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 (31)노예의 슬픔, 고레섬(Ile de Goré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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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큰별 세네갈] (31)노예의 슬픔, 고레섬(Ile de Gorée)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1.16 22:2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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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운 선생님의 KOICA 해외교육 봉사활동 체험기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노예의 슬픔, 고레섬(Ile de Gorée)

고레섬(Ile de Gorée)에 다녀왔다. 처음 한국에서 고레섬에 대해서 들었을 때 나는 ‘고래섬’이라고 들었다. 고래가 많이 사는 섬인가 했었다. Whale Island 를 번역한 것인가 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섬 이름이 ‘고레’였다. 이곳이 세네갈 최고의 관광 명소다.

유아교육청장인 Ousmane Diouf와 유나 선생, 아끼꼬, 그리고 그의 다섯 식구들도 함께 갔다. 선착장에서 9시 30분에 만나기로 했으나 거의 11시가 되어서 청장 가족이 나타났다. 시간관념은 누구나 없어 보인다.

고레섬의 노예상
고레섬의 노예상

배 삯은 1500 세파다. 나는 외국인 ID 카드가 있어서 할인을 받았다. 섬까지는 25분 정도 걸리는데 1000 톤 가량의 배에 관광객이 가득하다. 섬에 도착하여 그곳 유치원에 짐을 풀고 간단히 바께트와 고기 조림으로 아침을 먹었다.

주변 관광에 나섰다. 길가에는 세네갈 스타일 그림 판매상들이 계속 호객한다. 그림 중에는 배에 탄 원주민, 악기 연주하는 사람, 춤추는 여인 등 다양하다. 그러나 대부분은 구상적이지 않고 추상적이다. 또 많은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유화가 아니라 화려한 천을 잘라 붙이고 부분 부분에 색을 입힌 종합 회화라고 해야 하나 좀 특이한 그림들이다. 이곳에서는 실제 판매 가격보다 처음에 10배 정도 높게 부른다니, 구입을 원해도 이런 거래 과정이 우리에게는 힘든 일이다. 나도 귀국할 때는 선물로 몇 점 사야하는 데 나중에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고레섬 전시관의 그림
고레섬 전시관의 그림

이곳은 서부 아프리카에서 포획해온 모든 흑인 노예들을 가둬 놓고 유럽, 미 대륙 등으로 수출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모아 놓은 집결지였다. 형제, 부부, 아이와 부모 등 마치 동물처럼 갈라놓고, 가축처럼 취급하며 누울 곳도 없이 거의 선 채로 생활했다. 하루에 한 번 화장실 가는 것을 허용하는 등 동물 이하의 관리를 받으며 대기하다가 마지막으로 고향을 떠났던 곳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고레섬(Goree Island)은 서부 아프리카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다카르 반대쪽 세네갈 해안에서 3.5Km 떨어져 있는 1.8ha 규모의 작은 섬으로 한때는 노예무역의 기지로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의 쟁탈 전의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15세기 중반에서 18세기에 걸쳐 약 20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프리카인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주 대륙으로 팔려갔다. 우리가 기억하는 TV 드라마 ‘뿌리’의 주인공 쿤타칸테가 노예로 팔려나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현재는 화해의 장소이자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인권유린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로 1978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손과 발을 묶었던 장비들
손과 발을 묶었던 장비들

 

1776년 네덜란드에 의해 세워진 노예의 집은 고레섬에 마지막으로 남은 노예 시설이었다. 막사의 방은 남자를 위한 시설로 가로, 세로 각각 2.6m이며, 성인 15~20명을 수용했다. 노예들은 목과 팔이 사슬에 묶인 채 등을 벽에 붙이고 앉았다. 쇠사슬 중간에는 큰 쇠구슬이 달려 있어서 움직이려면 노예가 두 발과 두 손을 들어올려야 했다. 노예들은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에 한 번, 집 안에서만 쇠사슬에서 해방되었다.

작은 막사에는 150에서 200명 정도의 노예를 수용했는데, 이곳에 수용된 노예는 길게는 3개월을 기다려야 배에 실려 다른 곳으로 팔려나갔다. 그들의 행선지는 전적으로 구매자에게 달려 있었고, 대부분의 노예는 가족과 생이별을 겪었다. 매수자들과 유럽의 노예 무역상들은 계단 발코니에 기대어 노예를 바라보며 근육 값을 매기고 품질을 논의했다.

어린이들을 수용하는 특별한 방도 있었는데, 이곳의 사망률이 가장 높았다. 영양 결핍과 전염병 등이 큰 문제였을 것이다. 젊은 여성 노예들은 다른 여자들과 분리되어 가장 비싸게 팔려나갔다. 남자 노예의 가치는 몸무게로 결정되었는데 최소 몸무게가 60Kg이 적정선이었다.

노예의 집 내부, 경사진 복도는 오늘날 ‘돌아오지 않는 여행’으로 가는 문으로 알려져 있다.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원형의 방들과 또 별도의 수용소는 중앙에서 감시하게 되어 있고 바닥 쪽으로만 문이 나 있다. 탈출을 시도해도 바다에 빠져 죽게 된 구조다. 이 문을 통해 바다로 끌려간 노예는 아프리카와 영영 이별했기 때문이다. 문 바로 밖에는 야자수 나무로 만든 부두가 있어, 짐 싣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노예들은 배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바다에 뛰어들어 도망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경비대가 쏜 총에 맞거나 상어에게 잡아먹혀 노예들은 멀리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아프거나 부상당한 노예들은 바다에 던져져 상어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었다.

고레섬의 판매용 그림들
고레섬의 판매용 그림들

발에 묶어 놓았던 쇠사슬이 전시되어 있었다. 옥외엔 많은 대포들도 설치되어 있다. 아마도 서아프리카 전초 기지였던 것 같다. 박물관에는 노예 관련 전시물들은 별로 없고,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유물, 선교사들을 포함해서 근대의 역사적 인물, 사진 등으로 메워져 있었다.

다시 현지 유치원으로 가서 점심도 먹고 수영도 했다. 선착장 입구에 작은 해안이 있어 수영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백여 명이 수영하고 있다. 청장과 아들 모하메드가 함께 바다에 뛰어들어 즐겁게 부자의 정을 나누고 있다. 나는 수영 준비가 안 되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생선도 팔고 있었는데 사모님이 생선을 사서 학교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배가 출발하기 직전에 냉장고 생선이 생각나서 청장과 두 딸이 학교로 돌아갔고, 그사이에 배가 출발하여 결국 2시간 후에 다카르항에서 다시 재회했다.

노예들의 유일한 출입문

오늘은 유나 선생의 생일이다. 오는 길에 터키 식당에 들러 유나, 아끼꼬와 함께 생일을 축하하고 식사도 대접했다. 떠나기 전에 먹은 제부젬 때문에 배가 고프지 않아 음식을 좀 남겼다.

유나 선생은 요즘 ‘살사’ 춤 배우기에 바쁘다. 현지인에게서 배우는데 우리 집 인근에 ‘아프리칸 식당’이 있어서 그곳에서 식사도 하고 춤도 배운단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여서 별걱정은 안 되지만 그래도 항상 마음이 안 놓인다. 이제 서른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데 결혼을 해야 될 것 같다. 그녀도 내년에는 결혼하겠다고 한다. 해외로만 돌아다니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제한적이고, 남자 사귈 기회도 적었을 것이다. 오늘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서 잠이 잘 안 올 것 같다.

(2014년 12월 27일)

 

새해의 태양

새해 태양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12월 31일 즉, 그해 마지막 날은 온통 축제의 날이다. 폭죽이 쉬지 않고 밤새 터진다. 사실 며칠 전부터 밤만 되면 2, 30분 단위로 계속 폭죽이 터지고 있다. 모스크의 스피커 소리와 함께 수면 방해를 계속해 왔다. 어제는 결국 두 차례나 잠에서 깨어 폭죽을 구경했다. 10시부터는 소규모로 12시경부터는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수준으로 폭죽이 터졌다. 다카르 시내 여기저기 안 터지는 곳이 없다. 돈도 많이 들텐데, 어디서 그 많은 재화를 구해다가 소비하는지 모르겠다. 이곳이 중국도 아닌데 말이다. 폭죽의 아름다움은 한국과 별 차이 없다. 결국

모두 중국에서 수입해서 터뜨리는 것이니까 거의 같을 것이다.

어제 저녁엔 연말 제야 미사를 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저녁 6시 30분 미사에 갔었다. 그런데 성당 마당은 온통 휴지 더미로 가득가득 쌓여 날리고 있었다.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살펴보니 성당 안에서 혼인 미사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거의 끝나고 있었다. 덕택에 성체를 영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저녁 미사는 없고 혼배미사만 일찍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 신부는 결혼이 너무 신나는 일인지 성가대에 함께 가서 노래도 부르고, 스텝을 밟으며 신나게 춤을 추고 있다.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서의 수줍은 신부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돌아올 수 없는 문
돌아올 수 없는 문

안내판을 보니 저녁 9시 30분에 제야 미사가 있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 쉬고 아침 미사를 다녀왔다. 아침 미사는 백인 주교님이 집전했다. 세네갈에는 추기경도 계시고 주교님도 여러분 계셔서 한번 그분들의 미사를 참례하고 싶었는데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을 수 있었다. 젊잖고 얼굴도 잘 생긴 풍채 좋은 주교님이셨다. 역시 강론은 길었다. 제의 후면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 신부들의 제의에는 성인들의 모습을 새긴 옷들이 자주 보였다.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다.

나도 새해 소망을 말해 본다. 아들이 시험에도 합격하고 딸이 결혼도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가족의 건강과 하는 일들이 모두 잘 되기를 기도한다. 개인적으로는 열심한 신앙생활과 여러 가지 유혹과 욕심에서 벗어나야겠다. 또 남에게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곳에서 추진하는 일들도 모두 잘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주변 사람들 특히 장인, 장모, 형제들, 친척들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 성당을 나오면서 모자를 두고 왔다. 어떤 분이 알려줘서 찾아 올 수 있었다. 덤벙댔나 보다. 좀 더 차분히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2015년 1월 1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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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2024-01-17 12:35:46
고래섬이라서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노예시장으로 유명했던 고레섬이었네요. 지금 이순간 평화로운 제주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