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길서 만나는 제주4․3의 진실(3)읍사무소에 휘날린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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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길서 만나는 제주4․3의 진실(3)읍사무소에 휘날린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1.26 16: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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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학 제주4.3사건 재정립시민연대 교육홍보위원장
- 제주읍장실에 수류탄 터지고, 국기게양대엔 인공기 휘날려

관덕정 바로 서쪽에 있었던 북제주군 제주읍사무소 터는 현재 공공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이 자리는 역사·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목관아의 사창이 있었고, 제주읍의 읍사무소, 제주시 최초의 청사였던 곳이다.

제주읍장실에 수류탄 터지고, 국기게양대엔 인공기 휘날려

1948년 8월 30일 14:30 제주읍장김차봉(김차봉은 경감 계급으로 5대 제주경찰서장을 지내었다 1947.05.24.~1947.09.26.) 사무실에는 폭탄이 던져졌으나 읍장은 출타 중이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김차봉 읍장은 제주경찰서장을 사임하고 8월 23일 제주읍장으로 부임한지 1주일만의 일이다.

김차봉 읍장은 오전의 임무를 마치고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마치 외출중이었다. 12:30 2층에 위치한 읍장실에서 생각지도 않은 폭음이 울려퍼졌다. 무척이나 놀라서 밑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읍장사무실로 달려 올라갔더니 읍장실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고 깨어진 유리창 조각만 밑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경찰 조사 결과 읍장실에 투척한 무기는 수류탄이었다.

경찰이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당시 뚜렷한 단서조차 찾지 못했고, 나중에는 지하에서 암약하던 읍사무소 남로당의 프락치임이 밝혀졌다.

김차봉 읍장은 제주감찰청 부청장(1947.01.21.~1947.05.24.)재직 시 1947년 2월 17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3·1기념 투쟁 제주도위원회’ 재정부장으로 선정된 일이 있었다. 이는 김차봉의 의사도 듣지 않고 소위 전형위원이 임의대로 결정하여 추천해 버린 것이다.

후일 1947년 5월 8일 최원순 제주심리원 원장의 심리 아래 속개된 3·1사건 연루자 공판에서 재판부는 고창무·김두훈 등 피고인들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경찰 간부들을 증인으로 출석시켜 증언을 들었다. 당시 제주감찰청 부청장인 김차봉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2월 18일의 김두훈씨 댁에서의 집합은 무허가였고 본인은 3․1기념준비회 재정부장으로 선정되었기에 이를 제명하기 위하여 동 회합에 참가했다.”(제주신보. 1947. 05. 08) 고 했다.

읍장실 폭탄 투척 사건 이후 더욱 놀라운 일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일어났다. 제주읍 청사의 국기 게양대에 대한민국의 국기 대신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걸려있는 사건이 발생했다.(강용삼·이경수 편저, 『대하실록 제주100년』, 서울 : 태광출판사, 1984, p.640.) 더군더나 인공기가 며칠째 걸려있었지만 아무도 모르고 있다가 주민의 신고에 의해서야 발견해 낸 것이었다. 이 두 사건으로 관청의 기강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내렸고 경찰은 경찰대로 허를 찔린 꼴이 되고 말았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 수류탄 투척 사건과 같이 외부에서 범인이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분명히 읍사무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프락치의 소행이 분명했다.

나중에 인공기가 내걸렸던 날을 전후로 숙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혐의자를 조사했다. 그중 건축기술자인 독신 박모 직원의 하숙집을 수색한 결과 인공기를 그린 것으로 보이는 붉은 잉크, 그밖에 증거가 될 만한 물건 등이 발견되어 계엄사령부에 체포되었다.

남로당 제주도당 지령에 의해 범인 박은 하숙집에서 인공기를 그린 후 숙직날을 이용하여 어두운 밤에 국기 게양대에 달아 올린 것이다.

인공기의 디자인 초안 제작은 평양미술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한 화가인 김주경이 했다는 설과 독립운동가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조카인 신해균 화백이 했다는 설 2가지가 있다.

1948년 10월 7일 제주도 대부분의 마을이 좌익 삐라와 유인물, 북한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로 홍수를 이루었다. 제주도 동쪽 끝에 있는 최소 5개 마을에서 삐라와 깃발이 소규모 시위에 이용됐다. 그 중 한 시위는 약 200명의 좌익들이 모여서 조천리의 경찰지서 바로 앞에서 진행되었다. 경찰은 공포탄을 발사하여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체포된 자나 사상자는 없었다.(971 Counter Intelligence Corps, USAFIK-CIC Monthly Report 1948.09.16.~1948.10.15) 10월 24일 오전 7시 공군 정찰대는 산발적인 군중집회가 여러 마을에서 열리고 있었으며 집회장에는 인공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기)가 나부끼고 있었다고 보고했다.(무선 감청)(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948. 10. 25)

서울신문 1948년 10월 13일 기사에는 ‘제주 각처에 인공기’ 제하에

“【제주】요즈음 경향 각지에 인민공화국기를 게양하여 일반의 화제가 되고 있는데 제주 읍내에서도 여기저기서 게양되었다. 또 지난 30일 밤 제주읍사무소를 비롯하여 오현중학교 국기대에 인공기가 게양되었다 하며 제주북국민학교 교정에도 난데없는 기가 떨어져 있었다 하는데 경찰당국에서는 즉시 활동을 개시하여 피의자 1명을 체포하고 문초 중에 있다 한다.” 고 보도하고 있다.

한성일보·국제신문 두 신문의 1948년 10월 3일 기사에도 ‘경찰과 폭도 접전 / 제주도 사태 재악화’ 제하에

“목하 남제주군에서는 소요부대와 경찰대 사이에 접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 진상은 아직 알 수 없다. 한편 지난 9월 20일 밤중에는 제주읍내 수 개소에 인민공화국 국기가 게양되었으며 범인 1명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이에 앞서 지난 9월 18일에는 성산면 고성리에서 전(前) 구장 오만순(吳萬淳)씨와 김모가 소요인들에게 각각 살해되었으며 이날 읍내에서는 ‘인민공화국’을 찬양하는 다수의 삐라가 산포되었다.【제주】”(한성일보 1948년 10월 3일. 국제신문 1948년 10월 3일)

(같은 기사 국제신문 48. 10. 3)

제9연대 헌병대장 박창록 증언(2001.05.15.)에 의하면 “나는 경비대 사령부에서 오라고 하기에 갔더니 헌병을 하라고 해서 헌병교육을 받고 제주도에 갔습니다. 제주도에 산지항이라고 큰 항구가 있었는데, 거기에 내려서 여관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읍사무소에도 인공기, 농림학교에도 인공기, 하여튼 인공기가 많이 꽂혀 있어요. 큰 별이 그려져 있는 인공기 말이요. 이것들을 태우도록 했지요. 이게 제주도가 공산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나종삼 편저.『제주4·3사건의 진상』. 서울: 아성사, 2013, p.216.)

 

1948년 9월 조선인민공화국 정부 수립되며 남한 각지에 인공기 게양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수립 직후부터 1948년 7월 10일까지 북한도 대한민국 국기인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북한에서 태극기 폐지에 앞장선 사람이 바로 연안파 거두 김두봉(1948년 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가 수반)이었다. 김두봉은 태극기를 “조선봉건시대의 망여유물”이라고 혹평했다고 하면서 태극기는 비과학적이며 미신적인 『주역』에 근거를 둔 낡은 것“이고 ”태극기는 내용이 어려워 각양각색으로 그려진 채 사용됐다.”라고 비방했다. 이러한 근거로 태극기를 폐지하면서, 북한 정권은 새 국기를 제정하고 국기에 대한 조항을 헌법에 두었다.(국사편찬위원회 편집, 『북한관계사료집』 (전46권: 경기도 과천시: 국사편찬위원회, 1982-2005)제7권, pp.176~202.)

이때 북제주 한림면 옹포리 통조림 공장 굴뚝 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게양되었던 사실은 옹포리 주민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1948년 9월 9일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자 남조선노동당이 남한 각지에서 ‘인공기 게양투쟁’(신상준, 『제주4․3사건Ⅴ』, 제주 : 도서출판 제주문화, 2010, p.343.)을 전개했는데, 제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 방첩대의 1948년 10월 18일자 「월간정보보고서」에 의하면 “당 기간 중 남한의 좌익이 남한 전역의 공공건물 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기를 게양했다는 보고가 대단히 많이 볼 수 있었다. 이들 국기는 다양한 규격으로 종이나 천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것은 대단히 잘 만들어졌고 어떤 것은 매우 조잡하게 만들어졌다. 많은 이들 국기에는 포스터가 같이 붙여졌는데 이 포스터를 제거하는 자는 누구든지 처형한다고 협박하고 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상게서, p.343.)

9월말 부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반란군 인민유격대들은 도내 요소에 5각 별이 그려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를 게양하고 다음의 적기가를 부르면서 계속하여 이들은 무력 도발을 일으켰다.

제주도4·3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시위대나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남로당마을자위대, 남로당인민유격대가 아래의 노래 “적기가” 나 “인민항쟁가”[2008. 4. 8. 오균택 증언(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1동 1305-3. 402호)] 를 부르고, 그들이 살포한 성명문이나 전단에는 “조선인민공화국만세 !” 또는 “인민군 만세”가 구호로 제시되고 있는 점은 제주도4·3폭동반란사건의 주체(신상준, 전게서, p.343.)가 남조선노동당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적기가(赤旗歌, "The Red Flag")

   (적기가는 좌익,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된 노래이다.)

 

"민중의 붉은 기는 전사의 시체를 감싸고

시체가 식어 굳기전에 혈조는 깃발을 물들인다

원수와의 혈전에서 붉은 기를 버린 놈이 어떤 놈이냐

돈과 직위에 꼬임을 받은 더럽고도 비겁한 그놈들이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붉은 기 높이 들고 우리는 나가기를 맹세해

오너라 감옥아 단두대야 이것이 고별의 노래란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비겁한 자야 갈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키리라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굳게 맹세해"

 

인민항쟁가

(작곡가 김순남이 대구 10.1 사건을 기리기 위해 1946년 작곡한 노래. 가사는 시인 임화가 썼다. 이 노래는 4·3사건 좌익에 의해 광범위하게 불려졌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세한 깃발

더운 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 속 울려온다

동무야 잘 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는 피 용솟음친다

백색 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 떨리는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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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하악전투 2024-01-26 17:51:22
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들은 인공기를 곳곳에 게양하여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부르며 건국 인사들을 살해하고 방화 약탈을 자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