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큰 별 세네갈](34)생루이(Saint-Loui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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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큰 별 세네갈](34)생루이(Saint-Louis)에서
  • 제주경제일보
  • 승인 2024.02.25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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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운 선생님의 KOICA 해외 교육 봉사 활동 체험기
이영운 선생님
이영운 선생님

생루이(Aaint-Louis)에서 

지난주에는 Saint-Louis를 다녀왔다. 2월 3일부터 5일까지다. 다카에서 Sept-plus 차로 갔는데 네 시간 반 정도 걸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7시 반 경에 터미널 Pekine까지는 택시로 갔다. 2500세파를 지불했다. 작년까지는 Garage라고 하는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터미널이 있었으나, 교통이 혼잡해서인지 다카의 한참 외곽지인 Pekine으로 종합터미널이 이사했다.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망이 집결해 있는 곳이어서 지극히 혼잡스러

다카의 종합 터미널
다카의 종합 터미널

웠다. 입구에서부터 잡상인들이 뒤엉키고 차량들은 어찌나 뒤섞이고 있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또 말 마차(말이 끄는 이동 수단), 오토바이 등이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Saint-Louis 터미널(No.4)을 찾아갔다. Sept-plus가 줄지어 서 있다. 이 차가 세네갈의 거의 유일한 대중 교통수단이다. 운전자를 제외하고 7명이 탄다. 다행히 좀 편한 가운데 줄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도착순으로 선택해서 자리를 잡고 또 손님이 다 모아져야 출발한다. 중간에 자주 일어서서 나가는 손님들 때문에 함께 일어서서 비켜 주어야 하는 점이 조금 불편했다.

Saint-Louis에 도착해서는 La Post Hotel로 갔다. 600세파를 지급했다. 프론트 아가씨가 KOICA에서 왔느냐면서 반겨주었다. 미리 예약을 해 두었기 때문이다. 코이카 단원들에게는 10% 할인해 준다.

1887년 지어진 고풍스러운 호텔로 모든 게 과거로 돌아가는 듯했다. 천정에는 비행기 모형들이 여러 개 걸려 있다. 그러나 관리를 잘해서인지 하루 이틀 쉬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객실 열쇠도 비행기 모형 철판에 방 번호가 용접되어 있고 열쇠가 매달려 있다. 1800년대 모습 그대로라고 한다. 호텔 가운데는 야자수 등 열대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벤치도 몇 개 놓여 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이 호텔이 바로 ‘어린 왕자(Le Petit Prince,The Little Prince)’를 지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와 교육자 메르모즈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벽면에는 그의 사진과 그의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과 비행기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생루이 여고생들과
생루이 여고생들과

우리 모두의 청소년 시절에 많은 감흥을 가슴 깊이 남겼던 이 동화를 잠시 추억해 보도록 하다. 널리 퍼진 이 책 앞에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어린 왕자』는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큰 사랑을 받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 안응렬 교수가 번역한 이후 100여종 이상의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끊임없이 번역본이 나오고 새로운 독자가 찾는 것은 그만큼 울림이 큰 작품이라는 뜻일 게다.

『어린 왕자』는 나이에 따라 느끼는 감동도 다르다. 이미 초등학생 때 이 책을 읽은 친구들도 많을 것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과 또 다른 감동을 주는 만큼 감성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작품이다.

첫 페이지에서 작가 생텍쥐페리는 이 책을 어른에게 바친다며 어린이들에게 사과를 구한다. 청소년들에게 아무 인사를 하지 않다니, 좀 섭섭하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가 ‘어른들이란 언제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한다’고 타박하는 걸 보면 웃음이 나온다. 생텍쥐페리는 삶을 도식적으로, 이해타산에 맞춰 생각하지 않는 청소년들은 분명 『어린 왕자』를 이해할 걸로 생각했을 게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 왕뱀?’ 『어린 왕자』의 이야기 구도는 간단하다. 비행사인 주인공이 엔진 이상으로 사하라 사막에 불시착하여 비행기를 고치고 있을 때 어린 왕자가 불쑥 나타났고, 둘이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 날 어린 왕자가 사라지는 내용이다. 어린 왕자는 만나자마자 양 한 마리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어릴 때 코끼리를 삼킨 보아 왕뱀을 그려 어른들에게 보여줬을 때 모두들 ‘모자’라고 하는 바람에 화가의 꿈을 포기하고 외톨이로 지내온 비행사는 망설인다. 하지만 어린 왕자가 보아 왕뱀 그림을 단번에 알아채자 비행사는 어린 왕자에게 양이 담긴 상자 그림을 그려주었고 둘은 금세 친해진다.

어린 왕자는 여러 별을 거쳐 지구에 왔다. 여러 별에서 오간 대화를 음미하며 나라면 어린 왕자에게 어떤 답변을 했을까 상상해 본다. ‘덧없다’와 ‘길들인다’에 대한 나의 해석과 책 속의 해석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고 갈피 갈피마다 숨어 있는 질문과 답변을 음미하면 신비로움이 새어나올 것이다.

생루이 유치원 

일곱 번째로 방문한 지구별에서 어린 왕자는 여우를 만나 관계와 존재, 책임을 알아간다. 어린 왕자처럼 신중하고 의미 있게 삶을 대한다면 나의 꽃 한 송이가 있는 어떤 별을 찾기 위해 밤마다 하늘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마지막에 어린 왕자는 소리 없이 사라진다. “내 별은 너무 멀어서 이 몸을 가지고선 갈 수가 없어요. 너무 무겁거든요” “낡은 껍데기 같은 건 하나도 슬플 게 없잖아요”라고 했던 어린 왕자의 말을 떠올린 비행사가 주변을 둘러보지만 흔적을 찾지 못한다. 어린 왕자는 자기 별로 무사히 돌아갔을까?

어린 왕자가 사라지는 장면이 작가의 마지막과 닮았다고 해서 이 작품이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생텍쥐페리는 실제로 비행사였다. 1900년에 태어난 그는 21세에 군에 징집되어 조종사 훈련을 받았고 23세 때 군용기 조종 면허증을 취득했다. 하지만 비행 중 부상을 입어 바로 비행사의 꿈을 접었다. 『비행사』, 『야간 비행』 같은 작품을 발표한 뒤 34세에 에어프랑스에 입사한다. 36세에 장거리 비행 중 리비아 사막에 추락, 베두인족에게 극적으로 구조되었는데 이때의 경험이 『인간의 대지』와 『어린 왕자』를 집필하는 데 영감을 준다.

43세 때 작가는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 중이던 미국에서 『어린 왕자』를 발표한다.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조국으로 돌아와 비행대에 들어간다. 1944년 7월 31일, 프랑스 독립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마지막 임무인 아홉 번째 정찰 비행을 나간 생텍쥐페리는 실종되고 만다. 나중에 비행기 잔해는 발견되었지만 그는 찾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독일 전투기에 의한 격추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처럼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생텍쥐페리가 떠나고 2년 후, 프랑스에서 『어린 왕자』가 출간되었고 그의 이름과 초상화는 프랑스 국립묘지와 50프랑 지폐에 새겨졌다.

아침 식사는 3000 세파인데 빵 몇 조각, 달걀, 요구르트, 음료수가 전부다. 너무 빈약하고 무성의해 보였다. 이날 다리 건너 안쪽에 있는 Saint-Louis 섬으로 가봤다. 1800년대가 그대로 멈춰 서 있는 느낌이다. 모든 건물은 시멘트 건물인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훼손이 너무 심하다. 벽은 무너지고 페인트는 벗겨지고, 문과 기둥도 부숴지거나 훼손된 것들도 너무 많았다. 아마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서 수리 등이 안 되고 있고, 그렇다고 정부에서 관리 비용을 지불하지도 않고 해서 폐허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어 보였다.

생루이 거리
생루이 거리

관광 안내소에 들렀다. 안내원은 영어를 조금밖에 못 하고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박물관도 있는데 두 번 방문했으나, 항상 문이 닫혀 있었다. 방문객이 없어서인지 휴관 기간인지 알 수가 없었다.

둘째 날 교육청 장학사가 차를 갖고 왔다. 우선 교육청을 방문하여 교육장과 인사하고 방문 내용을 설명했다. 코이카의 하는 일과 일정 등을 얘기하고 가져간 캘린더, 수첩, 코이카 팸플릿 등을 주고 촬영도 했다.

마침 아침 조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육장 자리는 마치 국회의장석처럼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매일 아침 조회를 하는 것은 특이했다. 이곳에서는 어느 기관이든 매일 회의를 하지 않는다. 한 달에 한 번 하기도 하고 우리 유아교육청은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한다. 참석한 모든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두 명의 장학사가 동행했다. 오늘 두 곳의 유치원을 방문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여자가 원장이었고, 3학급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한 학급에 20명 정도이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한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동행한 장학사 중의 한 분은 여자로 영어 통역을 위해 함께 갔다.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었다. 자료나 교육 도구가 거의 없었고, 조명 시설도 없이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특별한 교육과정, 교육계획도 없이 가르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문 유치원은 장애를 지닌 남자 선생님이 원장이었다. 다리를 몹시 절었다. 그러나 단정한 양복 차림으로 우리를 맞았다. 두 학급이 운영 중인데 원래는 세 학급이었으나, 한 학급 교실이 거의 폐허 상태여서 3, 4세는 병합 운영 중이었다. 학생 수는 학급당 15명과 23명이었다. 아이들은 땅바닥에 앉아 있고, 선생님들도 그냥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전에 방문을 모두 끝냈다.

생루이 호텔에서
생루이 호텔에서

장학사님들에게도 준비한 선물을 드리고, 오후에는 좀 한가하게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역을 탐방할 수 있었다. 주거 지역을 관통해 보기로 했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면 좁은 길에 포장된 곳은 거의 없고, 모래 더미가 모든 길을 메우고 있다. 그 모래 더미 위에서 수 많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그 사이에 생선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보인다. 손질하는 생선에 달라붙은 파리들은 수백, 수천 마리다.

바닷가로 나갔다. 이곳은 주요한 생업이 어업이다. 여기저기서 청년들이 어망을 손질하고 수리하고 있다. 모두 성실하고 착해 보인다.

이곳에 가면 꼭 새 공원(Birds Park)에 가보라고 해서 관광 안내소에 예약하러 갔다. 그러나 아무도 가는 사람이 없으니 가려면 혼자 택시를 대절하고, 1인 가이드를 고용하고, 또 그곳에 도착하여 배를 임대하여 새섬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여러 명이 가면 서로 비용을 분담할 수 있으나 혼자 가기엔 부담이 너무 많아 포기했다.

돌아올 때도 셋플러스 승합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차에 이미 사람들이 가득 차 맨 뒤쪽 열 왼쪽 끝에 앉게 되었다. 가장 힘든 자리다. 두 시간 정도 고정된 좁은 공간에 계속 앉아 있다보니 왼쪽 무릎이 계속 쑤신다. 무릎을 펼 수도 움직일 수도 없다. 다음부터는 차를 놓치더라도 기다리다 좋은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굴뚝같다. 너무 힘들었다. 정말 피곤하다. 그러나 무사히 다카에 도착하고 집에 들어서니 피로가 어느덧 사라진 듯했다. 무사히 일정을 마친 것을 감사하며 저녁 기도를 바친다.

(2015년 2월 8일)

실패한 떡국

그제부터 오늘까지가 설 연휴다. 그러나 한국에서나 해당되는 일이고 이곳에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디렉터(청장)에게 한국 명절 중의 설을 설명하고, 이 기간은 쉬겠다고 했다. 그러나 3일간 쉬기가 미안해서 이틀 쉬고, 오늘은 출근했다.

그제는 설명절을 지내기 위해 유나 선생과 함께 시장을 봤다. 이곳에는 나 외에 정종량, 이상윤 자문관이 있는데 정 선생은 나보다 두 살, 이 박사는 12살 아래다. 정 자문관은 서울특별시에서 국제교류 등을 담당했었고, 영국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정년퇴직 후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상윤 박사는 부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코이카 봉사단원, 관리 요원 등을 거쳐 지금은 자문단으로 활동하고 있다. 전공은 수산 증식이다.

내가 차린 설음식
내가 차린 설음식

정 자문관은 나보다 6개월 먼저 왔고, 이 박사는 2년 3개월 근무하고 다음달 10일 귀국한다. 그 후에는 튀니지에 다시 자문관으로 지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내가 맏형벌이 되니 설날 떡국을 우리 집에서 나누기로 했다. 떡국은 사온 것도 있고, 코이카 소장 사모님이 한글학교에서 고생한다고 주신 것도 있다. 인근 재래시장에서 소시지, 생선, 토마토, 요구르트, 콩, 포도주, 닭 등을 구입했다. 새벽 5시경에 일어나서 우선 떡국 고명을 만들기 위해 계란말이, 당근, 가지 등을 삶았다. 소시지 전을 만들고, 생선조림, 떡국 순으로 요리했다.

가장 중요한 음식인 떡국 끓이기는 실패했다. 닭과 함께 넣어서 끓였으니, 거의 닭죽이 되어 버렸다. 떡국은 끓는 국에 마지막에 넣어야 하는 걸 처음부터 함께 끓였으니 당연히 죽이 된 것이다. 다음부터는 끓는 육수에 잠깐 넣어 끓여야겠다고 반성해 본다. 아홉 시경에 모두 도착하여 합동 세배를 하고 함께 즐겁게 식사를 즐겼다. 포도주 2병, 맥주 3명을 모두 비웠다. 이 박사가 술을 사러 나갔으나 주류 판매점을 찾지 못하여 대신 케이크를 사서 돌아왔다. 하긴 세네갈은 무슬림이고 무슬림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술 가게 찾기가 별따기이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다. 한국에서는 밤만 되면 술판이 벌어지고 새벽까지 이어지다가 거리에서 잠든 취객들을 보기가 쉬우나 여기서는 거의 아니 전혀 볼 수 없다.

명절날 쓸쓸한 독거노인 신세를 면했으니 뿌듯했다. 저녁 미사에 다녀오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국에서는 설 미사는 조상에게 감사와 구원을 비는 중요하고 큰 미사인데, 이곳에서는 아무도 특별한 의미를 주지 않는 평범한 예식이다.

(2015녅 2월 20일)

[전 중앙여자고등학교교장, 전 외국어고등학교교장, 전 위미중학교교장, 전 BHA국제학교경영이사, 전 동티모르교육부교육행정자문관, 전 세네갈교육부교육정책자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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