 어머니는 이덕구의 누나이다)은 이렇게 증언했다.

“시신은 관자놀이에 총알 1발 맞은 것 외에는 깨끗했습니다. 시신은 하루동안만 전시됐습니다. 장마철에 아침부터 매달아 놓으니 저녁 때쯤 되니 냄새가 많이 났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남수각에서 시신을 화장한 후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뼈라도 수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비가 많이 와서 다 쓸어가 버리는 바람에 수습하지 못했습니다.”(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제주4·3사건진상보고서』, 서울 : 도서출판 선인, 2003, p.334.)

이덕구의 시체는 이틀 정도 전시하다가 부패하여 남수각 상류지점에서 화장을 했으나 6월 장마비로 불어난 냇물에 휩쓸려가버려 유골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덕구 사살에 김영주 경사(서북청년단 경찰 ‘200명 부대’ 대원)는 1계급 특진, 경위로 승진하여 문창송 주임 후임으로 화북지서 주임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휘한 문창송 경위는 승진을 못했다고 전해지며 도경찰국의 공안과장 서리로 서무주임을 맡았다.

▣ 이덕구 사살 신문 보도

6월 9일 국방부 보도과는 이덕구의 사살 사실을 발표했고 국방부의 발표에 따라 6월 10일자 자유신문은 ‘제주반도사령총살’ 제하에

“제주도사태 : 제주도사태는 제2연대장 함병선 중령이하 장병의 개선이 보인바와 같이 완전히 소탕되어 도민은 일로 재건의욕에 불타고 있다. 산중의 잔도는 불과 45명으로 추산되며 제주도 공산군총사령 이덕구도 드디어 악운이라 하였는지 지난 7일 16시 국군의 맹공을 받아 623고지에서 사살되었다. 더욱이 이덕구의 복심 연락병 2명도 체포되었고 2명의 귀순자도 있어 이로서 제주공비잔도는 완전히 궤멸되었다.”(1949. 6. 10. 자유신문) 라고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6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이덕구 반도사령 사살로 제주 소탕전 완전종식(국방부서 전과발표)”란 제하에 “제주사태는 제2연대의 맹활약으로 말미암아 소기 이상의 성과를 거두어 도민은 일로 평화 건설에 총진군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아직 45명의 잔도가 산중에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탐지한 소재 국군은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7일 하오 4시경, 623고지에서 제주도 공산군 총사령 이덕구(李德九)를 사살하는 동시에 이(李) 사령의 연락병 2명을 체포하고 2명의 귀순자가 있었는데, 이것으로서 제주도의 소탕전은 완전히 종식을 지은 셈이라고 한다.”( 1949. 6. 10. 동아일보) 보도하고 있다.

이들 신문에서는 국군에 의하여 이덕구가 사살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으나, 그는 군에 의해서 사살된 것이 아니고 제주도경찰에 이하여 사살되었다.

6월 10일자 수산경제신문은 “ 제주반도사령사살” 주제로

“【제주9일발합동】제주도반도사령관 이덕구는 지난 7일 경찰부대에게 사살되었다.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지난 7일 오후 4시경 속칭 작은가오리 부근「장글」속에서 반도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복심 부하 1명을 생금하였다는데 동시체는 방금 제주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다”(1949. 6. 10. 수산경제신문) 보도하고,

6월 11일자 동광신문 기사에는 “【제주발 합동】제주도 반도사령관 이덕구(李德九)는 지난 7일 경찰부대에게 사살되었다. 즉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金英柱) 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지난 7일 오후 4시경 속칭 작은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반도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 1명을 포로하였다 하는데 동시 이덕구 사체는 방금 제주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다”(1949. 6. 10. 동광신문) 라고 보도하고 있다.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 정보 보고서에는 이덕구 사살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한국군 사령부는 6월 10일 제주도의 무장 반도사령관 이덕구를 6월 7일 제2연대의 작전중 사살했다고 발표했다”(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9년 6월 15일.)고 했고,

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 주간 활동요약에는 “(제주도)6월 4일~6월 10일 사이 한차례의 작전이 있었음. 주요 공산주의 지도자 이덕구와 그의 부사령관을 포함하여 게릴라 8명이 사살되었다”( 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Weekly Activities, 1949년 6월 14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미국 자료편을 보면 반란군 사령관 이덕구를 경찰이 사살했는데도 보병 제2연대가 사살한 것으로 발표된 것은 제2연대가 제주경찰의 작전을 통제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아진다.

▣ 좌파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기록

제주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부장이했던 김봉현과 제주4·3사건 당시 이덕구 조천중학원 제자이며 소년 빨치산 출신 김민주가 펴낸 소위 『제주도민들의 《4·3》무장투쟁사』에는 이덕구 사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년 6월 7일에는 군당부 보급부 간부의 파렴치한 투항을 계기로 화북지대에서 적들에게 군 지휘처가 야습을 받고 이덕구(국기훈장 3급) 부대는 화북-삼양 지경의 밭에서 우세한 적들과 기동적인 방어전을 완강히 전개하면서 최후까지 유격대오를 보존하기 위하여 전우들을 후퇴시킨 다음 총탄이 떨어질 때까지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바쳐 싸우다가 야수들의 흉탄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들이야말로 그 어떤 시련과 준엄한 역경에서도 비관 실망치 않고 오직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이 길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싸운 용사들이라 하겠다. 수욕인 화신인 인간 백정들은 사살된 그의 시체를 벌거 벗기고 일반 인민들에 오래 위협하기 위하여 전신에 알콜을 뿌리고 십자가에 결박하여 제주도청 입구에 세워놓고 이것이 《산 부대》사령관 《리 덕구》이라고 시민들에게 광포하면서 거기를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죽창으로 찌르도록 하는 한편 주민들을 공갈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십자가에 매여 달아 두었다가 사라봉 뒷바다에 수장해 버렸다고 한다.”(김봉현·김민주 공편, 『제주도민들의 《4·3》무장투쟁사』, 대판시 : 문우사인쇄사,1963, pp.237∼238.)

▣이덕구의 사살 공적?

이처럼 제2연대가 이덕구를 사살한 것으로 보도하는 등 군·경간에 공적 다툼이 있었고 이 일로 문창송 경위의 지휘 공적은 오리무중이 되고 말았다.

이덕구의 체포 또는 사살에는 사회에서는 200만원, 군에서는 200만원, 경찰에서도 200만원 도합 600만원의 현상금이 내결렸으나 막상 사살해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문창송 경위와 대원들에게는 단 2만원의 보상금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덕구를 잡은 다음 이튿날 새벽에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이 화북지서에 들이닥쳤다.

“귀관이 화북지서장이요?”

“그렇소, 내가 제주경찰서 관할 화북지서장이오”

“남로당 폭도사령관 이덕구를 생포하지 못하고 사살은 왜 했소?”

“당신네 2연대 군인들은 사살도 못했잖소”

그러니 제2연대장 함병선 대령은 아무말도 못하고 돌아갔다는 일화도 전해져 온다. 이는 군·경 간의 공적 다툼이 빚은 감정이 아니었는가 생각한다.

이 공로로 사살 지휘자 김영주는 1계급 특진이 되어 문창송의 후임으로 화북지서장이 되고, 또다시 경찰국으로 영전을 하였다. 당시 지휘자와 제보를 한 고00(제주읍 용강리 출신)과 고00(제주읍 도련리 출신)에게는 내무부 장관의 표창이 있었다(오성찬. 전게서, p.138.). 그런데 문창송 경위는 뒤에 경찰 직제가 바뀐 다음 모슬포 경찰서 공안주임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3개월의 초등군사반 교육, 경찰국 작전주임을 거쳐 6·25한국전쟁 당시 제주경찰서 경비·공안주임으로 부임했을 때 예비검속으로 잡혀 온 허○○와 고00을 우연히 유치장 입구에서 보았다. 이들로부터 ‘연대장 고00이 남로당 인민유격대들로부터 경찰가족이라 하여 부모를 살해당했던 백○○ 경위에 의해 즉결 처분됐다’ 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제주자유수호협의회, 『제주도의 4월 3일은?❹집』, 제주 : 도서출판 열림문화, 2012, p.213.). 살펴보니 이미 고00신은 처형된 터라 고00은 대단히 겁에 질려 있음을 보았다. 문창송 경위로서는 통분할 일이었다.

이덕구 사살의 가장 큰 공로자가 덧없이 죽은 것, 문창송 경위는 허○○와 고00에 대한 공로 등을 들어 이들을 빼어서 경찰관 지로인(知路人)을 하도록 하다가 그 후 경찰에 특채 되도록 제주경찰서장에게 요청하여 그들은 경찰공무원이 되었다.

▣남로당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 이덕구의 선전포고

끝으로 남로당 인민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가 1948년 10·19여순반란사건 직후인 10월 24일 대한민국을 상대로 선전포고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남로당의 느끼는 압박감은 위중하였지만, 북한으로부터 내려오는 김일성 정권수립 소식이나 각종 지령 등은 4·3 주동자들에게 희망과 힘이 되었다. 더구나 10·19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한 것은 권토중래할 수 있는 절호의 반격 기회로 판단하게 되었다.

1948년 10월 24일 남로당 제주도당 구국투쟁위원회는 제주읍 월평리에서 주동자 14명이 모여 남로당, 민애청, 여성동맹, 농민위원회와 탈영병 등을 혼성하여 소련식 혁명투쟁위원회로 개편(고재우, 『제주4·3폭동의 진상은 이렇다』, 998.8.5. pp.39-40쪽) 체제를 정비하고 당일, 대한민국에 선전포고를 했다.(김봉현 김민주,『제주도인민들의4·3무장투쟁사』, 오사카 문우사, 1963.12.15., p.165. /고문승, 『제주사람들의 설움』,신아문화사, 1991.9.1., p. 410, /문국주, 『조선사회주의운동사 사전(제주도4·3투쟁)』, 도오쿄 평론사, 1981.)

남로당제주도당은 러시아 10월혁명기념일(러시아 10월혁명은 10월 25일_양력 11월 7일, 2월혁명은 1917년 러시아력으로 2월 23일_양력 3월 8일)을 계기로 총반격을 기획한 것이다. 이덕구의 선전포고문과 군경에게 보낸 ‘호소문’은 당시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호진(28세) 등 3명이 3000매를 인쇄(신상준, 『제주도4·3사건』하권, 한국복지행정연구소, 2002.3., pp. 597-598.) 배포했다. 그 내용은,

 

선전포고문(신상준, 『제주도4·3사건』하권,한국복지행정연구소, 2002.3, p.598.)

잔인하기 이를데 없는 警察官들이여 !

미제국주의와 李承晩의 개들이여 !

너희들은 무고한 島民·男女老幼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고 있다.

天人도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을 一片의 주저함도 없이 범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너희들의 極惡非道한 惡事를 동족으로서 부끄럽지만 참고 견디어 왔지만, 은인자중도 이제는 한도에 달하였다.

인민의 원한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너희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가까운 時日 內에 捲土重來하기로 결정하였다.

人民軍 司令官 李德九

 

국방군과 경찰원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신상준, 『제주도4·3사건』하권, 한국복지행정연구소, 2002.3. p. 598.)

 

친애하는 장병, 警察官들, 이여 !

총뿌리를 잘 살펴라 ! 그 총이 어디서 나왔느냐 ?

그 총은 우리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진 세금으로 산 총이다 !

총뿌리란 당신들의 부모, 형제, 자매들 앞에 쏘지 말라 !

귀한 총자 총탄알 허비 말라 !

당신네 부모, 형제, 당신들까지 지켜준다 !

그 총은 총 임자에게 돌려주자 !

濟州島 人民들은 당신들을 믿고 있다!

당신들의 피를 희생으로 바치지 말 것을 !

침략자 ! 米帝를 이 강토로 쫓겨내기 위하여 !

매국노 李承晩 악당을 반대하기 위하여 !

당신들은 총뿌리를 놈들에게 돌리라 !

당신들은 人民의 편으로 넘어가라 !

내 나라, 내 집, 내 부모,

내 형제 지켜주는 빨치산들과 함께 싸우라 !

친애하는 당신들은 !

내내 朝鮮人民의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라 !

이덕구의 선전포고문이 6하 원칙에 비춰 요건불비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일개의 지방단위 빨치산 책임자가 작성한 선전포고문으로서 목적, 대상, 시기, 주체가 있고, 동시에 배포한 군경에게 보낸 호소문을 보면 요건상 흠이 있다하여 선전포고를 부인할 정도는 아니다.

우선 ‘선전포고는 국가(단체)에게 전쟁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인데, 전쟁 목적(인민들의 원한과 복수를 위해서), 대상(경찰, 미국, 대한민국 정부), 시기(머지않은 장래 : 경찰프락치 사건에서 11월 1일임을 알 수 있다)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4·3진실 아카데미」 강의자료, 강방수 편 34쪽, 제주4·3진실규명을위한도민연대, 2019.3.) 또 주체(인민군 사령관 이덕구)도 명시되어 있다.

특히 이 선전포고는 시대를 달리해서, 우파 아닌 인사들 여려 명이, 각자 쓴 책에서, 분명하게 ‘선전포고’라 기록하였고, 여기에 저자들이 의문을 제기한 바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이덕구나 남로당 제주도당의 진의가 선전포고임을 확인했거나 자인한 듯하다.

아래 서적에서는 남로당 인민유격대 이덕구의 선전포고를 인정하고 있다.

* 문국주, 『조선사회주의운동사사전』,일본 동경 평론사, 1981.

* 김봉현·김민주,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오사카 문우사, 1963.

* 『4·3은 말한다』4권, 전예원, 1997.

* 고창훈, 『해방전후사의 인식』4권, 한길사, 2012.

* 김관후, 『4·3과 인물』증보판, 제주문화원, 2019.

지난 2020년 7월 31일(금) 14:00 제주4·3평화재단기념관 1층 대강당에서【4·3과 미디어】주제로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언론학회가 주최한 제주4·3 72주년 기념 학술세미나가 있었다.

언론개혁제주시민포럼대표·제주대학명예교수인 고영철은 ‘산사람 쪽(좌익무장대의 최고지휘자)의 포고문과 담화문이 8월에 뿌려졌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이를 입증할 근거가 없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포고문과 담화문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제주일보( 제주일보, 1999. 11. 03. 6면에 실려 있는 기사 내용)의 경우, 유일하게 이 유인물이 10월 24일 오전에 제주신보에서 인쇄되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 주장을 입증할 근거가 하나도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남로당 인민유격대 이덕구의 선전포고를 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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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악전투 2024-01-20 07:13:24
제주4․3발발의 주체는 남로당이고 남로당은 조선공산당의 후계체이며 남로당 강령은 마르크스․레닌 사상에 입각한 공산주의체제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다.

녹하악전투 2024-01-16 16:53:13
2001년 9월 27일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제주4.3특별법 위헌심판청구재판 결정문에서 '무장유격대와 협력하여 진압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등은 4.3희생자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라고 결정했는데도 제9연대 - 제2연대 고등군법회의에서 형을 받은 사람(좌익혐의)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대한민국 건국의 정체성은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