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호의 일본아리랑](113) 38년간 지속된 “'화산도'를 읽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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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호의 일본아리랑](113) 38년간 지속된 “'화산도'를 읽는 모임”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2.0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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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재일작가 김길호 선생

38년간 지속된 “'화산도'를 읽는 모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난 가을 한국 여행했습니다. 서울, 제주, 부산을 돌아봤어요. 혼자서 여러 곳에 가고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또 가고 싶어요. 안녕히 계십시오" 한국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행한 장욱진 화가의 '나무'라는 그림엽서에, 정창헌씨가 보내온 올해의 연하장이었다. 그는 재일동포 2세인데 본적지가 제주 애월읍이다.

연하장에는 가끔 생각하지도 않았던 사람한테서 받는 깜짝 연하장도 있다. 연하장 무용론 속에서도 이 깜짝 연하장이야말로 연하장의 필요성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우선순위 제1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깜짝 놀랄 내용의 연하장도 아니지만 나

김석범씨가 보낸 연하엽서
김석범씨가 기타오카 도시노리씨에게 보낸 연하엽서

에게는,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놀란 깜짝 연하장이었다.

10여 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서 요양 중이라는 정창헌씨의 연하장을 당시에 받고 정말 깜짝 놀랐었다. 그후, 나는 조용히 요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하장 보내는 것을 보류하는 사이에 서로가 그만두게 되면서 연락이 끊겼었다. 그런데 그가 혼자서 한국에 갔다 왔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건강을 회복했다니 너무 반가웠다.

바로 나도 연하장을 보내고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전화가 왔다. 건강을 되찾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고 했다. 50년 만에 한국에 갔다 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하나 놀랄 말을 들려주었다. 1월 22일 저녁에 쓰루하시역 가까운 곳에 있는 이자카야(선술집) "부아이소"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날은 김석범 소설, <화산도를 읽는 모임>의 날이라고 했다.

"아니 아직도 그 모임을 계속하고 있습니까?" "네. 계속하고 있습니다. 멤버는 길호씨가 아는 기타오카 도시노리씨, 다카오 도시히코씨 등도 여전히 참석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후 다섯 시부터입니다. 모두 반가워할 것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래서 끊은 전화였다.

필자는 5시까지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6시 지나서 약속한 부아이소에 갔다. 십여 년 만에 만난 정창헌, 기타오카, 다카오씨와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처음 보는 두 분, 이노우에 가즈히코, 무라다 다카코씨와도 자기소개를 하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이노우에씨는 기타오카씨와 교토 같은 지역에 살고 있으며, 무라다 다카코씨는 오사카문학학교 사무국장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무라다씨 부인이었다.

저녁 모임은 보통 저녁 6시 이후이다. 그런데 5시 모임인 것은 모두 정년퇴직을 하니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5시라는 것을 알았는데, 새삼스럽게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훤출하게 큰 키에 말끔한 복장으로 직장을 다니던 다카오씨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것도 인상적이었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필자도 이 모임에 가끔 참석했었다.

재일동포 2세인 정창헌씨는 필자보다 나이는 4살 아래지만 1980년의 오사카문학학교 동기였다. 그는 소설이고, 나는 시였다. 그가 문학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 <한국어자주강좌>를 열어서 가르치다가 나고야로 전근 가기 때문에 내가 약 5년 정도 가르쳤었다. 이때 수강생이 다카오씨였다. 그후에 문학을 하는 기타오카씨가 대표가 되어 <화산도를 읽는 모임>을 만들고 금년까지 38년간 계속하고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카야 부아이소는 재일동포 2세 소설가 김유정(본명 김계자)씨가 운영하는 가게인데, 그녀는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지금은 요양 중이다. 김유정씨는 제주 표선면 토산리가 본적지인데, 지난해에는 토산리 출신의 세 자매를 주인공으로 <세 자매>라는 장편소설과 단편집을 일본어로 발행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러한 인연도 있어서 부아이소는 우리들의 단골집의 하나인데, 이날 모인 6명 중에 오사카시에 거주하는 사람은 필자 혼자뿐이었다. 십여 년 전에도 모두 인근 도시에서 모였는데, 작품평을 놓고 뜨거운 토론 속에 마지막 열차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갔던 때가 있었는데, 기타오카씨가 그 기억을 반추했다.

<화산도를 읽는 모임>은 기타오카씨가 계속 대표를 맡으면서 정창헌, 다카오씨를 주축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갔고 돌아가신 분도 있었다. 필자는 십여 년 전부터 참가를 안 했는데, 나는 벌써 해산했을 것이라는 나의 막연한 추측을 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38년간이나 계속해 왔다는 말에 가슴 뭉클했으며, 기타오카씨에게 그 지속성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가 나가고, 또 들어 오면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금도 화산도 작가, 김석범 선생님과는 교류를 나누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방에서 금년에 온 연하장을 보여 주었다. 금년 처음 열린 <화산도를 읽는 모임>이어서 참가한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갖고 왔었다. 엽서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김석범 선생의 독특한 필체는 예전과 전혀 다름없었다. 오는 2월 26일, 부아이소에서 <화산도를 읽는 모임>은 다시 열린다. 물론 필자도 참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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